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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덕원의순교자들

[덕원의 순교자들] (02)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

by 파스칼바이런 2014. 5. 2.

[덕원의 순교자들] (2)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

이땅에 발 디딘 첫 번째 수도자, 북녘 복음화 초석 쌓아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

(아파아리아 명의 주교, 덕원 자치수도원구장 겸 함흥 대목구장)

 

▲출생 : 1877년 1월 10일 독일 풀다교구 오버루프하우젠

▲첫서원 : 1900년 2월

▲사제수품: 1903년 7월 26일

▲한국파견: 1909년 1월 11일

▲아빠스 축복: 1913년 6월 8일

▲원산 대목구장 임명: 1920년 8월 25일

▲주교 수품: 1921년 5월1일

▲덕원 자치수도원구장 겸 함흥 대목구장: 1940년 1월 12일

▲체포 일자 및 장소 : 1949년 5월 9일 덕원 수도원

▲순교 일자 및 장소 : 1950년 2월 7일 평양 인민교화소

 

 

보니파시오(요셉) 사우어(Bonifatius Sauer) 주교 아빠스.

 

보니파시오는 수도명이고, 요셉은 세례명이다. 한국명은 신상원(辛上院). 굳이 우리말로 뜻풀이하자면 '고생해 지은 첫째 집(수도원)'이라 하겠다. 이 이름처럼 사우어 주교 이름 앞에는 늘 '첫째'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그는 한국에 발을 디딘 첫 번째 수도자이자 이 땅에 가톨릭 수도원을 처음으로 설립한 수도자이며, 성 베네딕도회 백동 수도원 초대 수도원장, 초대 아빠스, 초대 원산교구장, 초대 덕원 자치수도원구장, 초대 함흥교구장이다.

 

1877년 독일 헤센주 풀다교구 오버루프하우젠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898년 독일 성 베네딕도회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 1900년 2월 첫 서원을 했고, 1903년 3월 21일 종신서원을 한 후 그해 7월 26일 사제품을 받았다. 수품 후 독일 딜링겐에 있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부속 성 보니파시오 신학원 원장으로 임명돼 신학생들의 생활과 영성 담당 신부로 활동했다.

 

1908년 9월 15일 서울교구장 뮈텔 주교가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을 직접 방문, 교육사업을 전개할 선교 수도자 파견을 간청하자, 사우어 신부는 도미니코 엔쇼프 신부와 함께 한국 진출 책임자로 임명돼 이듬해인 1909년 2월 25일 서울에 도착했다. 그는 곧바로 서울 동소문 바로 앞에 있는 백동(현 혜화동) 낙산(현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땅 3만 평을 사들여 수도원 건립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성 베네딕토의 규칙에 따라 사는 수도 생활을 소개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선교'라는 생각했다. 그래서 상트 오틸리엔에 수도자 파견을 요청할 때도 다음과 같이 당당하게 말했다.

 

"한국에 파견할 이들은 무엇보다 참으로 훌륭한 수도자여야 합니다. 이곳에 우리 거룩한 수도회를 이식하고자 하며 조만간 한국인 중에서 사제뿐 아니라 수도 성소를 받는 사람들이 나오리라 희망합니다. 이 미래의 동료 수도자들에게 유럽에서 오는 수도자들이 본보기가 돼야 합니다."

 

"유럽인들이 없더라도 젊은 한국인 수도자들이 성 베네딕도 수도회 생활을 독자적으로 영위해 나갈 수 있게 만드는 일이 정말 중요합니다."

 

백동에 임시 수도원 건물이 완공되고 1910년 1월 8일 성 베네딕도회 서울 수도원이 자립 수도원으로 승격돼 사우어 신부가 초대 원장으로 임명되자 이 수도원에선 전 세계 어떤 베네딕도회 수도원보다 엄격한 수도승 일과가 시작됐다. 이 모습을 본 서울교구장 뮈텔 주교는 "참으로 위대한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 하나가 작은 본당 백 개보다 이 땅의 복음화에 더 큰 의미를 지닌다"고 감탄했다.

 

 

▲ 1938년 3월21일 원산 대목구 첫 사제들과 덕원수도원 첫 부제들이 원산대목구장이자 덕원수도원장인 사우어 주교 아빠스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우어 신부는 수도회의 한국 진출 목적이 교육 사도직에 있음을 살펴 백동 수도원에 1910년 실업 교육을 위한 4년제 숭공학교를, 1911년에는 2년제 사범학교인 숭신학교를 설립했다. 그러나 이 두 학교는 한국을 강점하고 있던 일본의 조선총독부의 방해로 그가 1913년 6월 8일 아빠스로 임명돼 축복식을 하기 위해 독일로 간 사이 폐교됐다.

 

이때 그는 "앞으로 나아가야 할지 뒤로 돌아가야 할지 전혀 알 수 없는 그런 날들이 오더라도, 그날들이 몇 주, 몇 달, 아니 몇년이 될지라도 저는 낙담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밝히며 국권 침탈 이래 한국의 정치적, 사회적 형세 변화에 맞는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역할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사우어 아빠스는 수도원이 한국인들 삶의 자리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자각하고, 수도원을 신앙 중심지로 두고 1만여 명 가톨릭 신자들이 함께 공동체를 이뤄 생활하는 자치수도원구를 구상했다. "신자들이 외교인 사이에서 흩어져 사는 것보다 이것이 훨씬 더 효율적이다"고 믿었다.

 

그의 꿈은 1920년 성 베네딕도회 서울 수도원이 갓 설정된 원산대목구의 사목권을 위임받고 그가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돼 1921년 주교품을 받으면서 점차 실현되기 시작했다. 그는 1922년 한국인 첫 수련자를 배출했고, 1923년 원산 인근 덕원으로 아빠스좌 수도원을 옮겨 이 수도원이 진정한 선교 중심지가 되도록 애써 꾸며가기 시작했다. 교황청 포교성성은 1938년 원산대목구를 함흥대목구와 덕원자치수도원구로 나눴다. 계속 덕원에서 담당할 함흥대목구는 한국인 교구 사제들이 배속됐고, 수도원은 한국인 베네딕도회원들의 몫이 됐다. 20년 세월 동안 사우어 주교 아빠스의 관할 구역에는 24개 본당이 신설됐고, 거의 모든 본당에는 정부 인가 보통학교가 세워져 운영됐다. 사우어 주교의 선교 이상이 눈에 보이는 유토피아로 현실화되는 장면이다.

 

사우어 아빠스는 '신자들에게 개방되지 않은 수도원 성당은 무의미하다'고 여겼다. 또 가장 효과적인 선교 수단은 '장엄한 전례'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1930년대 초부터 대담한 전례 쇄신을 감행했다. 그는 「라틴어-한국어 미사경본」과 「교리문답서」 개정본을 인쇄해 한국 전역으로 보급했다.

 

그는 겸손한 수도자였다. 올라보 그라프 신부는 "그분은 신분에 맞게 행동할 필요가 없거나 사람들이 당신을 알지 못하는 곳에서는 기꺼이 평범한 수도자로 머물렀다"고 증언했다. 또 황춘흥 신부와 노규채 신부는 "사우어 주교 아빠스는 수련자들을 따로 불러 그들을 손자처럼 여긴다고 말해줬고, 수도원 역사를 가르칠 때는 한국말로 하려고 애쓰셨다"고 회상했다.

 

성 베네딕도회원들의 성공적인 선교 사도직과 수도생활은 일본이 패망하고 공산당이 집권하면서 갑자기 중단됐다. 1949년 5월 9일과 10일 사이의 밤에 북한 공산당 정치보위부원들이 수도원에 난입해 모든 독일인 수도자들과 한국인 사제들을 체포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원산 교도소에, 나중에는 평양 인민 교화소로 이송됐다. 허울뿐인 재판을 통해 수도자들은 '반공산당을 위한 태업'이라는 죄목을 뒤집어쓰고 유죄 판결을 받았다.

 

사우어 주교 아빠스는 심한 천식을 앓고 있었는데, 독방에 감금돼 반년 이상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다. 그것이 그를 단기간에 죽음으로 몰고 갔다.

 

사우어 주교 아빠스는 난방도 안 되는 2㎡ 남짓한 독방에 수감됐다. 설비라고는 변기통 하나뿐이었다. 수도복과 주교 십자가는 압수되고 대신 푸른 죄수복을 입었다. 11월 날이 추워져 사우어 주교 아빠스의 천식이 심해지자 교화소 측은 그레고르 기게리히 수사를 함께 가뒀다. 기게리히 수사는 침대도 이불도 없이 맨바닥에 누워 허물어져 가는 아빠스를 속절없이 지켜봐야 했다. 사우어 주교 아빠스는 "몸을 움직이기만 하면 아파서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누워만 있어서 생긴 욕창이 몹시 쑤십니다." "나를 집으로 보내 주시오!"라고 힘없이 말하다가 혼절하곤 했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그는 사흘 동안 의식을 잃었다가 1950년 2월 7일 아침 6시 선종했다. 옆 감방에 갇힌 동료 수도자들은 그의 선종 소식을 나중에 들었다. 몇 주 후 임근삼(콘라도) 수사와 김안나(데레사) 수녀, 장 안토니오 수사가 평양 근교 용산리 공동묘지 내 '계몽 교육 특별 연구소'로 지정된 곳에 묻혀 있는 그의 시신을 찾아냈다. 그의 빨간 주교 양말을 보고.

 

"낮에는 형무관이나 보위부원들이 병사했거나 총살당한 죄수들을 묻기 위해 자주 드나들었으므로 들킬 위험이 있었다. 우리는 야음을 이용했다. 교화소 의사들인 노재경 선생과 이 선생의 증언으로 장소를 대충 알고 있었으나, 새로 쓴 무덤이 많고 무덤에 아무 표시도 없어서 찾기가 어려웠다. 깊은 밤중 드문드문 서 있는 소나무 사이로 스쳐 가는 초봄 바람에 몸은 한없이 떨리고, 삽질 소리에도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삽질에 숨이 찼고 가슴이 뛰며 식은땀이 온몸을 적셨다.… 세 번째 무덤을 팠을 때,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께서 잡혀 갈 때 신었던 붉은 양말을 보았다. 얼굴을 알아보기는 어려웠지만, 수염과 인자한 모습이 영락없는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였다"(임근삼 수사 증언).

 

리길재기자 teotokos@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