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우리는 자신의 영성생활이 좀더 성숙해지고,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하며 하느님과의 풍요로운 만남과 대화를 하기 위해 기도를 한다. 우리는 기도를 시작함에 있어서나, 기도 여정 중에 겪는 어두움, 메마름의 체험들 안에서 하느님께서 주도권을 갖고 역사 하시며, 우리를 당신 가까이 이끌고 계심을 알 수 있었다. 이처럼 우리 삶 안에 역사하고 계신 주님의 뜻을 기도 안에서 어떻게 알아듣고 찾아낼 수 있을까?
우리는 매우 다양한 특은과 소명을 받고 있다. 성령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것을 바라지 않고 계시며 인간 삶의 근본적인 다양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각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을 기도를 통해 식별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각자의 삶 안에서 주어진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는데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즉 우리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식별해야 하는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오늘날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의 올바른 영성생활을 위해서 이러한 식별의 문제를 해결해야하는 중대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기도생활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아내는 식별의 의미를 살펴보고, 식별하기 위한 조건들과 엄밀하게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는 시기를 알아보며, 마지막으로 고독과 위안을 통해서 전해지는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식별하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코를레오네의 성 베르나르도(Bernardus)
Ⅱ. 식별 : 느낌을 알아내는 것
1. 식별의 의미
일반적으로 식별이란 용어는 시각이나 다른 감각, 또는 지성으로 무엇을 감지하고, 그리고 마음속으로 차이가 드러나는 것을 인식하거나 구별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이 용어는 산스크리트 말(Kir 혹은 Kri)에 뿌리를 두고 있고 '정화시킨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식별 하다를 '선별하여 갈라놓다'로 해석하여 '비평하다'라는 의미도 지닌다. 여기에서 식별은 기도행위에서 비롯되는 현상이나 체험이 있는 의미와 상황을 분별하여 그것이 지니고 있는 가치와 한계를 명확하게 규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하느님의 뜻이 무엇이며, 선하고 완전하고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것이 무엇인지를 분간"(로마 12,2참조)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권세의 악신들과 세력의 악신들과 암흑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의 악령들이"(에페 6,12 참조)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생활에 파고들어 훼방을 놓는가를 확인하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식별의 의미를 "훈련을 받아서 좋고 나쁜 것을 분간하는 세련된 지각"(히브 5,14)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식별은 "성숙한 경지로 나아가야"(히브 6,1)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끌어 가는 출발점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때 식별은 기도를 통해서 얻어진 결과에 대해 행동으로 옮길 수 있도록 그 토대를 제공한다.
식별을 통해 확인된 하느님의 체험을 하게 되면 우리는 그것을 행동으로, 사랑으로 드러내게 된다. 이러한 행동은 장기간 기도하는 것이 될 수도 있고 선교에 직접 나서는 것이 될 수도 있으며, 때로는 지극히 평범한 일을 수반하지만 반면에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할 수도 있다.
그러면 어떻게 식별할 것인가? 이냐시오(Ignatius of Loyola)는 "나의 눈이 열리기 시작하면서 나는 그 체험의 차이에 대해 궁금해하고 그것에 관해 성찰해 본 결과, 어떤 생각들은 나를 슬프게도 하고 또는 기쁘게도 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식별에 관한 문제에 관심을 갖고, 이 문제를 "선신과 악신을 분별하는 규범"에서 다루고 있다. 여기서 그는 식별이란 "우리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의 움직임들을 파악하는 것"(313항)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런 움직임들을 영신적 위안과 영신적 고독이라고 부르고 있다. 영신적 위안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즉 강렬한 감정을 수반하거나 또는 그 감정이 차분하고 깊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항상 주님 안에서 평화를 누리를 것이다. 평화가 없이는 누구나 주님을 볼 수 없다(히브 12,14). 즉 영신적 위안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증폭시켜 주며, 주님께 깊어 가는 내적 기쁨이 충만해진 느낌을 갖게 한다.
그리고 영신적 고독은 위안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고독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빼앗아 가고, 하느님께로부터 더욱더 멀어져 있는 느낌을 갖게 한다. 위안은 평화를 누리지만, 고독은 평화를 상실해 버리는 것이다. 고독과 위안을 설명하면서 '느낌'이라는 낱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우리가 식별해야 하는 것은 생각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느낌이다. 따라서 우리는 느낀 바에 따라 이제 사람이 되신 예수님을 보다 가까이 따르고 본받아야 한다.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Ignatius of Loyola)
2. 식별의 특징 : 느낌
이 느낌은 하느님에 대한 감각적 깨달음이다. 우리는 이러한 느낌들을 신뢰할 수 있는가? 우리는 자신의 느낌들을 초월하고, 냉정한 두뇌와 합리적인 생각으로 삶을 영위해 왔기에 막연히 느낌을 신뢰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느낌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기에 느낌에 대해 맹목적으로 신뢰하거나 뒤쫓아서는 안 된다는 점도 인식해야 한다. 하지만 느낌은 결정적 중요성을 갖는다. 우리 영성생활에 있어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는데 있어서 느낌은 필수 불가결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드멜로(A. de Mello) 신부는 감각의 느낌을 통해 초월적인 하느님을 체험할 것을 권고하며, 이러한 느낌을 통해서 영신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게 된다.
느낌은 우리가 겪는 하느님 체험에 필요한 원료이다. 이러한 느낌을 통해 밀알과 가라지를 합리적으로 판별하고 구분해 낼 수 있다. 느낌은 우리가 식별하는 원료에 해당한다. 지성은 느낌의 근원과 타당성을 판단하며, 그 판단을 토대로 하여 행동으로 움직여 나가는 것이 바로 의지이다. 따라서 식별은 감정과 지성과 의지를 총망라한 全人間과 관계되는 것이다. 느낌이 없다면 식별의 전과정에 있어서 알맹이가 빠지게 되는 것이다. 기도하는 자들은 이런 느낌이 어떤 경위로 나오게 되었는지 판단하고, 그 안에 성령의 감도를 받는 행동에 필요한 토대가 내재되어 있는지 여부를 판정해야 한다.
Ⅲ. 식별하기 위한 조건
우리에게는 상호 대립되는 두 가지 영혼 상태가 있다. 첫 번째는 “대죄에 대죄를 거듭하는 영혼의 상태”인 경우인데, 이 때 이 영혼의 근본적인 삶의 선택은 하느님과 대립하고 자기를 편드는 선택을 한다. 두 번째는 "자기의 죄를 정화하고 우리 주 천주께 봉사함에 있어서 더욱 완덕에로 나아가기를 진심으로 노력하는 영혼들을" 말한다. 이 영혼들은 하느님과 하느님에 대한 봉사를 삶의 근본 방향으로 선택한 자들이다.
첫 번째 유형의 영혼들은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식별할 의지가 전혀 없지만, 두 번째 유형의 영혼들은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투신하는 영혼들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고자 노력을 한다. 따라서 이냐시오는 첫 번째 유형의 영혼에게 아무런 지도 지침을 제시하지 않고 있으나, 두 번째 유형의 영혼에게 고독과 위안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는데 필요한 길잡이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식별이란 '하느님이 진실로 무엇을 바라시고 있는지',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내가 처한 위기 상황 속에서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은 무엇일까?'를 분명하게 알아내는 작업이다. 이러한 식별은 항상 하느님의 뜻이 불투명하고, 확실하지 않는 위기 상황 속에서 적용되는 기술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올바른 식별을 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필요 조건이 요구된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
1. 하느님께 향한 의지
우리 삶의 구체적이고 혼미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행하려는 의지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것은 신앙의 행위이다. 이처럼 식별은 먼저 주님께 대한 투신된 신앙이 전제되어야 한다. 투신된 신자란 진실로 하느님의 뜻을 행하려는 의지, 이 구체적인 환경 속에서 그분의 사업을 실천하려는 의욕을 가진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자신의 삶 안에서 하느님이 별로 관심이 없거나, 신앙생활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식별에 관해 언급할 필요성이 없어진다. 그러나 식별에 대해 관심도 갖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진실로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의욕이 진정한 식별에 최우선적으로 요청되어지는 전제조건이다. 하느님의 뜻은 당신의 원의를 계시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뜻은 개별적 사건을 통해서 나타나며, 우리는 개별적 사건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기도를 바칠 때마다 "당신의 뜻이 제게 이루어지게 하소서"라고 청한다. 예수께서도 "하느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히브 10,7.9) 세상에 오셨으며 주님의 여종 마리아도 겸손되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인다(루카 1,28.38).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인 생활의 특징이다.
2. 하느님께 대한 개방성
식별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의 가르침과 인도를 받고자 해야 한다. 식별하는 사람은 경건하거나 열심한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하느님의 뜻을 찾고자 하는 사람은 항상 신비롭고 놀랍게 만들고 혼돈에 빠지게 하는 하느님께 진심으로 자신의 문을 열고 있어야 한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자신들의 선입견, 자신들의 집념으로 눈이 가리워져서 세상에 오신 예수의 신원과 사명을 보지 못한다. 마음이 무디어진 사람들은 장님이 될 수밖에 없다(요한 12,37-41).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은 말만 앞세우고 실행에 옮기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말라고 하신다(마태 23,3-6). 그들은 예수의 말을 책잡으려 하였으며(마태 22,15; 마르 12,13), 그의 권위를 의심하여 끈질기게 표징을 요구하였다(마태 12,38; 마르 8,11). 또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았으며(루카 6,7; 요한 11,46), 예수의 가르침을 비난하였다(루카 5,21). 더 나아가 자신들이 정해 놓은 규범을 준수함으로써 하느님께 다가설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루카 18,11-12). 그에 비해 세리는 손이 더러운 사람이며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모리배였다. 하지만 세리는 머리를 떨구며 예수님께 자비를 간청하고 있다(루카 18,13-14). 즉 세리는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 놓고 하느님께 마음을 열고 내맡기고 있는 것이다.
돌아온 탕자 / 렘브란트 1662-1668년. 캔버스에 유화, 264.2 x 205.1cm.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미술관
마음을 여는 것은 바로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수용하는 자세이다. '잃었던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에서 집을 떠났던 작은아들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그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고 아버지께 용서를 구하고자 마음을 열었기 때문에 아버지와 만남이 이루어진다. 하느님과의 진정한 만남은 자신을 감추지 않고 마음을 여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마르 10,15-16 참조). 따라서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식별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계명을 아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며(로마 2,18), 하느님께로 자신을 맡기고 귀의해야 하는 것이다.
이냐시오는 하느님을 향한 열림을 「선택을 위한 길잡이」(169항)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모든 선택을 잘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눈이 맑고 밝아야 한다. 즉 한결같이 내가 창조된 목적인 우리 주 하느님이 영광과 내 영혼의 구원만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무엇을 선택하든지 간에, 그것은 다 내가 세상에 태어난 목적을 달성하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면 안된다." 이러한 선택을 위해 하느님께 향할 때 마음을 열 수 있는 것이다.
3. 하느님께 대한 지식
앞에 제시된 두 조건이 결실을 거두기 위해서는 하느님에 대한 체험적 지식을 가져야 한다. 하느님이 뜻을 행하고자 하면서도 어떻게 그 뜻을 발견해야 하는지 모를 때가 있는데 이것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려는 의지는 지녔으면서 하느님과 그분의 길에 대한 확고한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함을 말하고 있다. 생일을 맞는 남편을 위해 선물을 준비할 때, 남편이 원하는 것을 부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남편에 대한 부인의 사랑이며, 그만큼 남편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대를 모르면 상대를 즐겁게 해 줄 수 없는 것처럼, 투신한 대상에 대한 확고하고 체험적인 지식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식별은 불가능해 진다.
마르타는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다가 "너무 많은 일에 신경을 쓴다"는 예수님의 꾸지람을 듣는데(루카 10,40-42 참조), 이 때 마르타도 깊은 통찰력으로 주님을 위한 일과 주님의 일을 식별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선택해서 드리고 싶은 선물을 주님께 드리는 주님을 위한 일과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기 전에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것, 주님의 의향을 알아보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청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느님의 뜻에 대한 식별도 우리가 하느님에 대한 체험적 지식에 좌우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전통적으로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식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준을 성서로 제시하고 있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을 방문하신 그리스도 / 베르메르 (1655년, 캔버스 위에 유화, 160×142cm, 영국 에든버러,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
4. 영적 지도자의 도움
우리가 주님에 대해 갖는 개별적인 체험 지식이 부족하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체험적 지식이 많은 이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 바로 이러한 도움이 영적 지도가 갖는 의미이다. 따라서 영적 지도자는 주님에 대한 체험이 깊고 많으며, 그리고 성령의 손길에 따라 움직이는 도구가 되어야 하며, 자신의 모든 활동을 성령께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 때 영적 지도자를 통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는데 도움을 받게 된다. 우리는 하느님이 뜻을 행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고 싶어한다. 우리의 삶 속에서 구체적인 상황에 직면하게 될 때, 하느님께서 진정으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수 없는 것이 우리가 처한 입장이다. 그래서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 비교적 많은 사람, 현재의 구체적이면서도 불투명한 상황 속에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식별하도록 도움을 줄 만한 사람을 찾게 되는 것이다.
훌륭한 영적 지도자는 추수 밭인 영혼 안에서 통상적으로 발견되는 다양한 종류의 가라지와 밀을 감지해 내는 경험론적 토대를 가진 감수성을 지닌 사람이어야 한다. 따라서 주님의 뜻을 찾고 완덕으로 나아가고자 원의를 지닌 자들은 매사에 영적 지도자들의 도움을 받고 그들의 의견과 충고에 경청해야 한다.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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