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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교회미술산책

[현대 그리스도교 미술 산책] (6) 윌리엄 홀먼 헌트의 ‘속죄 염소

by 파스칼바이런 2014. 4. 29.

[현대 그리스도교 미술 산책] (6) 윌리엄 홀먼 헌트의 ‘속죄 염소

(The Scapegoat)’

 

 

번제물로 내몰린 염소 … 십자가 위 예수 닮아

외로움의 감정 묘사 생생 … 붉은 리본은 가시관 상징

사진 보는 듯한 정밀한 표현 강렬한 색채 사용 특징

“세상 속 하느님의 시각적 상징 풀기, 예술가 임무”

 

 

▲ 윌리엄 홀먼 헌트, 속죄염소(The Scapegoat), 1856, 맨체스터 미술관, 영국.

 

 

윌리엄 홀먼 헌트(William Holman Hunt, 1827~1910)는 ‘라파엘전파(the Pre-Raphaelite Brotherhood)’라는 예술운동을 이끌어나간 영국화가이다. 1848년 결성된 라파엘전파는 헌트와 로제티, 그리고 밀레이가 주축이 되었는데, 화가이자 뛰어난 시인이기도 했던 이들은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1483~1520) 시대 이전의 미술을 부활시킴으로써 당시 영국의 미술을 개혁하고자 했다. 라파엘로를 거부한 그들의 목적은, 전성기 르네상스의 미술을 모방하는데 급급하던 당시 영국 미술계의 전통을 넘어서려는 것이었고, 고전적이고 이상화된 세계를 그려내기 위해 사용하던 인위적 조작과 기교를 극복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회화의 전통적이고 엄격한 규칙, 기법과 양식을 버리고 자연을 직접 관찰해 생동감 있는 그림을 그리려 노력했으며, 꾸밈없는 순수한 분위기를 표현하는데 주력했다. 특히 헌트의 작품은 사진을 보는듯한 정밀한 묘사, 선명하고 강렬한 색채, 그리고 뚜렷한 명암의 사용으로 인해 매우 생생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헌트의 작품이 갖는 의의는 이러한 기법상의 독특함보다는, 동시대 미술의 사상적 천박함과 영적 빈곤함에 반발하여 그리스도교적 진리를 담은 회화를 열정적으로 추구했다는데 있다. 매우 종교적이었던 헌트는 존 러스킨(John Ruskin)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이 세상에 가득 찬 하느님의 시각적 상징을 풀어내는 것이 예술가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특히 그가 남긴 작품들은 시적 상징과 깊은 개인적 성찰을 함축하고 있어, 한 번 보면 쉽사리 잊히지 않는 긴 여운을 남긴다.

 

<속죄염소(The Scapegoat, 1854~1856, Lady Lever Art Gallery, Port Sunlight)>는 독특한 제목만큼이나 흥미로운 작품이다. 헌트는 사실주의적 제작기법에 따라, 뾰족한 뿔이며 길쭉한 귀, 그리고 갈라진 발굽은 물론 몸통의 섬세한 털까지도 정성껏 그렸다. 그런데 세밀하고 정교한 기법에 감탄하며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다보면,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 염소는 왜 이렇게 힘이 없어 보이는 것일까. 뒷다리로 간신히 버티고는 있지만, 비틀거리다가 이내 앞으로 쓰러질 것만 같다. 게다가 죽은 동물의 앙상한 뼈가 뒹구는 황량한 공간에 이 염소만 홀로 남게 된 이유는 또 무엇일까. 비록 동물이지만 외로움과 절망의 감정이 느껴진다. 제목 역시 심상치 않다. ‘속죄염소’라니? ‘희생양’이라는 말은 가끔 들어봤어도 ‘속죄염소’라는 말은 무척이나 생소하게 들린다. 작가는 무엇을 표현하려 한 것일까?

 

헌트는 신앙심을 승화시킨 작품을 진지하게 제작하려는 의도로, 1854년에 팔레스타인 지역의 성지를 방문하는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는 땅의 생김새와 사람들의 옷차림 등을 자세히 관찰했고, 손으로 만질 수 있을 정도로 실감나는 그림을 그려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과 가르침을 생생하게 표현하고자 했는데, 이 때 그린 그림 중 하나가 바로 <속죄염소>이다.

 

이 그림의 의미는 유다교의 속죄일과 관련하여 드러난다. ‘욤 키푸르’라고 부르는 속죄의 날이 되면 대사제는 염소 한 마리를 광야로 내모는데, 이유는 그 염소가 백성의 모든 잘못과 죄를 대신해서 죽음으로써 유다 공동체가 정화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레위 16,20-22). 헌트는 이 작품에서, 속죄일에 사람들을 위해 죽음으로 내몰린 염소를 보여주는데, 그림의 사실성을 높이기 위해 이스라엘의 사해 근처, 실제 장소인 에돔(Edom)을 배경으로 삼았다. 그런데 속죄염소가 유다인들만의 관습은 아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짐승뿐 아니라 인간도 속죄 제물로 바쳤고, 이를 통해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닥칠 재난으로부터 안전해질 수 있음을 믿었다고 한다. 한편 초기 로마법에 의하면 무죄한 사람이 죄인을 위해 대신 벌을 받을 수 있었는데, 이러한 사상은 그리스도교에서도 발견된다.

 

헌트가 그린 <속죄염소>는 고난 받는 야훼의 종(이사 52,53)의 모습이며,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또 다른 모습이다. 이를 반증하듯, 작가는 그리스도의 가시관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붉은 리본을 염소의 뿔에 그려 넣었다. 사순시기를 보내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에 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조수정 교수는 프랑스 파리1대학에서 미술사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