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피조물로서의 공동체
공동체를 위한 구조로서 미사의 세째 박자는 공동체가 성령의 피조물로서 성숙하는 과정을 표현한다. 성령은 거룩함의 영으로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 그 자체이시다. 성령에 의한 새로운 창조란 거룩함이 이러한 창조적 전망 아래에서 성체의 신비는 탁월하게 성취되는 것이며 이로 말미암아 성령의 세례가 진행된다. 이 과정이 성찬식과 파견식에서 표현하는 내용이다.
거룩함이란 무엇인가?
거룩함이란 그 자체로서 설명될 수 없고 거룩하지 않은 다른 것과의 관계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는 바, 삶의 바탕을 이루는 하나의 관계적 실재이다. 관계적 실재로서 거룩함은 거룩하지 않음을 뜻하는 천함과의 관계에서 이중적인 본질을 지닌다. 거룩함은 천함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상호이질적인 실재이다. 성은 속과 다르다. 거룩함은 모든 속된 것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이 초월성이 거룩함의 첫째 본질이다.
한편 거룩함은 천함과 분리되지 않고 이 천함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려 움직인다. 성은 속을 성화시킨다. 거룩함은 모든 속된 것 속으로 내재하여 성화시키는 힘이 있다. 이 거룩함의 움직임은 먼저 가장 속된 것부터 선택하는 방향성을 지니고 있다.
이 선택적이고 내재적인 방향성이 거룩함의 둘째 본질이다. 거룩함과 천함의 관계는 마치 빛과 어둠의 관계처럼 서로 대조적이면서도, 빛이 어둠을 밝히듯이 거룩함이 천함을 성화시키는 운동성을 지니고 있는, 대조적이며 운동적인 관계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이런 견지에서 성속을 분리시키는 성속이원론이나 성속을 구분하지 않는 성속일원론은 모두 오류이다. 인식상의 오류가 실천에 옮겨지면 그것은 죄에 해당한다.
계시의 역사에서 성과 속의 대조적이면서 동시에 운동적인 관계를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에서 홀로 거룩하시다. 이 절대적인 거룩함은 모든 속된 것들의 천함을 초월하는 까닭에 한갓 피조물에 불과한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 앞에서 거룩하지 않다.
오히려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낼 때에나 드러낸 만큼 상대적인 거룩함을 지닐 뿐이다.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의 거룩하심을 반영함으로써 생명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
거룩하신 하느님께서는 온 세상을 거룩하게 하신다. 그래서 속된 세상을 위한 비천한 십자가가 죽음으로써 거룩한 희생제물이 되셨다. 그리고 거룩한 희생의 힘으로 속된 세상의 모든 사람을 전인적으로 - 육체와 영혼을 다 함께 - 거룩하게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세 위격으로서 이같은 거룩함의 역사적 신비를 하나로 이루신다. 거룩함의 역사적 신비에 있어서 예수는 그 절정이다.
예수의 탄생과 공현은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비천한 육체를 취하시고 비천한 처지에서 가장 비천한 가난한 이들을 찾아 거룩하게 변화시킨 육화의 신비를 드러낸다. 예수의 수난과 죽음은 가장 비천한 이들 뿐만 아니라 본시 비천한 모든 사람들을 거룩하게 변화시키기 위하여 십자가 죽음을 수락한, 희생의 신비를 드러낸다. 이 신비는 십자가와 부활에 관한 신앙의 전통으로 교회에서 보전되고 있다.
신앙의 문화에서 성과 속의 대조적이고 운동적인 관계는 성체성사에서(세상과는) 대조적인 나눔과 (성화의) 운동적인 파견의 양식으로 성취된다. 나눔과 파견으로 거룩한 희생에 참여하여 성령의 세례를 받은 공동체는 성령께서 창조하시는 피조물이다.
누가 성령의 피조물 공동체를 이루는가? 루카의 증언에 따르면 그것은 "스스로 가난한 이들"(루카 18,28)이다. 이들은 "지금 굶주리고 우는 가난한 이들"(6,20,21)에게 가진 것을 모두 나누어주고 예수를 추종하는 제자들이다(14,33;18,22.28).
그러므로 이들의 공동체는 "그야말로 가난한 이들"(="지금 굶주리고 우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되는"(사도 4,34)일이 일어난다. 이들로 말미암아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루카 7,22) 기적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들은 "성령의 세례"(사도 1,5)를 받아 "성령으로 가득차서"(2,4.38;3, 8;5, 3. 8;7, 54;8, 17;9, 17;10, 44이하;11,24. 28;13,10) 아무런 "두려움"(루카 1,13.30;5,10)이나 "걱정"(12,22)을 하지 않고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는"(12,31)제자들이다.
이들은 또한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10,42)임을 깨닫고, "마치 철부지 어린이처럼 하느님 아버지께"(10,21)오로지 "성령만을 구함"(11,13)으로써 성령의 피조물 공동체를 이룬다. 이 공동체에서 그리하여 나눔의 실천이라는 엄청난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12,22)하고 걱정이 태산 같아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누룩을 조심하라"(12,1)는 경고를 듣는 처지였다. 더우기 이들은 "'누가 제일 높으냐'하는 문제로 말다툼"(9,46)을 할 만큼 실로 한심한 처지에 머물러 있었기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13,6-9)라는 심한 질책까지도 받아야 했다.
그뿐이 아니다.
이들은 잡힐까 두려워서 스승이 죽음을 당하는 현장에 나타나지도 못하는 겁장이들이었을 뿐만 아니라(참조 : 23,27), 마침내는 부활의 증언 (24,8) 조차 "부질없는 헛소리"(24,11)라고 몰아부치던 불신자들이었다.
이렇듯 그야말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17,6;참조: 8,25)조차 없는 초라한 모습에서 영웅적인 결단이라든가 악착같은 노력은 아예 그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도리어 영웅적인 결단이나 악착같은 노력으로도 불가능한 엄청난 일을 해 낼 수가 있었다.
왜? 바로 성령때문이었다. 이들은 오순절날 성령을 충만하게 받고 나서야 비로소 "하느님 말씀을 담대하게 전하는"(사도 4,31)사도들이 되었다.
성령의 이끄심으로 이들은 하느님 나라의 거룩하심을 체험했으며, 이 안에서 "영원한 생명"(루카 18,28)과 "하늘의 보화"(18,22)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제서야 이들은 예수를 주님으로 알아보고(24,35)기쁨에 넘쳐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었다(24,52;사도 2,46-47). 예수야말로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루카 7,18)이며 "주님은 거룩하신 분"(1,49)임을 깨닫고 마침내 "무엇이 옳은 일인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12,57)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성령의 세례"(사도 1,5)를 받고 무엇을 어떻게 했던가? 바로 나눔과 파견을 거룩한 희생으로써 실천하는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되었다. 과연 그들은 "스스로 가난을 선택하여"(루카 18,28)" "두려움 없이"(1,13. 30)예수를 추종하고자 하는 제자들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도록"(11,2)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4,18) "하느님의 나라"(11,2)의 사도들이 되었다.
사도행전의 줄거리는 사도들의 거룩한 희생을 감동적으로 증언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사도들은 이제 "어떠한 박해나 모욕도 두려워하지 않고"(6,22) 오히려 이를 "기뻐하며"(사도 5,41) 온 세상의 "보다 깊은 곳에 가서"(루카 5,4), "이교 백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 되고 주의 백성에게는 영광이 되는"(2,25)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적 능력과 소명을 받게 되었다.
이 사도적 체험으로 말미암아 이들은 또한 예수가 "당신 백성을 해방시키기 위해 찾아온"(1,68)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3,22)임을 그제서야 고백하게 되었다(사도 7,1-60). 그러므로 이들은 비로소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루카 1,35)이며 자신들도 성령의 세례로 새롭게 태어났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성령의 세례로 새롭게 태어났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성령께서는 거룩한 희생의 사도들로서 성령의 피조물이 되었다. 그 결과, 이들은 "모든 사람이 우러러 볼 만큼"(2,47) 사도적인 공동체를 성령의 능력으로 창설할 수 있었으며 (2,43-47;4,32-35), "성령과 우리(사도적 공동체)의 결정으로"(15, 29) 나눔과 파견의 사도직을 수행하기 위한 모든 일을 조정할 수 있었다.
이 사도적 공동체의 나눔과 실천 자체가 이들 자신들의 인습적 관행을 혁명적으로 뛰어넘는 것이었기에 사도적 결정과 조정과정에서 어려움도 겪었다. 때로는 교회의 일치를 위협할 만큼 심각한 문제로 발생하였는 바, 할례 문제를 둘러싼 예루살렘 회의(15,1-29)가 그것이었다. 사도적 공동체들은 결국 "자신들을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들을 지지하는 사람"(루카 9,50)이라는, 참으로 후대 역사를 위해 귀중한 교훈이 된 종교적 관용의 원칙을 성령의 이끄심으로 터득하기도 했다.
이 사도적 공동체가 행한 나눔의 실천은 빵을 나누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함께 기도하며 찬미함으로써 신앙까지도 나누는 온전한 나눔이었다.
이들은 온전한 나눔의 일을 통하여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사도적인 공동체)에서도 이루어짐"을 증거할 수 있었고, "일용할 양식을 날마다 받음"은 이러한 나눔을 거부하는 "바리사이파의 누룩(루카 12,1)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온전한 나눔이 바로 성령의 피조물로 창조된 사도적 공동체의 일이었고, "빵의 나눔"(사도 2,26)이 정작 뜻하던 바였다. 오늘날의 미사는, 사도적 공동체가 이 온전한 나눔의 일을 자신의 사도적 표지로 삼았던 전통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이는 예수의 거룩한 희생의 은총으로 생겨난 것이므로 당연히 이를 기념하는 거룩한 사건, 즉 성사로서 거행되었다.
미사에서는 예수 자신이 세상의 성화를 위해 나누어지는 빵이다. 성령이 이 거룩한 빵, 즉 성체를 나누신다. 이 거룩한 나눔으로써 성령은 세상에, 그리고 현재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현존시키신다. 즉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천주의 어린 양"을 현존시키시는 것이다. 결국 빵이 온전하게 나누어지는 곳마다 성령이 "세찬 바람처럼 불어와서"(사도 2,2) "주의 평화가 항상(그 공동체와) 함께" 하게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사도적 공동체의 파견은 이 온전한 "빵 나눔" 에 따라 이루어지는 결과요, 이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무슨 영웅적인 결단을 내리거나 악착같이 노력함으로써 억지로 이루어지는 인위적인 행위가 아니라 사도적 파견이란, 성령의 "빵 나눔" 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무위적인 은사인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 공동체가 거행하는 미사에서도 "가서 복음을 전하라 "는 파견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강복" 이 없다면 결코 이루어 질 수 없는 일이다. "성령의 강복" 이란, 사도행전의 증언대로, 어떠한 박해 속에서도 비천하고 속된 모욕을 기꺼이 참아 받으면서 온전한 나눔이 이루어지는 거룩한 사도적 공동체를 "담대하게" 건설하는 일에 투신하되, 바리사이적인 다른 어떤 일의 유혹에도 빠지지 않을 것을 의미한다. "구원받을 신도들은 날마다 늘려 주셔서" 사도적 공동체가 성장하고, "신도들의 공동체들이 커 가서" 마침내 속된 이방 사회가 거룩하게 될만큼 사도적인 파견이 널리 이루어지는 것은 오로지 "성령께서 하실 일"(사도 2,47)이다.
따라서 거룩한 희생의 길로 이끄시는 성령께 의탁하여 온전한 나눔과 파견에 투신하는 일이야 말로 우리가 "하느님께 감사" 드리는 것이라고 말할수 있다. 이것이 오늘날, 루카가 증언하고 있는 사도적 공동체와는 참으로 대조적으로 속화되어 놀라울만치 성령께 대한 둔감증세를 보이고 있는 우리네 교회현실에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요, 선교전략임을 미사의 세째 박자는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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