미사와 영성생활
미사를 새로이 이해한다는 것은 미사의 정신을 사는 것이다. 미사 중에 이루어지는 십자가의 신비를 살지 않고서는 미사를 이해할 수 없다. 십자가의 신비를 간직한 마음, 십자가의 신비를 향한 마음, 이것이 영성이다. 때문에 영성생활은 신앙을 받아들이는 기반이며 신앙생활의 목표이기도 하다.
영성생활은 미사에 이루어지는 십자가의 신비를 삶으로 표현하고, 또 일상의 삶 속에서 십자가의 신비를 관상하는 생활이다. 관상은 기도의 최고 경지로서 십자가의 생활 속에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걷는 구도자라면 누구나 관상을 통한 영성생활을 구도의 주축으로 삼아야 한다.
이는 미사 중에 이루어지는 십자가의 신비에 집중하여 선포되는 복음을 듣고, 들은 복음의 말씀을 자신의 마음 속에 뿌리내리며, 이웃과의 관계에서 증거하는 데 있다. 그러기에 전례헌장에서도 미사는 원천이라고 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모인 전세계의 주교들이 모든 문제들에 앞서서 전례의 개혁을 목표로 전례헌장부터 제정한 취지도 여기에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셨고,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우리는 미사에서 듣는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따라 세상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되어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이 되는 것, 이것이 영성생활의 요체이다.
뿌리 깊은 내면적 공허감과 그칠 줄 모르는 사회 불의 앞에서 하느님은 왜 침묵하시는가 하고 묻는 세상에 대하여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오직 한 가지 뿐이다.
하느님은 침묵하시기는 커녕 이미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셨고 그리고 이 말씀은 미사를 통해 계속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제 우리가 스스로 그분의 말씀으로서 살아갈 것이라는 것, 그뿐이다. 영성생활은 지금껏 미사를 통해 하느님의 말씀이 되기를 추구하고 있는 모든 이들이 걸어야 할 구도의 길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걱정에 파묻혀 영성생활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매우 바쁜 나날을 살고 있으며, 그 바닥에는 권태로움, 고독감, 분노 그리고 우울함이 깔려 있다. 이때문에 우리의 생활은 분열되어 있다. '하느님의 나라보다도 그밖의 모든 것'에 더 매달려 있는 것이다(참조 :마태 6,31-33).
이에 대해 예수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권한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수많은 일'에서 '실상 필요한 한 가지 일' (참조 : 루카 10,42)로 관심을 돌려, 일의 비중을 바꾸고 관심의 촛점을 제조명하며 우선순위를 정확히 하도록 요청한다. 예수께서는 우리더러 세상을 도피하도록 권고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살고 있는 세상을 떠나지 말고 오히려 뿌리를 내려 '그밖의 모든 것' 이 제 자리를 찾게 되는 중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옮기라고 촉구한다. 이 중심이란 바로 '하느님의 나라' 이다.
영성생활은 우리를 하느님의 나라로 이끄시는 성령의 선물이다. 그러나 이 선물은 구해야 하는 것이다. 진지한 열망과 힘있는 결단을 통해서만 영성생활은 이루어진다.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는 행위' 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현존을 드러낼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을 유지하기 위한 엄한 수련을 요구한다. 하느님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는 두 가지 수련방법이 있으니 그것은 침묵과 공동체다.
침묵 없이 영성생활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침묵은 하느님만을 위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비롯된다. 침묵 속에서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이끄신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을 위한 침묵의 시간과 공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침묵은 종교의 언어이다(참조 : 마태 6,6). 침묵 안에서 하느님이 말씀하시기 때문이고, 그안에서 비로소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단 침묵의 시간을 마련하면 성령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용약하게 된다. 영혼이 생명력을 받는 것이다. 침묵은 성령과 영혼이 통교하는 시간과 장소이다. 우리의 영혼이 성령의 이끄심을 받는 것은 침묵 속에서인 것이다. 육신의 분주함 속에서 영혼은 생명력이 메말라 병든다.
본시 사람은 영혼을 지닌 유일한 피조물이다. 영혼을 지닌 존재로서 사람은 하느님 앞에 홀로 서는 단독자이다. 육신은 성이나 나이, 재산 그리고 시공의 차별이 있지만 영혼은 전혀 차별이 없다. 그 차제로 영혼은 저마다 존귀하고 평등한 것이다. 생명으로 창조된 모든 영혼은 하느님 앞에 홀로 서서 육신이 처한 차별적 조건과 상관없이 새롭고도 독자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 관계를 사심판의 시간과 공간이다. 침묵이라는 수련방법은 비록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요구하지만 이는 우리의 영혼이 성령이 생명력을 받아 성장하기 위한 것이다. 침묵은 이른바 말을 하지 않음만이 아니다. 내적 침묵 없는 외적 침묵은 의미가 없다. 내적, 외적 침묵의 수련은 우리 안에 살아계신 성령의 이끄심을 우리 영혼이 받아 살아있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성령으로서 다가오신다. 성령을 위한 자리는 침묵에서 시작하여 공동체를 지향한다. 수련방법으로서의 공동체는 성령께서 이끄시는 자리를 사람들 사이에서 창조하려는 노력이다. 공동체라는 수련방법을 통하여 우리는 외로움과 권태로움 속에서 타인에게 집착하려는 자신을 통제하고 해방자이신 성령을 위한 자리를 정화시킨다.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각자의 침묵 안에서 깨닫고 자신의 참된 정체 - 영혼의 모습 - 를 확인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다른 이들 안에서도 같은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발견할 수 있고 영혼의 통공을 이룰 수 있으며 이 영혼들의 통공으로써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다. 본시 모든 영혼은 서로가 모래알 처럼 따로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고립된 단독자가 아니다. 한 영혼은 육신이 지닌 차별적 조건을 넘어서서 다른 영혼으로부터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죄의 힘의 영향을 받거나 은총의 힘의 영향을 받을 때 영혼들의 통공이 이루어진다. 영혼은 통공을 향해 열려 있는 존재인 것이다. 공동체를 이루는 통공으로써만 영혼은 그 생명력을 충만히 받고 생명의 꽂을 피운다. 공동체는 사회가 이루는 모든 문화 중에 가장 고귀한 것이다. 우리는 사회생활에서 영혼의 통공으로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하느님을 닮도록 창조된 존재이다(참조 : 창세 1,27;1 요한 4,7-21).
사회에는 육신의 차별적 조건에서 비롯된 온갖 모순이 생기지만 공동체에서는 전혀 차별이 생기지 않는다. 공동체는 영혼의 통공으로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동체로 사람들은 하느님을 닮은 존재, 곧 인간이 된다. 공동체라는 길을 통하여 인간화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새롭게 창조되는 생명으로서 공동체는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사회의 여러 모순들과 상관없이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이 새로운 관계를 공심판이라고 한다. 모든 공동체는 공심판의 영향력에 하에 있다.
진리를 찾는 구도자에게 공동체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하나의 세례이다. 어떤 형태이든 제자 공동체의 세례를 받지 않고서는 예수의 제자의 길을 갈 수 없다. 예수의 뒤를 따르는 것은 그분의 제자 공동체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제자 공동체는 하느님의 진정한 현존을 우리 각자와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계시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공동체는 서로간 양립 가능성과는 무관하다. 교육적 배경이나 심리적 구조, 또는 사회계층의 유사성이 우리를 함께 연결시킬 수는 있으나 그것이 공동체를 위한 기초일 수는 없다. 공동체는 우리 모두를 이끄시는 성령에 근거하는 것이지 서로의 매력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공동체의 신비는 각기 개인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을 포용하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형제 자매로서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로서 함께 살도록 허락하는 데서 잘 드러난다. 공동체는 육체적인 집합을 의미하지 않는다. 공동체는 각자가 마음 안에 마련한 하느님의 자리의 합과 같다.
그 구성원들의 영혼이 서로 통공을 이룩하는 수준이 공동체의 수준이다.
그러므로 공동체는 영적인 차원의 피조물이며 부활하신 주님께서 새롭게 존재하시는 양식이다. 공동체의 수련은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우리가 원하지 않는 곳이라도 기꺼이 갈 수 있도록 우리를 해방시킨다. 이것이 성령 강림의 체험이다 (참조 : 사도 2,1-4).
침묵이라는 수련방법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영혼에서 하느님의 자리를 발견하고, 공동체라는 수련방법을 통해 함께 사는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자리를 발견한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는 곳은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자리 안에서이다. 기도는 개인과 공동체의 생활 속에 살아계시는 성령의 최초의 활동이다.
우리가 이러한 성령의 기도를 들을 수 있을 때 미사에서 선포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 침묵과 공동체는 미사에서 선포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길이며 또한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이 되어 삶 속에서 새로운 존재양식으로 살아계시는 주님을 관상하는 길이다. 기도의 최고 경지인 관상기도는 바로 침묵과 공동체의 길에서 가장 생동적이며 가장 깊이 그리고 가장 역동적으로 이루어진다.
부활하신 주님은 항상 새로운 존재양식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신다. 예수를 직접 따라다녔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던 이유는 그분께서 새로운 존재양식으로 현존하시기 때문이다. 항상 새로운 주님의 존재양식을 관상하는 길은 침묵과 공동체라는 하느님의 자리 안에서 미사로서 선포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이 말씀으로서 살아가는 길 밖에는 없다.
미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통로이다. 우리는 미사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또 성찬례를 거행한다. 따라서 미사 전체가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말씀이다. 매일 선포되는 복음은 물론이고 항상 새롭게 봉헌되는 제물과 성찬의 신비 또한 하느님의 말씀이다.
매일 선포되는 복음은 물론이고 항상 새롭게 봉헌되는 제물과 성찬의 신비 또한 하느님의 말씀이다. 사제와 함께 미사를 봉헌하는 신자들은 모두가 제관이며 동시에 제물이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으로서의 미사에서 늘 새롭게 축성되어 바야흐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변모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변모된 우리는 이제 세상에 선포되는 내 영혼에 그리고 우리 가운데에 하느님의 자리가 마련됨으로써 우리 자신은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자리로 드러나는 것이다.
매일의 미사, 그리고 침묵과 공동체, 이 세 가지는 삶 속에서 주님을 알아뵙는 길이며 복음을 관상하는 길이고, 그래서 삶 자체가 기도로 변모하는 영성생활의 길이다. 믿는 이들 모두가 이 영성생활에로 초대받고 있다 :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여라. 그러면 다른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걱정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루카 12,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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