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톨릭 관련>/◆ 신 앙 관 련

미사의 공동체적 이해(7) 종합 - 성령강림의 역사를 향하여

by 파스칼바이런 2012. 11. 2.

 

종합 : 성령강림의 역사를 향하여

 

 

 

미사의 큰 리듬인 고유시기와 연중시기의  연결고리는  성령강림이다.

 

성령강림은 과거 예루살렘 공동체가 체험한 역사적 사건일 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 공동체가 지향해야 하는 목표이기도 하다. 교회는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역사 안에서 발생했고 성장해왔을 뿐만 아니라 성령 안에서 완성되리라는 약속을 받고 있다.

 

교회는 역사 안에서 창조된 성령의 피조물인 것이다. 때문에 교회의 자기표현인 미사라는 신앙문화 역시 성령강림의 역사를 향하여 그 목표가 정해져 있다. 그리고 성령강림의 역사에 있어서 자기비허(卑虛: Kenosis)의 원리인 성체의 신비는 외적으로는 가난함으로 드러나고 내적으로는 공동체로 드러난다.

 

성령강림의 역사는 자기비허(卑虛: Kenosis)의 신비를 가난한 공동체를 통하여 성취한다. 이것이 교회가 역사 안에서 자리잡고 있는 자리요, 교회 안에서 새로운 역사가 발생할 수 있는 조건이다. 성령강림을 연결고리로 하여 고유시기와 연중시기가 순환되는 미사의 큰 리듬이 표현하는 내용이 바로 이와 같은 교회의 역사적 위상이다.

 

성령께서는 교회를 가난으로 이끄시며 성령으로 역사 안에 계시되는 하느님은 삼위일체로서 바로 삼위의 공동체이시다. 삼위의 공동체로서 하느님께서는 교회라고 부르는 가난한 공동체를 통하여 자기비허의 은총을 역사 속에 관철시키시는 것이다.

 

이를 통해 가난한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역사적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이로써 세상의 악과 고통을 외면하기보다 이를 수락하심으로써 없애시는 하느님이 하느님으로서 세상에 현존하시게 되고, 진정한 역사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가난은 교회의 외적 조건이다. 오늘날 날로 부유해져 가는 교회의 현실을 앞에 두고, 그리고 산업화된 물질문명의 풍요로움이 날로 더해가는 사회현실의 배경 속에서 가난이 교회의 외적 조건이라 함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처럼 보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가난과는 자꾸만 멀어져 가는 사회의 현실과 안간힘을 써가며 이를 닮아가는 교회의 현실 때문에 더욱 이 가난함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시대적 요청에 적중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정확한 이해는 역시 예수의 삶과 말씀으로부터 나올 수 밖에 없다.

 

예수께서는 나자렛 회당에서 행한 자신의 첫 설교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 이 자신의 사명임을 밝히셨다. 그리고 이 사명은 성령의 이끄심에 따른 것임을 밝히셨다(루카 4,18이하). 실제로 예수는 가난한 이들을 두루 찾아다니셨으며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여러 가지 기적행위와 말씀을 통해 부여하셨다.

 

당시에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 일"(7,22)은 메시아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징표였고 사회의 지도층인 사두가이, 바리사이 및 헤로데 무리에게는 커다란 위협이었다. 결국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 일"은 예수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갔던 것이다.

 

예수와 가난한 이들과의 관계를 고려함 없이 예수님의 복음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헛된 일이다. 무엇보다도 예수님 자신이 가난한 처지였다.  말구유에서의 탄생, 양 대신 산비둘기로 봉헌해야 할 만큼의 가난한 가정살림, 나자렛에서의 가난한 노동자 생활, 그리고 '머리 둘 곳 조차 없이'  '지팡이도 전대로 지참하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가난한 이들에게 전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 자체도 참으로 가난한 죽음이었다.

 

한마디로 예수께서는 가난한 사람이었다. 물질적으로 그야말로 가난했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믿음 외에는 세상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았던 가난한 삶이 예수의 삶이었다. 예수님은 믿음 외에는 가진 것이 없었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가난한 처지를 제자들에게도 요구하였다. '누구든지 내 제자가 되려면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나를 따라야 한다' 는 말씀은 부자 청년이 실망해서 돌아갈 만큼 제자들의 처지에 적중하는 설명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가난한 공동체를 이루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가난한 이들에게 전하였다.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 일' 자체가 메시아의 표징으로서 간주될 만큼 그것은 진정한 기적이었으며 그 결과로 가난한 이들은 복음을 들으러 예수께 다가왔고 예수의 제자들과 청중이 되었다.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들을 때' 교회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교회라고 부를 만큼 가난한 이들의 공동체가 기적처럼 - 가난한 이들이 죄인으로 취급되어 구원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소외되었던 당시의 사회현실을 참작한다면 이는 분명 기적과도 같은 현실이었다  -  발생하고 파급되자 또 다른 의미에서의 가난한 처지가 생기게 되었다. 마음이 가난한 이들의 공동체 안에서 가난한 이들은 더 이상 굶주리지 않아도 되었다.

 

서로 가진 바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초기 예루살렘 공동체에서 일어났던 일이었다. 그들 공동체 안에서는 더 이상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사도 4,34). 바로 이런 처지에 놓은 이들이 '마음이 가난한 이들'(마태 5,3)로 불리었다. 가난함의 성숙이 이루어진 것이겠다.

 

그렇다고 나눔의 결과로 늘어나게 된 공동의 재산 때문에 복음을 듣고 받게 된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저버린다면 공동체는 간단히 파괴되고 이는 '하느님 대신 재물을 섬기는'(마태 7,24)일이 될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새롭게 이해하려는 미사는 바로 이들 '마음이 가난한 이들' 의 식사요 축제였으며 봉헌제사였다. 그리고 미사는 이들 '마음이 가난한 이들' 에게 공동체라고 하는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가져다 준 예수에의 기억이기도 했다. 사회에서 가난하다는 이유로 버림받은 이들이 예수로부터 받아들여지고(죄의 용서가 뜻하는 바가 이것이다) 매일 일용할 양식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빵이 물질 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깨닫게 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 '마음이 가난한 이들' 은 '집집마다 돌아가며 빵을 나누고 하느님을 찬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도 2,46). 이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빵 나눔' 은 오늘날처럼 종교예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삶의 발견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 교회의 창세기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성령강림의 체험으로 고백되는 초대 교회의 현실이었다.

 

그것은 또한 이미 이루어진 '마음이 가난한 이들의 공동체’가 유유상종(類類相從)의 벽을 헐어 버리고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하고 공동체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그야말로 가난한 이들' 에게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당연한 의무감을 초래하는 현실이기도 했다.

 

그 길이 예수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길이었다. 그리하여 '마음이 가난한 이들의 공동체' 속에서 다시 '스스로 가난을 선택한 이들'이 가난한 이들에게로 공동체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파견되었는데, 이들을 사도요 선교사로 불렀으며 이들의 복음선포 직무를 사도직이라고 불렀다.

 

이리하여 가난함이 더욱 성숙되고 가난함의 교회적 순환이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이미 우리가 알고 있듯이 놀라운 교회확장을 가져오게 되었다.

 

가난한 처지 자체가 사회생활 속에서는 십자가이려니와 가난한 이들의 공동체 건설이라는 초대 교회의 선교활동은 유대인들의 율법적인 전통과 로마인들의 무신적인 문화에 부딪쳐 300년에 이르는 끔찍한 박해 속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는 마치 한국 교회가 초기 100여년 동안 로마의 박해를 능가하는 조직적인 탄압 속에서도 전국 산간 벽지까지 곳곳에 순교도 불사할 만큼 복음적 활력이 넘치는 교우촌을 건설한 역사와도 비견될 수 있다.  교우촌은 복음의 씨앗이 한국이라는 토양에서 열매맺은 공동체였던 것이다.

 

그런데 초대 교회나 한국 교회가 박해 이후에 신앙의 자유를 보장받고 양적으로 팽창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적 활력을 상실해 가고 있는 현실은 바로 박해 속에서도 위력을 발휘하는 가난함의 순환구조를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야말로 가난한 이들' 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 공동체를 이루어 '마음이 가난한 이들' 로 성숙하고 다시 '스스로 가난한 이들' 이 되어 '그야말로 가난한 이들' 에게로 다가가는 이 가난함의 순화과정은 2천년전에나 산업화된 오늘날에 있어서나 변할 수 없는 교회의 외적 조건이다.

 

'가난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섬기려고 하는 한,  그리고 역사상의 어느 교회에도 기준이 되는 초대 교회를 이끄셨던 성령의 강림을 기다리는 한, 교회는 가난한 백성일 수 밖에 없다. 가난함은 사회적 현실을 의미해야 할 뿐만 아니라 신앙적 현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수의 처지대로 하느님 앞에 교회는 가난할 수 밖에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하느님께 대한 신앙 이외에 다른 자기 목적이나 조건을 가진다면 그것은 그만큼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수준을 낮추는 것에 다름아니다.

 

가난함의 순환구조에 어김없이 육화하는 신앙의 충실성이야말로 성체의 신비가 뜻하는 자기비허(卑虛: Kenosis)의 길을 교회가 걷고 세상에도 그 빛을 비추어 줄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이다.

 

오늘날의 미사가 개개인의 삶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사회현실에 희망의 빛이 되지 못하고 있다면, 그리하여 교회의 자기 표현력이 약화되어 있다면, 그 원인은 일차적으로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물질적인 풍요로움에 가려 갈수록 그 생명력이 쇠퇴하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 사회와 교회에 있어서 하느님이 가난한 사람이 되셨다는 육화의 신비를 교회의 본질, 교회의 구성과 활동방향, 그리고 활동의 우선순위에 있어서 근본적인 심판 기준이다. 이 기준이 기준으로서 살아있을 때 우리는 성령께서 살아 움직이시는 미사를 교회에서 사회를 향하여 봉헌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성령과 그의 이끄심을 받는 교회가 가난함과 맺고 있는 의미를 밝혀 보았거니와 이제는 가난함이라는 외적 조건을 채우는 공동체에 대해 살펴 볼 차례이다.

 

하느님은 공동체이시다. 왜냐하면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가 일체, 즉 공동체를 이루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삼위의 공동체이시다.

 

성령은 삼위의 공동체를 교회를 통하여 역사 안에 이루시는 역사의 원리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삼의 공동체를 닮아야 한다. 오늘날 교회가 공동체여야 한다면 그 근거는 바로 이 삼위일체의 신비에 있는 것이다. 성삼의 공동체의 중심은 사랑이다.

 

그래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자기비허(卑虛: Kenosis)의 사랑으로 성부께서 성자에게 당신의 본질을 아낌없이 주셔서 성자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 되셨다. 성자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으며 자기비허의 은총을 성령을 통해 이들에게 전달하셨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성자를 통하여 복음을 듣고 교회를 이룬 가난한 이들의 공동체를 통하여 자기비허의 은총으로써 역사를 이끄신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신비는 삼위일체의 신비요, 은총의 신비이다. 이것이 교회의 내적 조건이다.

 

 

미사의 삼박자는 공동체의 3단계 순환과정을 표현한다 : 하느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피조물. 이는 그대로 가난함의 순화구조에 상응한다. 즉, '그야말로 가난한 이들' 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 하느님의 백성으로 모여 온다. 하느님의 백성은 복음을 듣고 '마음이 가난한 이들' 이 되어 성숙한 가난함으로 자신을 봉헌하여 그리스도의 몸으로 축성된다.

 

여기서 공동체의 봉헌은 그 자체가 고난의 세례이며 십자가의 길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축성된 '마음이 가난한 이들의 공동체'는 나눔과 섬김의 자유와 축복을 누리면서 이제 다시 '그야말로 가난한 이들'에게로 육화하기 위하여 '스스로 가난한 이들' 이 되어서 세상에 파견된다.  이들을 파견하시는 이는 단연코 성령이다.

 

성령의 이끄심에 따르지 않는한, 어떻나 이데올로기(Ideologie)나 선교전략으로도 '마음이 가난한 이들' 이 '스스로 가난함' 을 선택하여 '그야말로 가난한 이들' 에게로 투신하는 은총은 주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하여  [하느님 백성('그야말로 가난한 이들') - 그리스도의 몸('마음이 가난한 이들의 공동체') - 성령의 피조물('스스로 가난한 이들')]의 순서로 가난한 공동체의 순환적 성숙과정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예수의 제자 공동체가 생겨난 과정이요, 교회가 창조된 원리였다. 이를테면 구원의 계시는 공동체적 계시로 드러난 셈이다. 이 공동체적 계시에 따라서 우리의 역사는 자유와 해방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서 이 공동체적 계시는 우리의 역사를 성자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 되시는 방향으로 이끌고 성부께 봉헌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교명령을 전하는 마태오 복음서의 결론이 지니는 의미이다 :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

 

공동체적 계시에 따르면 '세상 사람들을 예수의 제자로 삼는다는 것'은 제자 공동체를 세상 곳곳에 건설한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이들에게 삼위일체의 세례,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푼다'는 것은 그 공동체가 성삼의 공동체를 닮을 수 있도록 공동체의 순환과정을 거쳐 성숙할 수 있도록 봉사한다는 뜻이며, 이 의미에서 '예수께서 명하신 바를 지키도록 가르친다' 는 의미도 포함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명하신 바' 란 다름아니라 산상설교이며 이는 공동체의 헌장이기 때문이다. 또한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 다' 는 말씀의 의미는 역사 안에서 이 가난한 공동체를 닮은 사회로 변화되도록 이끄시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가난한 공동체의 역사적 위력에 대해 말할 수 있겠다. 가난한 공동체는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는 역사의 장이다. 역사를 '새 하늘과 새 땅' 으로 변화시키시는 힘이 가난한 공동체를 통하여 발휘된다.

 

최후 심판의 말씀은 이에 대한 뚜렷한 증거이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가난한 공동체와 그리스도가 동일시되는 엄청난 선언이 여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가난한 공동체가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은총이다. 이 은총은 하느님 나라의 은총이며 십자가의 은총이며 따라서 자기비허(卑虛: Kenosis)의 은총이다. 이 자기비허의 은총이 가난한 공동체를 통해 역사의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가난한, 자기비허의 공동체를 통해 하느님께서 역사의 주님으로서 역사를 이끄시는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원의 역사는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온갖 악과 이로 인한 고통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신앙의 진리가, 산업화된 문명사회의 진행 속에서 사실상 외면당하고 있다면, 그것은 구원의 역사가 세상의 악과 이로 인한 고통에 무관하게 이루어지리라는 가정 하에 이루어지는 교회실천 때문일 것이다.

 

하느님은 세상의 악이나 고통을 초월해서 초연하게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오히려 세상의 악과 고통을 외면당하기보다 이를 받아들여 몸소 고통을 당하심으로써 악과 고통을 없애시는 분이다. 이분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이시다.  그리하여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어린 양' 이시다.

 

현대 사회에 있어서 악과 고통에 대한 가장 뚜렷한 시대적 징표는 인간에 대한 물질의 우위 현상이다. 우리는 물질만능 풍조가 만연된 유물론 시대에 살고 있다. 극심한 빈부격차 사태는 그 당연한 결과이다. 이 속에서 가진 자나 가난한 이들 모두가 고통을 받고 있다.  이제껏 나타난 어느 시대보다도 풍요로운 시대에 살면서 인간은 바로 그 물질로 인해 부자유와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난한 이들의 고통은 현대 세계의 고통을 대표한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에 대한 물질 우위 현상과 빈부격차 사태의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시대적 징표로서 극심한 가난을 주저 없이 들 수 있다.  이는 다음 세대에 가서도 개선될 조짐이 현재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욱 심각하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이 가난함에의 육화를 통하여 고통받는 역사를 당신의 나라로 이끄시는 것이다. 하느님의 육화, 곧 인간화는 공동체를 발생시킨다. 하느님 자신이 공동체이시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여 우리는 가난한 공동체의 역사적 위력에 희망을 둘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요약하도록 하자.

 

교회가 자기를 표현하는 미사로부터 교회는 성령강림의 역사를 향하여 역사 속에 자리잡고 있음을 드러낸다. 여기서 그 외적 조건으로서 가난함이, 또 내적 조건으로서 공동체성이 규정된다. 이 규정이 어떻게 성령으로부터 나오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성령에 따르는 교회가 왜 가난해야 하는가? 그리고 성령에 따르는 교회가 왜 공동체여야 하는가?

 

교회가 왜 가난해야 하는가?

 

성령께서 예수를, 그리고 그 제자들의 교회를 가난함에로 이끄시는 이유는 가난함이 그 자체로 거룩해서가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가난함은 세상의 악이 낳은 결과이며 고통의 원인이다. 거룩하기보다는 불편하고 비인간적이며 가난한 이를 절망으로 이끄는 속된 것이다. 바로 가난함의 이 속된 성격 때문에 성령께서 가난함에로 향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거룩함의 영이며 거룩함이란 속된 것 안에로 내재하여 완전히 성화시키는 힘이요 또한 그 과정이기 때문이다. 실상 세상의 어느 피조물도 그 자체로 거룩한 것은 하나도 없다. 성령에 의하지 않은 한 거룩해 질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현 시대의 악이 가장 광범위하고 뚜렷하게 드러나고, 엄청난 수의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는 가난의 현상이야말로 가장 속된 것이며 따라서 성령께서 우선적으로 선택하시는 거룩함의 대상인 것이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사람이 되시어 가난한 이들 사이에, 그리하여 세상의 악의 한가운데에 육화하셨다. 이러한 가난함에의 깊은 성찰이 없이는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서 자기를 비우고 성령으로 채워지는 자기비허의 은총은 받을 수 없다. 이것이 육화의 신비와 은총의 신비에 바탕하여 교회가 가난해야 하는 근거이다.

 

교회가 왜 공동체여야 하는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삼위로서 일체를 이루시는 공동체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공동체라는 계시는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삶의 조건도 공동체임을 알려주는 것이며 따라서  교회야말로 성삼위의 공동체를 닮은 공동체여야 함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난함에서 출발한 교회는 공동체화의 방향으로 역사를 주도하여 마침내 사회가 공동체이신 하느님을 닮도록 빛이 되고 밀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실상 공동체는 어떤 속된 것이 질적으로 완전히 변화된 상태의 것, 즉 거룩해 진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좋은 뜻으로 모여 있다고 해서 그저 공동체는 아닌 것이다.

 

사회적인 악의 결과로 가난하게 된 사람들은 그악에 짓눌린 나머지 악이 내면으로 전염되어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경제적인 결핍만이 가난한 이들의 고통이 아니다. 오히려 소외감,탐욕, 증오, 불신, 이기심 등의 내면화된 악이 주는 고통에 더욱 시달리고 있다.

 

성령께서는 이 가난한 이들을 선택하시어 가난을 초래한 사회악(지나친 소유욕과 빈부격차의 구조)을 받아들이시고 외적인 고통(경제적 결핍)뿐만 아니라 내적인 고통(심리적 소외감)까지도 완전히 성화시키시어 공동체로 만드신다.

 

그러므로 교회가 이들 가난한 이들을 선택하기 전에도 이들은, 이들을 가난하게 만든 악의 편에 서 있거나 간접적으로 편드는 사람들 보다는 상대적으로 휠씬 더 공동체적이며 인간적이다. 바로 성령께서 그들 안에서 활동하시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역사를 이끄시는 방법이 바로 가난한 이들을 공동체화시키는 방법인 까닭에 우리는 가난한 공동체의 역사적 위력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이 이끄시는 이 역사적 힘은 그리스도께로 개방된 '마음이 가나한 이들의 공동체' 들의 사회가 되도록 역사를 변화성숙시켜서 마침내 하느님 아버지의 나라에로 역사를 이끄는 구원의 힘이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신비에 바탕하여 교회가 가난한 공동체여야 하는 근거이다.

 

교회는 예로부터 그리스도 신앙의 진리를 육화의 신비, 은총의 신비, 삼위일체의 신비로 가르쳐왔다. 이 세 신비가 성체의 신비로 성사화되어 눈에 보이게 미사에서 표현되고 믿는 이들에게 체험된다. 그리고 이 성체의 신비에서 교회의 신비가 파생된다.

 

그리고 교회의 신비는 가난함과 공동체로 조건지워져 있고 따라서 가난한 공동체로서 역사 안에 구현된다. 그러므로 가난한  공동체는 엄청난 물질 지배의 산업화 시대에 현대 교회가 직면한 사회학적 사목적 과제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신앙의 진리에 입각한 계시의 해석이요, 따라서 교회의 존재 이유에 해당하는 것이다.  

 

교회의 자기표현인 미사는 결국 가난한 공동체로 정향되어 있다. 가난한 공동체의 자기표현이 미사여야 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이 되신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사람이 되신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공동체 안에서 현존하시면서 자기비허의 은총을 전달하시며 이 은총이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지금의 교회와 사회를 변화시켜 공동체이신 하느님을 닮도록 역사를 새롭게 창조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강림의 역사를 향해 순례하는 교회의 자기 표현인 미사를 가난한 공동체의 문화로 새롭게 이해한다. 그리고 이 새로운 이해에 따라서 우리의 교회의 삶이 성체의 힘으로 새롭게 이루어지기를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바치는 믿음으로 희망하는 것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