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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신 앙 관 련

미사의 공동체적 이해(3) -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공동체

by 파스칼바이런 2012. 10. 30.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공동체

 

 

 

성찬의 전례에서 표현되는 미사의 둘째 박자는 하느님 백성의 봉헌과 그리스도의 몸으로의 축성으로 이루어진다. 봉헌은 공동체가 하는 것이다. 축성은 하느님께서 성령의 힘으로 하시는 것이다. 봉헌과 축성은 미사의 삼박자 중에서도 중심적인 요소로서 교회적 공동체의 본질을 표현한다. 하느님 백성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거룩한 변화(참조 : 마르 9,2-8)를 이루는 과정이 이 둘째 박자에서 성체성사로서 표현되고 있다.

 

성체의 신비는 봉헌과 축성의 역동적 과정으로서 삶의 심층을 관통하는 긴장이 응축되어 있다. 이는 십자가와 부활에 담긴 구원의 신비와 정확하게 상응한다.

 

봉헌과 축성 사이의 긴장이란 부활을 믿고 십자가를 질 뿐이지 부활에 대한 타산적 처신으로서 십자가를 질 수는 없고 거꾸로 십자가에 대한 대가로 부활을 소유하는 것도 아닌 데서 오는, 넘을 수 없는 간격을 말한다. 이는 피조물과 창조주와의 어쩔 수 없는 간격이기도 하다.

 

하느님은 하느님이시고 사람은 사람이다. 하느님을 섬기고 사람을 사랑하려고 하는 한, 이 간격에서 오는 긴장을 우리는 피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도이 긴장을 뼈아프게 겪어야 했다.

 

바로 십자가 위에서 (마르 15,34). 하느님께 대한 순명으로 짊어진 십자가 위에서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절망감은 절규로 나타날 수 밖에 없었다 :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 긴장을 무섭도록 겪었다.

 

바로 빈 무덤 앞에서 (마르 16,1-8; 요한 20,1-10). 예수는 하느님께 대한 신뢰로써(루카 23,46)이 깊고 어두운 절망 속에서 하느님께로 부활되었다 :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제자들도 성령을 받자(사도 2,1-4)두려움을 떨치고 이 부활을 체험 할 수 있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힘으로는 넘을 수 없는 이 간격을 믿음으로 이어 주셨다.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 의지하여 하느님의 백성은 자기를 봉헌하여 그리스도의 몸으로 축성되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만이 봉헌과 축성의 간격을 뛰어 넘을 수 있고, 삶의 근원적인 긴장을 해소시킬 수 있다. 엄연히 존재하는 이 간격과 이 간격에서 오는 긴장을 믿음으로 대처하지 않고 오히려 피하거나 아예 없는 듯이 외면하려든다면, 삶의 질서는 굴절되고 정신병리현상을 초래하게 된다.

 

봉헌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자유요 능력이다. 축성은 봉헌의 당연한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이 사랑과 자비로 베푸시는 은총이다. 봉헌의 주체와 축성의 주체는 다르다. 다만 그리스도와 그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관계가 희망적으로 변화되었을 따름이다.

 

하느님의 백성은 미사에서 그 대표자인 사제를 통하여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고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축성함으로써 이 희망을 표현한다. 정작 봉헌하는 주체는 하느님의 백성이요, 봉헌물 역시 하느님 백성 자신이다.

 

하느님 백성의 자기 봉헌으로써 하느님께서 이 백성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축성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의 삶을 통해 계시된 구원의 길이다.

 

우리가 공동체에서 살아야 할 진리란, 하느님 백성으로 모여 십자가를 짊어지는 삶으로써 스스로를 하느님게 봉헌하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축성되어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다.

 

복음을 들은 가난한 이들로 이루어지는 하느님 백성이 말씀의 성사화 과정에 따라 성숙할 때 스스로를 봉헌할 수 있는 능력을 받는다. 이들은 죄를 반대하고 하느님 나라를 선택한 공동체요, 하나이요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의 자기봉헌으로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공동체는 축성되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공동체로 거룩하게 변화하는 것이다. 이 거룩한 변화로 말미암아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차원으로부터 신앙적인 차원으로 초월하는 공동체 형성의 제2단계가 가능해진다.

 

가난한 공동체로서의 처지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더욱 풍요로워지면서 재화의 결핍으로서의 더 이상 문제시되지 않고 재물 대신 하느님을 섬기는 '복된 가난'(마태 5,3)을 누리는 것이다. '그야말로 가난한 이들' 이 '마음이 가난한 이들'로 변화된다.

 

재물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 섬김이 기준이 되어 재물을 하느님 뜻대로 사용하고 관리하는 처지로 변화되는 것이다. 공동체와,  재물을 비롯한 다른 피조물과의 관계 자체가 창조주 하느님께 대한 찬미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로써 구원은 공동체에서 현실화된다.

 

봉헌과 축성으로 인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하느님 백성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하느님의 말씀 그 자체로 변화된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말씀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세상에게 하신 마지막이요 궁극적이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느님 백성이 변화될 때 공동체도 하느님 말씀이 된다. 우리 시대에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축성된 공동체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신다.

 

하느님의 말씀과 공동체는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실상 말씀을 증언하는 복음서들은 바로 이러한 공동체 실천 속에서 생성되었다. 공관 복음서(마르코, 마태오, 루카 복음서)들은 미사의 삼박자에서 표현되는 교회 공동의 3단계(하느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몸, 성령이 피조물로서의 공동체)와 상응한다. 신앙문화로서의 미사가 형성되던 초대 교회에서는 신약성서의 복음서들은 신자 교육에 단계적으로 활용하였다.

 

마르코의 공동체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모인 하느님의 백성이다. 복음을 들은 이 가난한 이들은 예수의 하느님을 십자가와 부활에서 배운다.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로 집중되어 있는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의 제자들은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체험하기까지는 예수의 가르침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마태오의 공동체는 하느님게 봉헌하여 축성된 그리스도의 몸이다.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를 깨닫고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가난한 백성들은 스스로 이 신비를 공동체 안에서 체험하고자 공동체적 십자가의 길을 걸어감으로써 자신들의 삶을 하느님께 봉헌한다.

 

가난한 하느님 백성이 어떻게 하느님 나라를 살 것인가 하는 데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는 마태오 복음서에서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를 주님으로 믿고" 공동체로 모여 있는 "보잘 것 없는 이들"(마태 18,6. 10;25,40)이요 "마음이 가난한 이들"(5,3)이다. 마태오의 하느님은 이 가난한 이들과 함께 계시는 분, 임마누엘이다(1,23;18, 20;28,20).

 

 

루카의 공동체는 성령의 힘으로 창조되어 세상에 파견되는 성령의 피조물이다. 가난한 처지에서 공동체를 형성하고 복음을 실천함으로써 자신들의 삶을 봉헌하여 그리스도의 몸으로 축성된 이 가난한 이들은 그리스도께 주님이요 자신들의 공동체의 머리라는 자의식을 나눔과 파견의 삶으로써 드러낸다.

 

자비의 실천과 정의의 구현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는 루카 복음서에서는 이질적인 전통과 문화를 지닌 사회 속에서 새로이 하느님 백성을 모으시는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예수의 제자들이 공동체를 창설하러 파견되는 선교사요, 새로운 전통과 문화를 신앙의 빛으로 조명하는 신학자들로 묘사된다.

 

이 선교적이고 신학적인 특성은 루카 복음서에 이은 루카 제2증언인 사도행전에서 더욱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베드로와 바오로로 대표되는 예수의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창설하는 사도요 선교사이며 신학적 지성을 구가하는 설교가로 나타나고, 이들의 능력은 오순절날 강림하신 성령으로부터 받은 은사로 고백된다.

 

갓 태어난 교회 공동체는 내부의 압력과 외부의 박해로 흩어지지만 성령께서 이런 공동체를 사도들을 시켜 기묘한 방법으로 위기에서 구원하시고 도처로 파견하여 오히려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신다. 이 발판 위에서 도저히 상상하지 못한 양상으로 새로운 하느님 백성이 모여드는 것이다.

 

성령의 피조물로서 살아가는 공동체들을 통해 하느님께서 모으신 새로운 하느님 백성은 요한의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는 하느님 백성으로서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를 체험하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의 신비를 체험했는가 하면, 성령의 피조물로서는 역사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신비를 두루 체험한 성숙한 공동체이므로 이 모든 신비를, 예수를 통한 하느님 나라의 신비로서 관조하는 경지에 이르러 있다.

 

그래서 요한 복음서는 공생활 초기부터 이미 부활의 영광과 수난의 고통을 한데 어울러서 예수의 삶에 투영한다. 생명, 빛, 빵, 샘물, 밀알, 포도나무 가지 등 고도의 상징어들이 등장하며, 특히 서시(1,1-18)는 예수를 [하느님의 말씀] 으로서 관상하는 말씀의 찬가로서 요한 복음서의 압권이다.

 

이렇듯 4복음서는 전체적 조화를 이룬 단계적 구조로 되어 있으며 이는 바로 미사에서 표현되는 교회 공동체의 성숙단계와 무관하지 않다.

 

그리하여 1년을 단위로 한 교회의 전례력에서도 평일 미사에서 선포되는 복음은 대체로 이 순서에 따라 짜여져 있다. 연중 시기에는 마르코 - 마태오 - 루카 복음서의 순서의 복음을 읽고, 부활 시기에는 요한 복음서를 읽는다.

 

대림과 성탄 및 공현 시기에는 마태오와 루카 복음서를 읽으며 사순 시기에는 4복음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만을 발췌하여 읽는다. 교회 공동체의 성숙 과정이 역사적으로 복음서에서 마르코 - 마태오- 루카 - 요한 공동체로 나타났고, 그리고 문화적으로는 미사에서 하느님 백성  - 그리스도의 몸 - 성령의 피조물- 새로운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미사가 교회의 자기표현임을 확인시켜 준다.

 

하느님의 백성이 봉헌하여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축성된 교회 공동체 실상은 마태오 복음서에 증언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다섯 설교가 있다 : 산상설교(5-7장), 파견설교(10장), 비유설교(13장), 공동체설교(18장) 및 종말설교(24-25장).

 

이들 다섯 설교는 각각 하느님 나라의 헌장과 확장, 그 신비와 공동체의 규범 및 기준을 말해 준다.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사는 공동체로서 부활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이 다섯 설교가 비추어 준다. 이 다섯 설교에 따르면 하느님 백성이 어떻게 자기를 봉헌하여 그리스도의 몸으로 축성되는지를 알 수 있다.

 

누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축성되는가? 공동체 설교에  따르면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 보잘것 없는  이들'(18,6.10.14)의  공동체이다.  이들은 '자신을 낮추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이들'(18,2-5)이며 '진심으로 서로를 받아들여 용서하는 이들'(18,35)이고 이 용서의 삶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지금 여기서 사는 이들이다(참조;18,18-20). 이들이야말로 '하느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18,1) 이들로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축성되는 공동체를 이룬다.

 

언제 그리스도의 몸으로 축성되는가? 종말설교에 따르면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24,36;25,13).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오직 하느님만이 아신다'(24,36). 축성될 때를 알고 봉헌하는 것이 아니다.  앞서 말한 바, 봉헌과 축성 사이의 긴장이 그것이다. 다만 그 때를 알아 볼 수 있는 징조가 있다.

 

그 징조란 봉헌의 삶에 따르는 온갖 박해의 재난이다(참조;24,1-31). 공동체를 가장 혼란시키는 재난은 거짓 봉헌의 위장이다(24,4-6.  23-28).

 

참된 봉헌의 기준은 가난한 이들이 서로를 주님 섬기듯이 살아가는 것이다(25,31-46). 최후의 심판 기사(25,31-46)는 신약성서와 가난한 공동체가 동일시되는 유일한 대목이다.

 

최후 심판의 기준이란 가장 근본적인 기준을 의미한다. 이 근본 기준에 따라 가난한 공동체를 주님 섬기듯, 에누리 없이 섬길 때 세상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죄악의 어둠이 비로서 종말을  고하고  -  이런 의미에서 24-25장을 종말설교라고 한다 - 구원의 빛이 공동체를 통하여 창조된다.

 

그러므로 가난한 공동체가 그 안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을 형제로 받아드여 주님을 모시듯이 따뜻하게 맞이할  때'(25,34-40)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축성된다. 이때에야 비로소 공동체다운 공동체가 창조되는 것이다.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으로 축성되는가? 산상설교에 따르면 '말씀을 듣고 실행함으로써'(7,24-27)축성된다. 이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7,24) 삶이다. 곧 앞서의 근본 기준(25,31-46)이 공동체에서 철저하게 삶의 기준이요 척도로서 지켜지는 것을 말한다. 말씀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 지침들이 하느님 나라의 헌장으로서 5-7장에 나타나 있다.

 

이 헌장은 철두철미 공동체 실천을 전제하며 지향하고 있다. 특히 진복팔단(5,3-10)은 대표적인 지침으로서 산상설교의 백미이다.  이는 참된 행복의 8가지 기준으로서 공동체적 삶으로 구체화되는 진리를 말해 주는 동시에 공동체 형성 자체가 십자가의 길이요, 봉헌의 삶임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이 길은 '먼저 하느님 나라를 구하는'(6,25-34) 공동체가 예수와 함께 '주님의 기도'(6,7-13)를 바칠 자격을 얻는 길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축성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비유설교에 따르면 이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13,44)을 찾아낸 것과도 같이 인류 역사의 어둠 속에 감추어져 있던 구원의 진리를 살 수 있음을 의미 한다.

 

그러나 이는 '가라지(13,24-30)와도 같은 비구원의 상황 속에서 '겨자씨'(13,31-32)나 '누룩'(13,33)과도 같이 초라하게 성장하는 삶의 과정임을 아울러 의미한다. 이 초라한 봉헌조차 '길바닥' 이나 '돌밭'이나 혹은 '가시덤불' 에 떨어진 씨앗의 운영처럼 축성의 열매를 당연히 보장받지는 못하는 것이며, 열매를 맺는다 해도 축성의 결과는 '삼십 배' 일지, '육십 배' 일지 또는 '백 배' 일지 장담할 수 없다(13,1-9).

 

봉헌과 축성 사이의 긴장은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봉헌하는 공동체는 땅에 떨어진 씨앗의 운명에 비유할 수 있다. 그 씨앗은 자신이 뿌려진 환경이 어떠하든지 자신이 썩어야 뿌리를 내리고 싹을 내서 열매를 낼 것임을 믿고 오직 썩는 도리 밖에 없듯이, 오로지 하느님의 축성을 믿고 순수하게 봉헌할 도리 밖에는 없다.

 

축성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역사에서 숱하게 유혹을 받아온 바와 같이, 교회가 이 긴장을 인위적인 제도화로써 완화시켜 축성을 가시적으로 보장받으려 할 때 교회의 생명력은 쇠퇴한다.

 

이 역설과 모순 속에 구원의 신비가 숨어 있다.

 

그러므로 미사의 둘째 박자인 성찬의 전례에서 교회가 표현하는 것은 첫째, 예수의 십자가상 제사에서 이루어진 봉헌과 축성의 거룩한 변화이고, 둘째, 그 미사를 집전하는 공동체의 봉헌과 축성으로 이루어진 거룩한 변화이다. 공동체는 이미 이루어진 예수의 거룩한 변화의 은총에 힘입어 아직 아니 이루어진 자기 봉헌과 하느님 축성을 믿어 고백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