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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신 앙 관 련

미사의 공동체적 이해(2) - 하느님 백성으로서 공동체

by 파스칼바이런 2012. 10. 29.

 

하느님 백성으로서 공동체

 

 

 

개회식과 말씀의 전례에서 표현되는 미사의 첫 박자는 하느님 백성의 모임과 대화로 이루어진다. 십자가를 통한 하느님 나라의 삶이라고 하는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이 첫 박자에서는 모임과 대화로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에 공동체 형성의 사회적 위상이 자리잡고 있다.

 

역사상의 어느 교회에나 원초 계시로서 기준이 되는 예수의 공동체 실천은 이 점에 있어 글자 그래도 혁명적이었다. 여기서 촛점이 되는 것은 이 점이다 : 과연 누가 하느님의 백성으로 모여 왔던가? 이 점은 오늘날 교회에 이렇게 이어진다 : 누가 미사에 참석하는가?

 

하느님 백성은 하느님께서 친히 모으시기에 이 모임의 성격은 그분의 구원계획을 드러낸다. 그분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며 새롭게 창조하시고자 하신다. 그분은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이같은 구원계획을 전하게 하셨다. 따라서 이 구원계획을 들은 사람들에게 관심거리가 되는 것은 이 점이다 : 어떻게 하느님 백성이 모여 오는가? 이 관심은 오늘날의 교회에 이렇게 이어진다 : 어떻게 미사가 시작되는가?

 

하느님은 당신의 부르심을 듣고 모여온 당신 백성을 친히 이끄신다.

 

여기에 공동체의 행동양식이 있다. 예수의 공동체 실천에서 드러난 바 : 하느님 백성의 모임은 무엇을 하는가? 당연히 오늘날의 교회에 이어지는 물음 ; 말씀의 전례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누가 하느님 백성으로 모여 오는가? 쉽게 대답하자면  그것은 물론 영세한 신자들이다. 신자라면 누구나 미사에 참례할 수 있고, 또 신자라야 미사에 참례할 수 있다. 이 대답 자체가 싱거울만큼 오늘날 신자가 된다는  사건은 살아가면서 겪는 치레 중의 하나로 떨어진지 오래다.

 

습관적인 미사참례 풍토속에서 누가 미사에 참례하느냐는 물음은 물으나 마나한 물음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예수 추종을 증언하는 신약성서에 물어보면 이는 절대로 지금처럼 잊혀진 물음이 아니었다. 오히려 교회가 교회답자면 묻지 않을래야 묻지 않을 도리가 없는 교회에 관한 가장 중요한 물음 중의 하나였다. 이른바, '함께 모일 수 없는 처지' 가 그 당시에도 있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함께 미사드릴 수 없는 처지'가 있었던 것이다.

 

교회의 복음서로 불리우는 마태오 복음서에 따르면 대답은 '예수를 믿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마태 18, 6. 10;25, 40;1 코린1, 26-31)이다.

 

여기서는 하느님 백성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루카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루카 4,18) 예수의 모습을 선명하게 전하면서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들을 때'(루카 7,22)일어나는 여러 기적들을 열거하고 있다.

 

즉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고 하느님 백성으로 모여 왔다는 것이다. 이에 관한 신약성서의 증언은 그 기반이 매우 튼튼하다. 그래서 신약성서 스스로 가난한 이들이 누구인가를 묻고 있다. 여기엔 세 부류가 있다.

 

1) 물질적으로 빈곤한, 그야말로 가난한 이들(루카 6,20),

2) 마음이 가난한 이들(마태 5,3; 사도 2,43-47;4,32-35),

3) 스스로 가난한 이들' 착취와 탐욕이라는 악에 물든 가진자들로부터 빼앗긴 이들이다. 혹은 스스로 게으름의 악에 빠져 가난해졌을 경우도 간혹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현대적 상황에서는 본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의한 사회구조 때문에 가난해지는 경우가 압도적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가장 부지런한 사람들은 가장 가난한 이들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마음이 가난한 이들' 재물을 가지고는 있으나 재물 대신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이다.

 

'스스로 가난을 선택한 이들' 은 '그야말로 가난한 이들'을 악의 현실로부터 하느님 나라의 현실로 해방시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가진 것을 나누고(루카 18,22) 복음 선포에 투신하는 이들이다. 예수를 비롯한 열 두 제자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렇게 가난의 의미를 구분할 수 있다고 해서 가난함과 하느님 백성의 관계가 약화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 백성이란 '복음을 듣고 모여온 가난한 이들' 이라는 사실이 성서적으로 더욱 명확하게 드러났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교회 안팎에서 쓰이는 '가난한 교회' 라는 용어가 얼마나 비성서적으로 무분별하게 통용되는지를 지적해야 한다. '가난함'이 비성서적으로, 오직 경제적이고 물질적인 의미로 교회 안에서 통용됨으로 해서 가난함의 각 단계에 알맞는 영성들이 상호 갈등을 빚어 복음화 노력의 낭비도 적지 않다.

 

심지어는 '가난한 교회'에 대한 반발 작용까지 생겨나고 있다. 더욱 근원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건대, 신앙인들은 하느님 앞에서 가난한 이들이다. 교회는 하느님 앞에서 가난한 처지일 수 밖에 없다. 실상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강생의 신비야말로 절대 가난의 경지가 아닌가?

 

악의 결과인 빈곤을 찬미하자는 것이 아니라 악으로부터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해방되어야 함을, 그리고 재물이 기준이 아니라 하느님 섬김이 기준임을 말하자는 것이다(참조:마태 6,21.24). 사람들의 현실조건이 촛점이 아니라 예수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선택이 촛점이 되어야 하는것이다. 그래서 다시 강조되어야 하는 사실 : 하느님 백성은 복음을 들은 가난한 이들이다.

 

이 사실을 가볍게 지나쳐 버린다면 오늘날 미사참례의 자격기준으로 되어 있는 세례의 참된 의미가 가려지고 만다. 신자가 되고자 하는 이들은 두 가지의 다짐을 해야 한다. : 마귀를 끊어 버림과 하느님을 믿음.

 

하느님 백성은 모름지기 마귀를 끊어 버리고 하느님을 믿는 이들이어야 한다. 말하자면 하느님 백성의 소집과정이 두 단계로 나타난 셈이다.

 

 

어떻게 하느님 백성이 모여 오는가?  예수가 하느님 백성을 모으려고 선포한 복음의 첫 메시지를 마르코는 이렇게 증언한다 : "때가 다 되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다가온 하느님 나라를 위한 회개와 믿음이 하느님 백성의 자격조건으로 제시된 셈이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하느님 백성(마태 25,34)을 모으면서 회개와 믿음에로 사람들을 초대하였다.

 

회개에의 초대에 응한다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선택하는 것이요, 악의 현실을 포기하는 것이다. 개인의 처지에서 보면 죄를 반대하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마음의 죄와 세상의 죄로부터 해방되어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자유를 누리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실상 죄의 뿌리는 마음에 있다(마르 7,21-23). 마음의 죄로부터 끊어지지 않는 한 회개는 불가능하다(로마 6,18-19). 그러나 세상의 죄 또한 불의한 사회구조를 조장하여 악의 끊임없는 사슬로 사람들을 얽매어 노예로 만든다. '그야말로 가난한 이들' 이 복음을 듣기는 커녕 절망과 체념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죄를 반대하는 선택' 은 불의한 사회현실에 직면하여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을 필연적으로 포함한다. 이 '세상의 죄'는 현대판 율법으로서 불의한 체제, 이데올로기, 문화 등과 관련되어 있다. 바오로 시대에나 지금에나, 율법은 사람들을 구원하지 못한다.

 

하느님 나라로 향한 십자가의 믿음만이 구원을 주는 것이다 (참조 : 로마 3,28;1 코린 1,18). 그리하여 우리는 "생각과 말과 행위로" 지은 죄와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함으로써" 지은 죄를 미사에서 고백하는 것이다.

 

회개와 믿음은 별개의 과정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죄는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 앞에서 고백하는 것이요, 이 고백은 "사랑을 베푸시는 성부와 은총을 내리시는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이루시는 성령"께 대한 믿음에서 우러나오기 때문이다. 믿음은 죄를 고백하는 회개에서 비롯되고 회개는 믿음의 행동양식에서 구체화된다.

 

하느님 백성의 모임은 무엇을 하는가? 말씀의 전례에서 하느님 백성이 하느님과 대화하는 구조는 바로 하느님 백서응로서의 교회가 어떠한 행동양식을 가져야 하는지를 드러낸다. 하느님 백성은 말씀의 전례를 통하여, 죄를 고백하고 -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며 - 신앙을 고백하며 - 백성의 기도를 하느님께 바친다. [죄의 고백 - 하느님 말씀을 들음 - 신앙의 고백 - 신자들의 기도] 라는 대화구조는 바로 [삶 -> 말씀  ->  삶]에로 순환되는 삶의 성사화구조이다.

 

말씀에 비추어 삶을 성찰하고(죄의 고백), 다시 말씀에 따라 삶을 기획하는(신앙고백과 신자들의 기도) 행동양식이야말로 교회적인 삶의 양식이다. 삶의 구체적인 체험들(생각과 말과 행실의 죄, 의무소홀의 죄)로부터 출발하되 말씀을 통해 하느님의 빛으로 조명되어 삶을 새롭게 한다.

 

우리의 뜻대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마태 4,4)  삶이야말로 하느님 백성의 행동양식이다. 이러한 [삶의 전례화 - 전례의 일상화] 로써 삶이 성화되어 성숙해가는 것이다.

 

교회가 의미하는 것과 의미하지 않는 것이 이로써 분명해진다.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 을 들은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께 감사" 하고 "그리스도께 찬미" 를 드리는 것이다. 이 "감사와 찬미" 가 삶의 구체적인 현실에 뿌리내리고 있지 않거나 그야말로 말씀을 통해 다시금 일상의 삶에서 열매맺지 못한다면, 우리는 말씀의 전례가 아니라 그저 "말의 전례" 를 치루는 셈이 된다. 하느님 백성의 행동양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씀을 통한 삶의 성숙은 움직일 수 없는 하느님 백성의 윤리이다. 하느님 백성은 죄를 고백하는 공동체이고, 빵만으로보다 말씀으로 살아가는 공동체이며, 복음을 받아들이는 공동체이면서 신앙을 고백하는 공동체이고 또한 기도하는 공동체이다.

 

이러한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공동체는 신앙고백에서 그 본질을 나타낸다. 신앙고백의 내용 중에서 특히 교회에 관한 신앙고백은 교회를 규정하는 불변의 기준이다 : "하나이요,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

 

하나인 교회라는 말은 교회의 역사에서 종종 이단 논쟁의 갈등을 불러 일으켜 왔다. 그러나 하나인 교회는 하나인 믿음에 기초한다. 그 믿음은 오로지 십자가를 통한 하느님 나라에의 믿음이다. 하느님 나라에의 선택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이는 마음과 세상에 있는 인격적이고 사회적인 악을 추방하려는 선택이며, 구체적인 상황에서 요청되는 삶의 선택을 의미하는 것이다. 교회의 제도적 형태는 이에 비하면 어쩔 수 없이 뒤에 쳐져야 하는 기준이다.

 

한 가지의 제도로서 교회가 획일화되어야 하는 기준이 하나인 교회가 아닌 것이다.

 

거룩한 교회 역시 그 자체로 자명하지 않는 말이다. 하느님 홀로 거룩하시다. 피조물은 하느님을 드러낼 때에만 비로소 거룩해진다. 구체적인 현실에서 악에 희생된 사람들 가운데에서 그들을 하느님 백성으로 모으는 그리스도의 선택에 따를 때 교회도 거룩해진다.

 

보편적인 교회는 진리의 보편성에 입각하고 있다.  하느님 나라는 보편적 진리이다. 그 어느 누구도 여기서 제외되거나 배척되지 않는다.

 

특정한 사람들 - 가난한 이들 - 을 선택한다는 것도 나머지 사람들을 계급적인 투쟁으로써 배척한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이 처한 악의 현실때문에 우선적으로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진리의 보편성에 어긋나지 않는다. 사실은 하느님 나라의 진리가 가난한 이들까지도 제외시키지 않고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하기 때문에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이 필요하고 정당한 것이다.

 

먼저 선택된 이들이 지향할 바는 탕자의 형이 취한 태도(루카 15,25-30)와는 반대로 모든 이를 위한, 그래서 보편적인 하느님 나라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도로부터 이어지는 교회란 예수의 제자들로 구성된 12사도의 공동체가 그랬듯이 예수의 공동체 실천에 에누리없이 추종하는 교회이다.

 

사도성 실천은 예수 추종이요, 예수 추종은 공동체 실천이다. 사도성은 공동체 실천에 바탕하는 것이기 때문에 몇몇 개인만이 사도적이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사도적이어야 한다. 사도적 소명에 있어서 하느님 백성은 예외없이 평등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하느님 백성으로서 교회가 "하나이요, 거룩하고, 공번되고(보편적이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공동체이어야 함을 미사의 첫박자에서 고백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