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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신 앙 관 련

가톨릭교회의 제사 논쟁

by 파스칼바이런 2012. 11. 28.

가톨릭교회의 제사 논쟁

제사, 초기 한국교회 신앙 "담금질"

 

 

◎ 가톨릭교회의 제사논쟁 언제 시작돼 어떻게 매듭됐나?

 

미신으로 엄금…천주교 박해구실로 작용

제사거부 윤지충, 권상연 신유박해로 순교

1939년 교황 비오12세 조상제사 공식 허용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미사전례에 도입

 

 

추석이 되면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제사상을 차리고 돌아가신 조상의 은혜에 감사하는 제사를 드린다. 이제는 웬만한 신자 가정에서도 제사를 드리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가톨릭교회 안에서는 불과 60년 전만 해도 조상제사는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되는 미신으로 금기시되었다. 가톨릭교회 안에서 조상 제사 문제는 어떻게 불거져 나왔고 또 어떤 식으로 매듭지어졌을까.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첫 번째 박해로 기록되고 있는 1791년의 신해박해는 조상 제사 문제가 빚어낸 참화였다. 전라도 진산에 살던 윤지충(尹持忠.바오로)은 어머니가 사망하자 외사촌형 권상연(權尙然.야고보)과 함께 장례를 치렀으나 신주(神主)를 불태워 버리고 제사도 지내지 않은 것이다.  이로 인해 그들은 패륜으로 몰려 감옥에 갇히고 마침내 목이 잘리는 죽음을 당했다.

 

윤지충과 권상연이 조상제사를 거부하게 된 것은 북경 구베아 주교의 서한이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1790년 조선왕조의 사절단을 따라 북경에 들어간 윤유일(尹有一.바오로)은 조상신주를 모시거나 이미 모셔놓은 신주를 보존해도 괜찮은지에 대해 구베아 주교에게 문의했다. 이에 대해 구베아 주교는 교황의 가르침을 들어 신주를 없앨 것과 제사를 드려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밝혔던 것이다.

 

구베아 북경주교가 근거로 든 교황의 가르침은 조상이나 공자(孔子)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은 우상숭배라고 규정한 1742년 교황 베네딕도 14세의 교서였다.  

 

이 교서의 발표는 약 1세기에 걸친 중국 교회의 '의례논쟁'(儀禮論爭)의 종지부를 찍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1581년 선교사 마테오 릿치의 입국으로 시작된 예수회의 중국선교는 중국의 유교적인 사상과 관습을 살리면서 복음과 조화를 도모하려는 '보유론'(補儒論)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보유론적인 선교정책은 그러나 17세기 중엽에 중국에 진출하기 시작한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에 의해 비난을 받으면서 '의례논쟁'으로 비화했다.

 

그 후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1715년

▲천주교 신자는  공자묘에 대한 배례를 금하며

▲집안이나 묘지에서 조상(弔喪)할  때 배례를 금하며

▲집안에 위패를 모신다거나 신주를 모셔 신(神)을 부르는 등의 행위를 금한다는 내용의 교황교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중국의 황제(강희제)는 교황의 이 같은 결정에 크게 반발해 외국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을 금지시켰다. 당시 교황 특사로 북경을 방문한 메짜바르바 주교는 교황의 금령을 나름대로 조정해 타협안을 내놓았다.

▲위패를 모실 수 있도록 하되 그 옆에 천주교에서의 부모를 공경하는 도리라고 덧붙여야 하고

▲위패나 망자(亡者)의 관 앞에서 절을 하는 것을 허용하며

▲상례(喪禮) 중, 향과 촛불을 켜는 것을 허용하고

▲위패 앞에 음식을 차리는 것을 허용한다는 것 등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타협안은 신자들 사이에 오히려 혼란을 야기했고, 이에 따라 1742년 교황 베네딕도 14세는 교서를 통해 클레멘스 11세의 교서를  재확인, 중국에서의 의례논쟁을 종결지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보유론적인 선교정책을 취하던 예수회는 중국 선교에서 더 이상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고 1773년에는 교황 클레멘스 14세로부터 해산명령까지 받아 이후 40여년간 역사에서 사라지는 운명을 겪기도 했다.

 

초기 한국 교회의 신자들은 이 같은 교회 가르침에 입각해 조상제사를 금했고, 이것은 천주교 신자에 대한 탄압의 구실이 되어 1백년 가까이 크고 작은 박해를 통해 무수한 순교자들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천주교  교리에 호감을 보였던 초창기의 많은 지식인들이 교회를 떠나는 계기로도 작용했다.

 

가톨릭교회의 조상제사 금지는 1939년에 와서야 비로소 해제된다. 교황 비오 12세는 그해 12월 8일 '중국 예식에 관한 훈령'을 통해 공자를 공경하는 예식 비롯해 망자나 망자의 위패 앞에서 절을 하는 것을 허용했다.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고 공자를 공경하는 행위를 우상숭배가 아닌 사회 문화적인 예절로 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여러 종족과  민족의 훌륭한 정신적 유산은 보호 육성한다. 또한 민족들의 풍습 중에, 미신이나 오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지 않는 것이면 무엇이나 호의를 가져  고려하고, 할 수 있다면 잘  보존하고자 한다"(전례헌장 37항)고 밝힘으로써, 조상제사에 대해서도 새롭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이에 따라 한국 교회는 70년대 말부터 설, 추석 등의 명절을 미사 전례에 도입하기 시작했고, 80년대 이후에는 일선 사목자들에 의해 사목적인 차원에서 제사상 차리기 시안 등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조상 제사 예식에 대한 교회의 구체적인 지침은 아직까지 제시되지 않고 있다.

 


 

한가위 조상 제사 이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