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윤리와 윤리 원칙 2>
어떤 부인이 자궁암에 걸려 자궁을 들어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 부인의 자궁에는 이미 수개월된 태아가 자리 잡고 있었다. 자궁을 들어내어 산모를 살리자면 그와 동시에 그 안에서 자라고 있는 태아도 함께 죽어 버리는 결과가 일어나게 된다. 이 부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
산부인과를 전공한 어느 열심한 가톨릭 신자 의사가 종합병원 산부인과를 선택할 때 결코 낙태 수술만은 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했었다. 그러나 전공의 과정 때까지는 그 결심을 지킬 수 있었지만 막상 종합병원 의사로 근무를 시작했을 때부터는 심각한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수술 팀의 일원으로서, 그것도 선배들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신임 의사로서 산모들의 상태에 따른 여러 경우의 낙태 수술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도 그는 할 수 있는 한 직접 집도하는 것을 피하고 옆에서 보조만 해주기로 했다. 그는 직접 악행을 하지는 않아도 악에 대한 협조는 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 병원을 박차고 나와야 할까? 그런데 그는 개인적으로 개업할 돈도 없고 더구나 노부모를 위시한 전 가족의 생계가 그의 손에 달려 있다면?
사람은 하느님과 닮게,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존재이다. 즉 만물 중에 사람만이 하느님처럼 영적이고 이성적인 존재이며, 선 자체이신 하느님을 향한 선의지를 갖고 있는 존재이다. 사람이란 누구든지 자신의 본성과 부합하는 행동을 할 때 안정과 평화를 누리는 법이다. 악한 행위를 했을 때 가책과 불안을 느끼는 것은 악은 하느님을 닮은 그의 본성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본성은 최고의 선, 절대선 이신 하느님을 닮아서 선을 행해 나아가고자 하는데 그의 의지와 행위가 그 본성을 거슬러서 악을 범했기 때문에 그는 자신 안에서 조화를 잃고 분열을 체험하며, 불쾌, 후회, 죄의식이 일어나는 것이다. 자신의 영적이며 이성적인 본성, 선을 향한 본성이 그 반대되는 행위를 한 자신을 향하여 항의를 하고 비난을 하기 때문이다.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자연 도덕 율의 제1원리)는 자신의 이성이 내리는 명령을 감지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능력 그 자체를 우리는 양심이라고 표현하고, 그 능력을 실제로 발휘하여 선이든 악이든 어떤 결단을 내릴 때 {양심이 적용한다} 고 말한다.
선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다 타고나는 법이다. 그런데 그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참으로 천차만별이다. 어떤 이는 그 능력 모두를 다 기르고 발휘하여 참으로 섬세하게 선을 실천하며 훌륭한 삶을 사는 반면 선천적인 선 능력을 마비시켜 짐승 같은 짓을 하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마비된 양심의 소유자도 있다. 이는 사람의 언어능력을 생각해보면 쉽게 짐작이 가는 일이다. 누구든지 말을 할 능력 그 자체는 타고나지만 그가 인간의 언어를 조금도 들어볼 수 없는 동물 세계에서 성장하였거나 선천적으로 청각 기능을 상실했을 때 그의 언어능력은 발휘되지 못하고 마비되는 법이다.
이렇게 선천적인 양심 능력도 후천적으로 계발되지 못하면 그 능력은 사장되고 마비되는 법이다. (이렇게 볼 때 {내 양심대로 산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엄밀히 볼 때 신뢰할 수 없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 양심이 제대로 계발된 양심인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기 때문이다) 남의 장난감을 훔친 어린이가 아버지에게 호되게 회초리를 맞았다면 그는 그런 따가운 체험을 통하여서도 양심 능력이 계발된다. 이런 식의 교육과 체험을 통하여 윤리적으로 선을 결단할 능력과 힘이 후천적으로 양성되었다면 이는 윤리학에서는 윤리 의식(moral knowledge)이라고 표현한다.
이렇게 양심이 그 기능을 다하고 작용을 하여 선을 결단하려면, 선을 향한 선천적인 능력과 후천적인 윤리 의식이 결합되어야 한다. 그가 자신의 양심 능력과 윤리 지식을 합하여 선을 향한 결단을 자주 내리면 내일수록 그의 양심은 더욱 그 능력이 발휘되어 섬세하고 기민한 양심(delicate and alert conscience)이 되어 가고 그의 윤리 의식 또한 더욱 크게 성장하는 법이다. 이런 식으로 사람은 양심의 습관을 형성 해가고 있다. 즉 자신의 개인적인 윤리적 자세, 선과 악에 대한 태도, 여러 가지 윤리 가치(정직, 성실, 생명 존중 등)에 대한 거의 습관적인 반응 등이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이다.
위의 두 가지 어려운 윤리적 상황을 맞이했을 때 각 개인은 그가 평소에 형성 해온 양심의 습관에 따라 판단을 한다. 태아의 생명쯤은 인간 생명이라고 여기지 않는 잘못된 지식과 더불어 생명 존중이라는 유니가치를 의식하지 않는 양심의 습관을 지닌 사람이라면 위에서 본 두 가지 상황 모두가 조금도 곤혹스런 경우가 못될 것이다. 그저 간단히 산모를 살리기 위해서 자궁을 들어내면 될 것이고, 의사가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라면 낙태 수술쯤은 문제 삼지 않아도 된다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태아도 참된 인간 생명이며 이 생명은 참으로 존중받아야 할 소중한 존재라는 섬세한 양심의 습관을 형성 해온 사람에게는 두 가지 경우 모두가 참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가 된다. 남의 바늘 하나를 허락 없이 사용하면서 가슴이 두근거리는 섬세한 양심도 있을 것이고 남의 소를 잡아먹고서도 한 마리밖에 훔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양심의 습성을 지닌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인생은 결단과 선택의 연속이다. 크고 작은 선택과 결단이 인간의 삶에서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이다. 물론 그중에서 윤리 도덕과 밀접히 결부된 선택도 있고 윤리 도덕과 무관한 윤리 중립적인 선택도 있을 수 있다.
그가 윤리 도덕과 결부된 판단, 결단을 내릴 때에는 거의 대부분 그가 평소에 형성 해온 양심, 즉 습관적 양심, 양심의 습관에 따라 판단을 내리고 행동에 들어간다. 그래서 평소의 올바르고 섬세한 양심 형성이 중요한 것이다. 여기에는 부모의 가치관이 큰 역할을 한다. 체험과 교육에 의한 윤리 지식의 형성은 부모가 거의 절대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이다. 소매치기의 아들은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조산원의 반지를 훔치는 법이다.
우리는 위에서 매일같이 내리는 수많은 크고 작은 윤리적 결단과 선택은 평소에 형성해 온 양심의 습관에 따라 거의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고 그때그때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일상적인 선택을 하기 위해 자기가 쌓아 온 윤리 지식을 총동원하여 심사숙고와 반성을 하자면 그것 자체로 사람을 병적 양심의 상태인 세심증에 빠지게 한다.
우리가 중시하는 섬세하고도 기민한 양심은 세심과는 달리 어떤 행위의 윤리적 성격에 거의 자동반사적으로 주의를 기울여 그 행위가 갖는 윤리적 가치와 비가치에 생생하게 반응하여 즉시 선택과 포기가 결단되는 양심이다. 그 반대의 양심은 맹목적 양심이다. 윤리적 가치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양심이다. 물론 맹목이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고, 선이라는 기본적인 가치에 대해 전혀 눈을 감아 버리는 양심도 있고 또는 어떤 특정 덕목(순결, 소유권 존중, 생명 존중 등)에만 눈이 감겨진 양심도 있다. 가치에 대한 이런 무감각의 원인은 윤리적 가치를 무시하는 오만과 모든 계명을 자신에게만 너그러이 적용하는 자기 관용에 있다.
기민하고도 섬세한 양심은 양심이 성숙을 이루었을 때 더욱 확실하게 작용한다. 누구든지 어릴 때는 부모의 권위와 지시에 순종하면서(미숙한 양심)차츰 차츰 독자적 양심 판단을 하는 상태로 성장한다(성숙한 양심). 어른이 되어서도 처벌의 공포 때문에 법과 계명을 지킨다면 그는 미숙한 양심의 소유자이다. 그렇지 않고 윤리적 가치를 깨달아 인격적 책임감을 가지고 스스로 윤리적 판단을 하는 사람은 성숙한 양심(=당위적 양심)의 소유자이다.
평소에 성숙한 양심, 기민하고도 섬세한 양심을 가진 사람은 어떤 행위의 가부, 선택과 포기를 결정할 때 그가 지닌 양심 습관대로 재빠르고도 섬세하게 그 행위가 지닌 윤리적 가치와 비가치를 판단하지만 실은 그 판단에도 어떤 규칙이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즉, 그가 내리는 양심 판단, 그리고 그 판단대로 행한 행위는 양심 판단의 규칙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규칙이 바로 정당성(올바름)과 확실성이다. 즉 양심의 판단은 올바른 판단(선 악을 잘 구분함)이어야 하고 확실한 판단(선 또는 악임을 확신함)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 행위는 도둑질 이며 그것이 악이다} 라고 판단했으면 그것은 [올바른 판단]이고 {이 경우의 도둑질이 악일까 아닐까} 의심을 하지 않고 {그것은 확실히 도둑질이며 악} 이라고 확신을 했으며 그것은 [확실한 판단]인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섬세하고 기민하여 성숙한 양심의 소유자라 하더라도 확실한 판단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며 갈등을 겪는 경우들은 수없이 많다. 이런 경우의 양심을 의심하는 양심(회의적 양심)이라고 한다. 어떤 행위에 대해 그것이 선인지 악인지 또는 합법적인인지 아닌지, 그래서 그 행위를 해야 할지 포기해야 할지, 또는 해도 되는지 하면 안 되는지에 대해 확실히 결정하지 못하고(불확실성) 망설일 때 즉, 의심하는 양심의 상태에 머물러 있을 때는 그 의심이 해소되기 전까지는 행동으로 옮겨서는 안 된다.
의심이 생기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한 가지 행위가 두 가지 서로 모순 되는 결과를 동시에 낼 것이 예상될 때(예, 치료를 하여 어머니를 살리는 좋은 결과와 함께 태아가 죽는 나쁜 결과도 일어날 때), 두 가지 서로 상반되는 가치 중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몰렸을 때(예, 정의를 위해 살인? 위급한 두 중환자 중 누구를 먼저 치료? 등), 어떤 윤리 규범이 특정한 경우와 시점에서도 효력이 있는 지가 의심될 때(객관적 규범의 구체 상황에서의 효력 문제) 등이다.
노예제도가 사회의 기본구조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었을 때는 노예를 한 인격으로 대한다는 것은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다. 이런 시대에 어떤 선각자가 나타나 노예해방을 부르짖었다면 그는 그 사회의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구조 자체를 뿌리부터 파괴하려는 죄인으로 몰렸을 것임에 틀림없다.
심지어는 노예를 자신조차 해방을 거부했을 것이다. 당시의 경제 구조로 보아 주인집을 떠나서는 먹고 살기조차 막연했을 것이므로. 그래서 바울로 사도는 종은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기쁘게 주인을 섬기라고, 주인은 종들을 협박하지 말고 잘 대해 주라고 말했지 종을 해방시키라고 말한 적은 없다(에페 6,5~9). 바오로 뿐 아니라 예수님도, 그 외의 어느 사도도 노예해방 운동을 벌인 적은 없었다.
바오로 사도는 남편과 아내의 사이는 사랑과 순종의 관계라고 말하며 아내들에게 {주님께 순종하듯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라고 말했다(에페 5,21). 물론 바울로의 사상 전체를 살펴볼 때 그가 인간 평등사상을 지녔다는 것은 당대의 정신문화와 사고의 발전 단계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윤리적 성장의 법칙, 자연법의 역사성).
이러한 시대에 어떤 이가 노예제도의 죄성을 깨닫지 못했다 해서, 또는 남여 평등을 몰랐다고 해서 그의 양심을 인간 평등이라고 윤리 가치에 둔감한 맹목적 양심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남쪽의 전체 흑인 부족들 중 70%가 일부다처를 공인하고 있는 사회이다.
남녀평등을 극단적으로 거스르는 제도가 일부다처제라면 수많은 아프리카인들이 여성을 인격적으로 모욕하는 좌중에 살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지만 실상 그들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의 무지몽매를 즉각 일깨운답시고 일부일처를 열심히 권고, 실현시킨 서양 선교사가 있다면 그 남편들이 내보낸 수많은 아내들을 평생 먹여 살릴 수 있단 말인가? 그 이전에 그가 가장 파괴범으로 몰리지 않았다면 다행일 것이다.
우리는 지난주 연재에서 어떤 행위를 선택, 결단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행위가 참으로 윤리적인지 아닌지를 올바르게 도한 확실하게 판단(정당한 판단, 확실한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노예제도나 일부다처가 죄악 인줄 모르는 문화권의 한 개인처럼 자신의 개인적인 잘못이 없이 그릇된 판단과 행위 중에 사는 양심이 있을 수 있다. 이럴 경우의 양심을 극복 불가능한 오류적 양심이라고 말한다.
죄는 행위의 본질을 알 때 성립된다. 모르고 한 짓은 죄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모르는 것에도 종류가 있다. 위의 예처럼 타 문화권의 사람이 일깨워 주든지(문화 교류), 수많은 세월과 함께 그 문화 권내에서 스스로 깨닫든지(자력 성장), 또는 그 두 가지 모두가 동시에 이루어 져서 죄스런 관습을 벗어나기 이전에는 해방될 수 없는 무지도 있을 수 있고(불가항력적 무지), 한 개인의 직무상의 나태, 윤리 도덕적 생활에 대한 노력 부족, 윤리 가치에 대한 습관적인 주의 부족 등으로 오는 무지(가항력적 무지)도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양심의 상태도 불가항력적인 (극복 불가능한) 오류적 양심이 있다. 조금만 노력하면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상태에서 잘못된 행위를 했다면 그에 대해서는 윤리적 책임을 져야 한다. 의사가 새로운 의료 지식을 얻는데 게을러서(직무상 나태)환자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했다면 그는 극복 가능한 무지의 상태에서 행동했으므로 잘못을 범한 것이다.
잘못된 양심의 판단(가항력적 오류적 양심의 판단)은 자신의 판단이 누가, 어떤 상황에 있든 지켜야 하는 윤리 규범(객관적 윤리 규범)에 맞지 않게 이루어지는 경우를 두고 말한다. 어떤 이가 어떤 행위에 대해 양심의 판단을 할 경우에는 그 행위가 옳은 행동인지 아닌지 먼저 생각하게 된다(즉 윤리적 인식이 선행된다). 그런데 이 인식이 잘못 되었을 때 양심 판단은 그르치게 된다. {태아는 아직 세상에 나지 않았으므로 인간이 아니다} 라는 틀린 인식을 할 경우에는 {그러므로 낙태를 해도 된다는 그릇된 판단을 하게 되고 그 판단에 따라서 산부인과를 찾아가는 잘못된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잘못된 인식(무지)에 대한 책임이 위에서 말한 몇 가지 이유로 자신에게 있다면 그 책임의 정도에 따라서 죄성의 정도가 결정되는 것이다. 치료비도 못 낼 가난한 환자라고 해서 적당히 서둘러 진찰을 하여 오진을 일으키고 그 결과 환자가 죽었다면 가치에 관한 그 의사의 잘못된 양심 판단(물질주의)이 사람이 죽이는 무서운 결과를 일으켰으므로 그의 책임은 막중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하는 올바르지 못한 윤리적 판단(주로 악한 행위를 악하게 여기지 않는) 은 선, 가치에 대해 일부러 눈감아 버리는 습관을 형성하여 (맹목적 양심의 상태) 자신의 양심을 완전히 느슨한 상태(이완된 양심, las conscience)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일 수가 많다.
아무 근거 없이 (또는 충분치 못한 근거를 가지고) 큰 죄를 소죄로 여기거나 죄스런 사항을 죄로 여기지 않는 양심의 습관을 형성했을 때 그러한 양심에서 나오는 판단과 행위는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진리를 찾아 나서는 노력과 함께 어떤 양심 판도도 가장 안전한 노선에서 하는 습관을 형성하여 이완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이완된 양심은 극복이 가능한 오류적 양심일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스스로 노력하면 얼마든지 기민한 양심으로 변화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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