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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신 앙 관 련

미사의 공동체적 이해(5) - 미사의 큰 리듬 : 고유시기

by 파스칼바이런 2012. 10. 30.

 

미사의 큰 리듬 : 고유시기

 

 

 

교회의 자기 표현으로서 미사는 공동체를 위한 구조를 미시적으로는 모임과 대화 - 봉헌과 축성 - 나눔과 파견이라는 삼박자에서 표현하는 한편, 거시적으로는 대림 - 성탄, 사순 - 부활, 그리고 연중 - 고유 시기의 큰 리듬으로 표현한다.

 

미시적 표현인 삼박자와 거시적 표현인 큰 리듬은 그 핵심을 공유함으로써 내적인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미사의 작은 리듬으로 이루어지는 삼박자의 핵심이 큰 리듬에서는 3단계로 증폭된다.

 

그 핵심이요 기본 음이 되는 것은 둘째 박자에서 표현되는 성체의 신비이다. 이 성체의 신비는 공동체의 거룩한 변화를 요청하는 바, 제1단계는 대림 - 성탄의 리듬이요, 제2단계는 사순 - 고유(시기)의 리듬이다.

 

이미 앞에서 각도를 달리하여 살펴본 바와 같이 공동체 실천의 관심에서 바라본다면 십자가의 자기비허(卑虛: Kenosis)를 통한 하느님 나라를 사는 공동체의 신비이다.

 

이 공동체의 신비는 대림과 성탄의 제1단계로 준비되며 사순과 부활의 제2단계로 본모습을 드러내고 연중(시기)와 고유(시기)의 제3단계로 순환과정을 밟는다. 제1단계는 제2단계의 축소판이며 제3단계를 제2단계의 확대판인 바 제2단계는 공동체의 신비가 절정에 달하는 기본 리듬이다.

 

이는 그리스도 신앙이 어디까지나 부활신앙이 바탕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며 역사상 실제로도 성탄신앙은 부활신앙의 성찰이 깊어지면서 2차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시기별로 변화되는 미사의 큰 리듬은 미사에서 감사송의 변화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시기별로 달라지는 감사송을 통해 교회는 단계별로 자음식을 드러낸다.

 

따라서 감사송의 공통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하는 것이므로 변하지 않으나 본문을 시기별로 세밀하게 분류되어 있다.

 

제1단계에 속하는 감사송으로서는 대림 감사송 (1),(2)와 성탄 감사송 (1),(2),(3) 및 공현 감사송이 있다. 제2단계에 속하는 감사송으로는 사순절 감사송 (1),(2),(3),(4)와 성주간 동안에 읽는 수난 감사송 (1),(2), 그리고 부활 감사송 (1),(2),(3),(4),(5)및 승천 감사송 (1),(2)가 있다. 제3단계에 속하는 감사송은 더욱 세밀하게 분류되어 있는데 우선 연중 주일 감사송 (1),(2),(3),(4),(5),(6),(7),(8)이 있고 평일 감사송 (1),(2),(3),(4),(5),(6),(7),(8)이 있고 평일 감사송 (1),(2),(3),(4), (5),(6)이 있으며 특별 감사송으로서 성체 감사송 (1),(2), 성모 감사송 (1),(2), 천사 감사송, 성 요셉 감사송, 사도 감사송 (1), (2), 성인 감사송 (1), (2), 순교자 감사송, 사목자  감사송, 동정녀와 수도자 감사송과 위령 미사 감사송(1), (2), (3),(4),(5)가 있다.

 

이처럼 많은 감사송이 시기별로 정교하게 분류되어 있다는 사실은 교회가 십자가의 자기비허(卑虛: Kenosis)에 이르는 각 단계별 자의식을 얼마나 민감하게 의식하고 있는가를 알려준다. 이와 함께 교회의 자의식이 미사의 다른 작은 리듬들 보다도 유독 감사송에서만 그토록 정교하게 표현된다는 사실 또한 의미심장한 것이다.

 

감사송은 교회의 자기봉헌이 도달한 결론이요 하느님의 축성을 기다리는 서론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 사실은 공동체가 교회적일 수 있는 조건을 규정하는 동시에 비교회적인 일반 공동체와 구별짓는 특성도 매우 단순하게 시사한다.

 

즉 교회적 공동체는 감사하는 공동체라는 것이다. 피조물로 구성된 공동체가 창조주께 감사드릴 수 있는 자유야말로 비교회적인 세상의 공동체들이 집착하는 소극적인 자유를 넘어서는 적극적인 자유요 인간 최고의 능력임을 말한다 : "거룩하신 아버지, 사랑하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감사송 공통 부분).

 

교회 공동체에서 감사송을 통해 표현하는 감사의 자유는 사람들을 소외 시키고 우상숭배와 사람들을 구원하는 하느님 섬김의 차이를 구별하는 결정적인 기준이다. 이토록 중요한 의미가 흔히 사제의 독백으로 묻히고 마는 우리네 습관적인 미사참석 풍토에서 다음의 감사송 본문을 음미할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 "....아버지께는 저희의 찬미가 필요하지 않으나 저희가 감사를 드림은 아버지의 은사이옵니다. 저희 찬미가 아버지께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으나 저희에게는 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도움이 되나이다."(평일 감사송(4) 본문).

 

 

그리하여 교회 공동체가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내용이 시기별로,  단계적으로 교회의 자의식으로서 다양하게 표현된다. 대림시기와 성탄시기에는 교회의 자의식이 제1단계로 표현된다. 대림의 공동체는 기다림의 공동체이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대림은 공동체 실천의 시각에서 보면 교회적 공동체가 형성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성체의 신비를 중심으로 침묵과 공동체의 수련을 통하여 영적으로나 관계적으로 그리스도의 공간을 마련함으로써 길을 닦는 것이다 :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들린다.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마태 3,3;이사40,3).

 

이러한 수도의 과정을 위한 메시지는 세례자 요한에 의해 외쳐진 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마태 3,2)는 선포이다. 성탄의 공동체는 수도와 회개의 과정에서 영적인 어두움이 걷히고 공동체다운 실재가 작은 빛으로서 영적으로나 사회관계적으로 마련된 그리스도의 공간에 자리잡기 시작하는 공동체이다.

 

성탄의 공동체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대림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성탄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루신다는 점이다. 우리는 희망을 갖고 믿음으로 기다릴 수 있을 뿐이다. 그 희망의 근거는 "단 두 세 사람이라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시다"(18,20)는 데 있다. 그 분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 곧 임마누엘이시다"(1,23).

 

관건은 길의 길다움에 있다. 그분은 오히려 우리가  준비되기까지 이미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 분은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11,3)이시다. 둘째로 대림의 공동체에 성탄이 이루어진 징표는 공현이라는 점이다. 공현은 비공동체적인 현실과 비교회적 공동체들로부터 "반대받은 표적"이 될 만큼 이들과는 뚜렷이 대조되는 정체성을 지니지 못하는 한, 공현은 아닌 것이며 따라서 성탄도 그만큼 유보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공현은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고 성탄의 공동체로 하여금 끊임없는 새로운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의 공동체로 준비시킨다. 끊임없는 새로운 성탄의 대림이야말로 공동체적 삶의 본질에 속한다.

 

"반대받는 표적" 으로서의 교회 공동체의 자의식은 사순시기와 부활시기에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제 2단계는 성지주일(주님 수난 성지 주일)로부터 부활성야에 이르는 성주간에 압축되어 있고 이를 중심으로 사순시기 40일, 부활시기 50일을 지내면서 교회는 가장 교회다운 자의식을 표현한다. 대림의 본질은 십자가 수난이다.

 

성체의 신비를 중심으로 침묵과 공동체의 수련을 통해 이루어지는 자기비허(卑虛: Kenosis)의 길은 가난한 이들 가운데에서 공동체를 실천하는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이다. 수난의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함으로써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자신을 비우고 낯추어서(自己卑虛: Kenosis)" (필립 2,6-8) 비로소 공동체다운 공동체로 성숙하는 것이다(이 점에서 '사순시기'는 40일을 뜻할 뿐 부정확한 용어이다. 의미상 '수난시기' 로 해야 '부활시기'와 상응한다).

 

성탄의 본질도 부활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부활의 공동체는 수난의 공동체의 참 모습이다. 역사상으로도, 전례력상으로도 부활은 수난 다음의 사건이요 따라서 수난시기에 이어서 부활시기가 오지만 공동체 실천의 시각에서 보면 수난은 부활의 현상이요, 부활은 수난의 본질이다. 공동체가 자기비허의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의 부활의 은총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수난과 부활은 원인과 결과가 아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하다"(1코린 1,25). 사람의 눈에는 수난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것이 부활인 것이다. 그래서 부활시기의 50일(오순절)동안 교회는 요한복음을 읽는다. 부활기사만을 읽는 것이 아니라 거의 전부를 읽는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은 수난이 곧 부활이라는 신학사상이 전체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요한 복음을 알아듣기는 어렵다. 심지어 요한복음에서는 이 점에 입각하여 최후의 만찬 기도에서 수난을 앞두고서도 예수께서는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의 영광을 드러내 주시어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여 주십시오"(요한 17,1)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수난이 곧 부활의 영광이라는 교회의 자의식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길을 걷고자 하는 한 피할 수 없는 길이요, 교회가 가장 교회다움을 나타내는 진리이다. 여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성체의 신비가 밝혀진다. 수난 - 부활의 공동체가 성체의 신비를 밝혀낸 체험을 교회는 승천으로 이해한다.

 

승천은 대림 - 성탄의 공동체에 있어서도 유력한 징표가 된다. 공동체가 자기를 완전히 비우고 낮추어서 "이제는 공동체 안에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사시는"(갈라 2,20)경지에 이르른 처지를 교회는 승천으로 이해하는 바 이는 수난과 부활의 비일회적인 완성으로서 교회의 최고 목표이다:"....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뒤에 모든 제자에게 나타나셨으며 저희도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도록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셨나이다"(승천 감사송(2)본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