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합시다
미사 중에 우리는 많은 기도를 드린다 : 고백의 기도, 본기도, 사도신경, 봉헌기도, 성찬기도, 주님의 기도, 평화의 기도, 그리고 영성체 후 기도 등등, 그뿐인가. 처음부터 마칠 때까지 미사는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끝난다. 입당성가, 파견성가, 그리고 그 사이에 대영광송, 화답송, 감사송, 영성체송 등의 노래가 사실은 신앙내용의 정수를 담아서 주옥같은 내용으로 이루어진 기도의 한 형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사를 봉헌할 때 그저 습관적으로 기도할 것이 아니다. 미사 중의 기도에는 인간의 삶에 촛점을 맞춘 진리의 진수가 고루 들어 있다. 그 표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리고 그 뜻이 얼마나 깊은지 미사의 기도에 맛들인 사람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미사 중 기도의 압권은 성찬기도 중에 나오는 그리스도 찬가이다 :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되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온갖 영예와 영광을 영원히 받으소서" 이런 의미에서 미사는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기도라고 할 수가 있다.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란 우리가 구원되기 위하여 하느님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바치는 모든 청원행위를 말한다. 이렇게 보면 구원되지 못한 처지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구원을 포기하는 엄청난 태도라고 간주할 수도 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도는 종교인으로서 처신하는 데 부수적으로 필요한 장식물로 전락해 버렸다.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는다!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기도를 '비과학적이며 기복적인 현실도피 행위' 정도로 간주하고 아예 기도를 외면하는 풍조가 팽배해 있다. 가톨릭 교회 안의 젊은이들이라고 해서 이러한 사정이 크게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젊은이들은 기도하기가 어렵다. 왜 기도해야 하는지 그 이유도 막연하다. 미사 중에 하는 기도도 그 내용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형식적으로 보여서 여간해서는 마음에 잘 와닿지 않는다. 한 마디로 말해서, 기도의 의미에 앞서 기도의 이유가 문제시되고 있다.
그렇다면 기도를 포기하면 어떤가?
주위를 둘러보면, 기도를 하지 않고도 사람들은 별다른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 사회에서 '내노라' 하는 사람일수록 기도하는 데보다는 더 생산적인 데에 신경을 쓰는 것같이 보인다. 기도보다는 돈이, 건강이, 공부가, 사업이 더 쓸모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들이 애써 건설해 온 현대 물질 문명은 그 많은 학문들과 첨단의 과학기술, 그리고 정교한 사회조직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을 병들게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증세는 점점 더 심해져 가고 있다. 역사상 현대인들만큼 내적으로 병든 세대도 드물 것이다. 고통과 죽음은 물론, 온갖 불안과 고독, 불신과 우울이 사람들을 지배한다. 그런가 하면 사회적으로도 적과는 전쟁을 준비해야 하고 동료와는 경쟁을 벌여야 하는 삭막한 분위기 속에서 진정한 평화는 체험하기 어렵다.
오히려 자유를 억압밥고 기본적 권리마저 침해당하는 비인간적인 경험을 현대인들은 내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곤경에 빠져있는 것이다. [기도하지 않는 사태] 가 초래한 이런 곤경 속에서 무기력과 체념에 빠져있거나 아예 그런 줄도 모르고 눈 앞의 이익에만 어두운, 한 마디로 기도하기를 포기한 사람들에게 이 곤경을 벗어날 희망을 찾기는 어렵다.
그런데 이들과는 달리, 복잡하기만한 현대 학문과 천박하기까지한 문화 그리고 온갖 술수로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현대 물질문명 사회가 제공하는 일상적 경험을 뛰어 넘으려는 탈출을 여러 양상으로 시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현대 물질문명에 도전하는 이 시도들은 각양각색이 지만, 그중 어떤 것들은 매우 진지하다. 그 노력의 진지함에 있어서 이들은 '과연 인간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 하고 묻는 구도자들이라고 부를 수 있다.
내적, 사회적으로 소외된 현실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킬 수 있는 진리의 길을 찾으려는 이들 구도자들의 노력은 필사적이어서, "지금 새로운 양상으로 신앙이 추구되고 있다" 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이러한 구도의 양상들 가운데서 그 진지함에 있어 대표적이고 그 차원에 있어 대조적인 두 개의 길이 있으니, 신비의 길과 혁명의 길이 그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교회의 테두리를 넘어선 현대 정신문명에서 기도로 둘러싼 극단적인 두 형태의 길 - 기도에 전념하는 길과 기도를 거부하는 길 - 을 살펴보게 되는 셈이다.
신비의 길
인도의 요가, 중국의 도가와 함께 한국의 정신사에 있어서 이 신비의 길을 통한 구도의 전통은 매우 오래되었으며, 그 탁월하고 심오한 경지는 세계적으로도 인정받고 있다. 요즘에 와서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단학이 그렇고, 이보다 더욱 명성높은 고려의 신학은 지금까지도 그 명백을 줄기차게 이어 내려오면서 숱한 구도자들을 진리의 길로 이끌고 있다.
그리하여 차츰 우리 사회에서도 이러한 신비체험을 통해 내면의 신비에 다가감으로써 일상의 권태와 고독을 초월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가톨릭 교회의 수도자들 역시 관상생활을 수도생활의 최고 경지로 목표삼으며, 교회는 전통적으로 관상을 통한 지복직관을 신앙생활의 목표로 삼아왔다. 이 신비의 구도자들은 치열한 노력으로 인간 내면의 신비에 관심을 집중하여 [보이지 않는 실재] 곧, 영혼의 현실에 접하고자 한다. 이 영혼의 현실을 체험한 사람은 성이나 체질,성격, 직업, 교양 및 사회적 지위의 차이 같은 표면적인 층을 넘어서서 그 배우에 숨겨진 진리의 실체를 깨닫게 된다.
삶의 중심을 바로 잡아서 내적인 평화를 맛보는 것이다. 여기서는 기존의 질서가 강요하는 온갖 우상과 관념, 그리고 허상이 깨뜨려지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보이며 [인간의 위대한 가능성] 이 쉽사리 공감된다.
이 신비의 길은 그 체험에 접한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켜 회심시킨다.
그래서 이 길의 열매는 회심이다. 회심하여 내적인 자유를 성취한 이들에게 있어서는 기도가 종교적인 장식이 아니라 삶의 호흡이라는 충격적인, 하지만 자연스러운 통찰에 이른다.
혁명의 길
한편, 프랑스 혁명을 비롯하여 미국 독립혁명, 러시아 혁명 그리고 중국 혁명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 그리고 평등이 구현되는 사회를 건설코자 하는 근대사회의 혁명적 노력은 - 그것이 우익이든 좌익이든 - 그 이후의 전세계 사회사상과 사회 운동으로 하여금 혁명 이전으로의 복귀를 허용하지 않는다. 현대는 바야흐로 인간의, 인간화를 위한 [혁명 이후의 시대] 인 것이다.
그런데 아직 혁명 이전의 상태에 머무르고 있는 제3세계 지역에서 60년대 이후 더욱 보편화되고 있는 혁명의 기운은 특히 중남미 지역과 아시아 지역 일부에서 줄곧 모든 양심 세력을 움직이고 있다. 우리 사회도 여기에 예외가 아니다. 최근 부각되고 있는 사회운동권의 움직임에서 확인되듯이,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상황보다는 사회 전반의 상황에 관심을 집중함으로써 지나친 지배욕과 소유욕에 기인하는 억압과 착취의 일상적 경험을 초월하려는 젊은이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가톨릭 교회 안에서도 혁명적인 해방운동과 해방신학이 신앙적으로도 긍정적으로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폭넓게 자리잡고 있는 중이다. 이 경향은 최근 교황청에서 발표된 훈련([그리스도인의 자유와 해방에 관한 훈령])에서도 확인된 바 있으며 교회 내 젊은 이들의 상당수는 해방신학이 지향하는 미래설계에 자못 적지 않은 관심과 희망을 걸고 있는 듯이 보인다.
여기서는 사회가 파국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눈치채고 이를 막기 위한 투신이 감행된다. 불의한 구조의 변혁 자체를 문제삼지 않는 점진적이고 개량적인 개혁은 환영받지 못한다. 이는 상황을 직시하지 못한 채 오히려 상황을 어렵게 만드는 마취제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불의한 질서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키는 길만이 파국을 막을 수 있다고 확신하는 까닭에 질서 순응적이던 사회적 행동양식을 변화시켜 사회를 변혁시키기 위한 의로운 투신이 - 기도하지 않고서도! -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길의 열매는 투신이다. 여기서 목표는 보다 나은 사회가 아니라 새로운 사회이다.
이렇게 대조적인 두 극단의 길이 그토록 진지하게 추구되고 있다. 그리고 이 두 극단은 - 교회 안의 젊은이들에게서도 - 그 진지함의 깊이가 파묻힌 채 오해받고 있다. 하지만 이 두 길은 일상적인 경험을 초월하려는 점에 공통점을 지닌다. 실상 신비체험에 의한 투신은 신비체험의 사회적 투영이다. 신비의 길과 혁명의 길은 개인의 내면과 사회현상의 배후를 동시에 조종하는 현실(어둠의 세력)을 급진적으로 변혁시키려고 하는 같은 노력의 양면인 것이다.
신비가는 그가 철저하고 진실되이 성찰하는 한, 자기성찰을 통해 자기 안에도 병든 사회의 뿌리가 자라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따라서 사회 현상의 배후에 있는 악의 신비도 체험하게 되는 과정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혁명가도 그가 혁명의 대의에 철저하게 투신하고 있는 한, 새로운 사회를 위한 투쟁과정에서 자신의 그릇된 야심이나 조작된 공포감과도 싸워야 함을, 그래서 자기혁명이 수반되어야 함을 외면할 수 없다. 진정한 신비가는 자기성찰을 통해 사회성찰에도 철저하도록 소명을 받고 있으며, 진정한 혁명가 역시 그 마음에서부터 자기 혁명을 이루는 신비가이기를 요청받고 있다. 오늘날 위대한 신비의 스승과 위대한 혁명지도자는 사람들을 그 무기력하고 소외된 처지에서 해방시키려는, 즉 일상적 경험을 초월하려는 공동퇸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공통적으로 일상의 경험을 초월하려는 두 극단의 길이 만나는 지점은 없는가.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되 이웃과 사회의 공경에 무관심하지 않고, 이웃과 사회의 곤경에 투신하되 스스로의 개혁에도 무관심하지 않는, 이른바 제3의 길은 없는가.
제3의 길
오늘날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제3의 길을 찾는 노력은 신비의 구도자들에게나 혁명의 구도자들에게나, 그리고 그 중간 노선의 구도자들에게 모두 해당되는 보편적인 요청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신비의 길도, 혁명의 길도 하나의 극단적으로서 전인적 구원의 요청을 포용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따라서 모든 사람에게 제시되어 타당하다는 인정을 받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을 위한 구원의 진리는 보편적으로 타당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희망적인 실마리가 있으니, 그것은 오늘날 신비가도 혁명가도 예수의 삶에서 자기와의 공통점을 발견하고 나름대로 예수를 신비가, 혹은 혁명가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톨릭 교회의 관상 수도자들과 해방 신학자들은 물론이려니와 불교의 선사의 사회운동가들 - 심지어 일부 진지한 맑스주의자들까지도 예수를 자신의 처지에서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다. 우리가 이것을 보고, '예수도 우리의 편이다' 하는 식의 아전인수격 처신이라고 간단히 단정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의 시선은 진지한 데가 있다.
이에 맟추어 우리 역시 이러한 현상을 값싼 호교론적 동기에서 그 고유 특성들을 평면화시키거나 또는 우리 식으로 정당화시켜서는 안될 것이다. 그보다 오히려 이러한 현상들을 통하여 진지하게 인간의 길을 찾는 구도자들에 의해 예수의 구원자적 면모가 각자의 처지에서 고유하게 그 지평과 깊이가 드러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각자의 처지를 보전하면서도 예수에 의하여 그 깊이와 지평이 더할 수 있다는 희망적인 가능성이 생겨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예수는 신비와 혁명의 면모를 다 지니고 있다. 예수에게 있어서 신비적인 길과 혁명적인 길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지닌 초월적 체험양식의 두 가지 측면이다. 복음서의 증언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예수의 인격과 실천에 있어서 이 두 모습은 도저히 뗄 수 없을 만큼 하나로 통합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가 우리 한가운데 출현함으로써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길과 사회를 변혁시키는 길은 별개의 두 길이 아니라 십자가의 두 축과 같이 서로 의존하여 결합되어 있는 하나의 길임이 밝혀진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십자가는 예수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진리를 담고 있다. 말구유에서의 탄생과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서의 성장, '머리 둘 곳 조차 없이' 돌아다니며 복음을 선포하던 공생애와, 무덤도 없이 십자가에서 최후를 맞이해야 했던 죽음에 이르기까지 예수의 삶은 오로지 낮은 데로만 흐르는 운명이었다. 끝없이 자기를 비우고 죽기까지,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느님께 순명하는 자기비허의 삶이 바로 십자가가 뜻하는 유일한 의미이다(필립2, 6-11).
십자가 안에는 신비적 깊이와 혁명적 넓이가 그 절정에 이르는 자기비허(卑虛: Kenosis)의 삶이 자리잡고 있다. 자기를 버리고, 낮추고, 비워서 하느님께 순명함으로써 부활에 이르는 구원에의 희망이 십자가를 통해서 이룩된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신비의 길과 혁명의 길이 목표하는 바를 포괄적으로 한 파원 높여서 수용하는 부활에의 열쇠이다.
하느님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이 부활의 신비는 회심한 새로은 인간들이 해방된 새로운 사회를 체험하는 신비이다. 곧 '새 하늘 새 땅'(묵시 21,1-4)이며 바로 하느님 나라인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를 통한 부활에의 믿음은 그리스도 신앙이 포기할 수 없는 구원 진리의 생명이다. 이런 의미에서 십자가는 신비의 길을 걷거나 혁명의 길을 걷거나 간에 삶에 의미를 진지하게 추구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의미있는 하느님 나라의 삶을 제시한다.
십자가로 드러난 삶의 지평과 깊이 안에서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모든 노력 - 종교, 사상, 이데올로기, 문화, 정치, 경제 등 - 이 비로소 중심을 발견하고 제자리를 찾는다. 이렇게 보면 예수를 어느 특정 종교의 창설자로 규정하는 교회 안팎의 생각은 바뀌어야 한다. 예수는 사람들 모두에게 하느님 나라의 삶이라는 새로운 삶을 제시하고 이 길에 초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리스도 신앙이 보편적이고 절대적으로 요청된다는 이유가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 신앙이 보편적인 진리라는 요청은 그 자체로 자명한 것이 절대로 아니다. 이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처한 소수적 처지에서 보거나 역사상 교회가 저지른 과오를 보더라도 분명하다. 십자가가 부활의 담보로서 정직하게 증거되지 않는 한, 그리스도 신앙이 제시하는 구원의 진리는 빛을 잃고 만다. 구원의 진리는 합리적인 세속적 지혜와는 달리 역설적이다.
하느님으로부터 계시된 진리는 본능적 감각과 합리적 지혜에 머무는 사람들의 눈에는 걸림돌일 수 밖에 없다. 그러기에 기도하지 않는 문명으로부터 '분노와 조소'(참조 :1코린 1,23)를 받는 걸림돌이 될 각오를 하지 않는 한, 그리스도 신앙은 절대로 그 자체로 보편적이 되지 못한다.
사실은 예수의 십자가 자체가 당시 경건한 종교인들로부터 분노와 조소를 받은 결과로 생겨난 걸림돌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향한 회심과 신앙을 호소하면서 십자가를 기꺼이 수락하는 자기비허의 삶을 통해 진정한 해방의 길, 곧 하느님 나라에로의 길을 연 것이다.
미사는 예수의 십자가로 다가온 새로운 해방의 축제요, 하느님 나라의 잔치이다. 미사의 역사적 배경은 이스라엘 백성의 에집트 탈출에서 유래된 '해방의 축제'이다. 빠스카는 그리스도말인데 삐샤라는 히브리말에서 나왔다. 그래서 빠스카 축제를 과월절, 혹은 유월절이라고도 한다. 과월절은 에집트인들은 파멸시키시면서도 이스라엘인들은 걸르고 '지나가는' 야훼의 행차로서(탈출 12, 13. 12.27),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해단 사건인 에집트 탈출을 기념하는 축제이다. 이 축제를 통하여 이스라엘은, '야훼께서 에집트의 불의한 체제에서 종살이로 고통받는 보잘것 없는 이들을 해방시켜 새로운 백성으로 창조하셨다' 는 신앙을 고백했던 것이다.
바로 이 신앙이 이스라엘 백성의 존립기반이었다. 해방의 문헌으로 간주되는 모세오경을 보면 역사성의 어느 혁명강령보다도 더 혁명적임을 발견한다. 그리스도 신앙은 이 해방의 차원이 간과되거나 소홀히 취급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미사 중에 기도를 기도답게 할 수 없는 이유는, 그리고 미사에서 마땅히 누려야 할 기쁨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미사에 채워지지 않은 채 미사를 봉헌하기에 합당하지 못한 교회적, 개인적 처지에서 미사에 습관적으로 참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사는 이러한 해방적 전통의 연속성 위에 있으면서도 새로운 빠스카 축제로서 이를 능가하는 새로운 해방을 기념한다. 구약적 해방의 불완전함을 넘어서 미사는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마음과 세상의 모든 죄로부터의 해방을 기념하는 것이다.
단지 보이는 억압에서뿐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억압에서 해방되어야 할 우리임을 예수와 함께 다짐하는 것이다. 제도적이고 정치. 경제적인 속박으로부터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이고 사회,문화적인 속박으로부터도 영원히 해방되어 자유로와야 함을 예수를 통하여 희망하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연원하는 신약의 해방은 바로 오순절 혁명으로 일컫는 성령강림이다. 십자가의 자기비허적 희생이 하느님 나라의 열쇠임을 성신께서 내려오시어 깨닫게 해주셨고 이로 인해 새로운 하느님 백성인 교회가 창조되었다. 하느님 나라가 새로운 하느님 백성을 통하여 인류 역사 안에 작은 겨자씨가 되어 들어온 것이다.
이제 어떠한 신비적 구도의 전통도, 또 어떠한 혁명적 해방도 전통도 능가하지 못할, 질적으로 전혀 새로운 하느님 나라의 역사가 역사적으로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오순절의 성령강림으로부터, 그리고 정작 우리에게는 미사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미사로부터!
이러한 의미로 미사는 인간이 걸어가야 할 진리의 길, 즉 하느님 나라에의 길을 교회 공동체 안에서 기념하며 동시에 새로운 출발을 우리에게 촉구한다. 우리는 고독, 무력감, 불신과 같은 내적소외로부터 억압, 착취 같은 사회적 소외, 그리고 고통, 죽음과 같은 생명적 소외에 이르기까지 마음과 세상의 죄로 표현되는 온갖 소외로부터 해방되어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의 자기비허의 삶을 살도록 불리웠다.
우리가 증거해야 할 삶은 하느님께 순명하는 나머지 소외된 세상에서 시달리는 이웃을 위하여 수난을 감수하면서 봉사하고, 내 마음 안에도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악의 뿌리가 닿았있음을 직관하여 끝없이 자기를 비우는 위타적 자기비허의 삶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바치는 기도를 통하여 예수께서 보여준 자기비허(卑虛: Kenosis)가 우리들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촉구해야 한다. 마음의 죄와 세상의 죄에서 해방된 하느님 나라가 먼저 우리 공동체를 통하여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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