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윤리와 윤리 원칙 3.>
지금부터 20년 전, 미국 뉴저지의 퀸란양은 원인 모를 혼수상태에 빠졌다. 소위 식물인간 상태에서 그녀는 인공호흡 장치, 항생물질 투여, 고단위 영양 주입 등으로 겨우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되면서 그녀는 외관상 태아처럼 위축이 되고 회복의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으로 추측되었다.
그의 부모는 딸이 그러한 비참한 상태에서 비인간적 삶을 유지하기 보다는 [인간적 품위와 존엄성을 띤 죽음]을 맞이하여 하느님 품에 돌아가도록 주치의에게 인공호흡 장치를 제거하도록 부탁했다. 그러나 그 요청은 거부되었다. 왜냐하면 퀸란양의 뇌는 인간 고유의 기능(사고, 의사소통 등)은 정지되었으나 뇌 그 자체는 살아 있으며, 각종 순환 기능 또한 계속 활동하므로 그는 의학적으로는 살아 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며, 의사의 사명은 생명의 수호와 보존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후 퀸란의 아버지는 뉴저지 주 법원에서 여전히 불가 판결을 받자 연방 대법원에 상소하여 각종 생명 유지 장치 제거의 합법성을 인정받았다. 이 두 가지는 상반되는 판결은 그 후 심각한 윤리적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우리는 어떤 판결에 동의해야 할까?
우리는 지난 3주 동안 생명윤리 상의 여러 가지 윤리적 판단을 위한 이론적인 전제를 주로 양심의 형성, 올바르고 확실한 양심 판단에 대한 설명을 통하여 삶의 다른 모든 영역에서 올바르고 확실한 윤리적 판단은 우리들의 개인 내지 공동생활에 큰 영향을 끼친다. 그런데 위 퀸란양의 예처럼 생명과 관련된 윤리적 판단은 인간 생명과 직접적 관련을 맺는 사안이므로 다른 어떤 영역에서의 판단보다 중대하고 심각하다.(생명윤리상의 바르고 확실한 양심 판단을 얻기 위해서 이렇게 지루한 기초윤리상의 이론적 공부가 필요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치 지도자, 의료 종사자들이 인간 생명과 직접 관련된 결정에 있어서 조차 종합적, 전인적 시각에서가 아니라 눈앞의 물질주의적 복지에만 눈이 어두워 그릇된 복지 정책, 의료 정책, 개발주의적 사고를 펼치고 있는 모습이 안타깝다. 위 퀸란양에 대한 논쟁이 그토록 뜨거웠던 것은 그것이 단순한 의학적 논쟁이 아니고 인간, 인권, 가치관, 삶의 질, 인간적 삶의 의미, 생명보다 고차원적인 가치의 존재 문제, 인간다운 삶의 조건, 정의, 국가권의 의미와 한계 등 종합적, 전체적 인간 문제였고 철학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인간 생명의 관련된 윤리적 의무의 중대성과 책임성을 참으로 깨닫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선택과 결단이 필요한 경우마다 올바른(정당한) 판단을 하려고 애쓰게 마련이다. 그러나 자신의 판단이 확실히(확실성)올바른지(정당성)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을 경우는 수없이 많다.
그래서 우리는 양심 판단에 있어서 실천적 확실성을 얻는 직접적, 간접적 방법에 대하여 공부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실천적 확실성이란 사변적, 이론적 확실성에 반대되는 개념이다. 사변적, 이론적 의심이 생길 때에는 (예를 들면, {천주교에서는 불임수술을 금하는지 아니면 허락하고 있는지?}) 여러 가지 지식을 동원하여 사변적, 이론적 확실성에 도달할 수 있다 (예 : {본당신부에게 물어보니 천주교에서는 원칙적으로 불임수술을 금하고 있다더라. 왜냐하면 그것은 하느님이 주신 창조 능력을 인간이 제 마음대로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더라}.) 그런데 이론적으로는 확실히 알았으나 막상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행위의 실천 여부를 결정할 때 의심(즉, 실천적 의심)이 생길 수 있다({교회에서 불임수술을 금한다는 것을 이론적으로는 알았으나 과연 나와 같은 예외적 경우 <졸저 [삶의 윤리] 51-52참조>에도 꼭 그대로 실천해야 하는지?}). 이러한 의심이 극복된 경우 그것을 실천적 확실성이라 한다.
확실한 양심 판단을 위한 직접적 방법은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윤리 지식을 총동원하여 자신의 판단이 옳은지 아닌지에 대해 심사숙고를 거듭하는 것이다. 자신이 실행하려는 행위가 올바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심(불확실성)이 들면 체험과 교육으로 닦여진 자신의 윤리 지식을 동원하고 관련 계명, 법규정을 살펴보며 전문가의 조언을 구하는 등을 통하여 확실성에 도달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윤리 규범에 관한 개인의 지식에는 한계가 있고 공동체 안에서 그의 윤리적 의무는 수많은 다른 요인들과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실제로 이론만으로는 실천적 확실성에 이르지 못하는 수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 사변적, 이론적으로 의심이 풀리지 않았어도) 행동을 해야 할 경우는 인간 생활에 있어 얼마든지 많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럴 경우 확실성에 이르는 간접적 방법 또한 필요한 것이다. 즉 의심을 직접적으로, 사변적으로 풀 수 없을 경우에 실천적 확실성을 간접적으로나마 얻어 보려는 시도를 해봐야 하는 것이다.
의심을 직접적으로 (이론적으로, 사변적으로, 윤리 규범에 관한 지식만으로) 풀 수 없어서 간접적 방법에만 의존하는 것은 여러 종류의 반성 원리에 의존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반성 원리들을 활용하여 실천적 확실성을 간접적으로 나마 얻을 수 있는 경우는 많다. 즉, 가치들의 갈등과 경쟁 때문에 판단의 확실성이 부족할 경우 인간 생활의 일반적인 경험과 관찰을 통하여 어느 정도 공식화된 윤리 원칙들을 적용함으로써 의심을 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원리들에게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생명윤리와 윤리 원칙 4.>
우리는, 반성 원리란 의심을 직접적으로, 이론적으로 풀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장 행동해야 할 경우 의심을 풀고 실천적 확실성을 얻어 보려는 간접적인 방법이라고 말했다.
즉, 어떤 행위를 하려고 하는데 그것을 금하는 법이 있는지 의문이 생길 때(=법적 의심), 어떤 사실이 있는지 (했는지), 없는지 (하지 않았는지)의문이 생길 때(=사실에 대한 의심) 그 의심을 이론적으로 풀지 못하고도 행동을 해야 할(결정을 내려야 할) 경우 반성의 원칙을 동원하는 것이다.
반성의 원칙에 있어 다른 모든 원칙들을 포괄하는 원칙은 [추정의 원칙]이다. {의심스러울 때는 추정되는 쪽을 택하라} 것이다. 즉, 의심이 생길 경우 스스로 생각하여 옳은 것으로 추정되는 것(즉, 확신이 없더라도) 을 택하고 옳지 않다고 추정되는 것을 피하면 된다는 말이다. 스스로 추정되는 쪽을 택하는 것은 자신의 권리이므로 그 자신의 추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객관적으로 증명되기 전까지는 자신의 결정을 고수 할 수 있다.
이 추정의 원칙 안에는 여러 가지 행동 규칙들이 있다. 예를 들면 {증명되지 않는 소유권(물건, 권리) 분쟁시 현재의 점유자를 우선 시켜라} : {피고의 범죄 유무가 의심스러울 때 유죄가 증명되기 전까지는 피고에게 유리하게 해석해야 한다} : {어떤 행위의 유효성에 의문이 생길 때에는 유효한 쪽으로(추정) 해석하라} : {의심스러울 때는 자신에게 유리한 것
은 확대 해석하고 불리한 것은 축소 해석 할 수 있다} : {보통으로(일상적으로) 일어나던 일은 특별한 의심이 발생한 경우에도 평상시와 마찬 가지로 일어난 일로 판단하라} (즉, 추정은 관례적, 정례적, 통례적인 것에 더욱 비중을 두라) : {공동선과 개인선이 충돌할 때 공동선을 우선 시켜라} : {의심스러운 법과 사실은 의무를 지우지 않는다} 등이다.
법의 존재가 의심스러울 때는 물론 그 법이 부과하는 의무에 얽매이지 않지만 자기 혼자서 그 법의 존재를 의심스러워 할 경우가 아니고 모든 사람이 의문을 가질 경우이다.
아기가 없어서 체외수정(시험관 아기) 및 대리모를 생각하고 있는 부부가 {체외수정을 금지하는 법은 없을 거야} 라고 추정했다면 그것은 틀린 추정이다.
스스로의 무지에서 비롯된 잘못된(정당성이 없는)판단일 뿐 아니라 그 부부만(즉, 특정인만)법의 존재를 의심스러워 한 것이기 때문이다. 체외수정은 수정란들의 낙태를 일으키므로 낙태죄를 범하는 일이란 것을 아는 이들은 교회법의 낙태 금지법의 존재에 의문을 가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해 치료를 하였으나 환자가 죽었을 때 그 환자의 사망은 의사의 실수가 확실히 증명되기 전까지는 통례적인 결과로 돌려질 수 있으며 따라서 의사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통례적인 일은 특별한 의심이 있더라도 통례적인 일로 추정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실에 대한 의심}이 타인의 영혼, 육신에 중대한 손해를 끼칠 위험이 있다면 추정의 기준을 완전한 애덕의 실천에 두어야 한다.
즉, 자신의 추정이 타인이나 공동체에 해를 끼치지 않는 안전한 길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의사는 언제나 더욱 확실하고 안전한 치료번을 사용해야 할 의무가 있다. 수술 후 수술 칼이 하나 없어졌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 의사가 혹시 그 칼을 환자의 뱃속에 그냥 둔 채로 봉합을 하지 않았나 의심이 들 때는, 사실로 드러날 경우 자신의 명예에 흠집이 가고 경제적 손해를 입더라도, 가장 안전한 방도 즉, 환자를 다시 불러 재검사를 해 봐야 한다. 의사는 환자에게 치유 효과도 있지만 중대한 해악을 끼칠 수도 있으리라 의심이 가는 약품을 실험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 물론 그 약을 투여하지 않더라도 이미 죽음이 확실한 환자에게 최후로 그 약품의 치유 효과를 기대하면서 사용하는 경우는 예외가 된다.
생명윤리에 있어서의 사실에 대한 의심은 다른 어느 영역에서 보다 가장 안전한 방도를 택함으로써 그 의심에서 확실하게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어떤 행동(특히 인간 생명과 관련된)의 합법성, 정당성에 대하여 실천적 의심이 생기면 그 의심이 확실히 해소될 때 까지는 그 행동을 하지 않고 미루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도이다. 그러나 행동을 미룰 수 없는 막다른 상황에서 두 가지 악한 행위 중하나를 선택해야 할 경우에는 어떤 게 해야 하는가.
예를 들면 또 다시 임신할 경우 정신이상이 올 것이 확실한데 가톨릭 의사는 불임수술을 거절해야 할 것인가?
이럴 경우 행위자는 작은 악을 선택할 수 있다(=[작은 악의 원칙]).
작은 악마저 피하려는 윤리적 안전 주의에만 매달려 있을 때 더 큰 악을 초래하고 선의 실천을 회피하는 결과를 빚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것이 더 작은 악인지도 구분하기 힘들 때는 행위자가 마음대로 작은 악이라고 추정되는 행위를 택할 수 있다. 그는 자신에게 닥친 강제적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다른 상황을 보자. 두 가지 이상의 윤리적 의무를 동시에 수행해야 할 경우, 그리고 그 임무의 비중이 비슷하다고 판단될 경우에는 신법과 자연법의 의무를 실정법(국가법, 교회법)의 의무보다 우선 시켜야 한다.
주일에 환자를 치료해야 하는 가톨릭 의사나 간호사는 자리를 비울 수 없을 경우, 주일미사에 참여해야 한다는 교회 법적 의무보다 생명의 존중이라는 자연법적 의무에 따라야 하고 따라서 주일미사 불참을 고해할 필요가 전혀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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