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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덕원의순교자들

[덕원의 순교자들] (03) 김치호 베네딕토 신부

by 파스칼바이런 2014. 5. 3.

[덕원의 순교자들] (3) 김치호 베네딕토 신부

기대와 사랑 한몸에 받았던 한국인 성직 수도자의 맏배

 

 

김치호(베네딕토) 신부 (한국인 최초 성직 수도자)

 

▲출생 : 1914년 3월 31일 경기 파주 갈곡리

▲세례명 : 아우구스티노

▲첫서원 : 1939년 4월 10일

▲사제수품 : 1942년 5월 1일

▲소임 : 덕원본당 보좌, 수련장 보좌, 덕원본당 주임

▲체포 일자 및 장소 : 1949년 5월 11일 덕원 수도원

▲순교 일자 및 장소 : 1950년 10월 5일 평양 인민교화소

 

 

사람이든 사물이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가운데 맏배는 참으로 특별하다.

 

덕원의 순교자 하느님의 종 김치호(베네딕토) 신부는 한국인 첫 성직 수도자로 상트 오틸리엔 성베네딕도 수도회 소속 모든 수도자로부터 기대와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김치호 신부는 유명한 교우촌인 경기도 파주 갈곡리에서 1914년 3월 31일 태어났다.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 그의 부모는 구교우였다. 어머니는 병인박해 시기에 당신 어머니 등에 업혀 감옥에 갇혀 있었다고 자랑하곤 했다. 아버지와 형은 옹기장이였다. 옹기 만드는 일은 당시 많은 가톨릭 신자들의 생업이였다. 박해시기에 산속으로 피해 들어가 옹기 만드는 기술을 배워 생계를 이었기 때문이다.

 

김치호 신부는 1926년 열두 살에 루드비히 피셔 수사의 제화공 도제로 서울 백동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에 입회했다. 당시 한국인 입회자들은 엄격한 수도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수도회를 많이 떠났다. "한국인은 우리 수도원 생활을 혹독하다고 여긴다. 매일같이 새벽 4시 반에 일어나는 것은 그들에게 일종의 희생이다. 기도와 낮 동안의 노동 그리고 점심과 저녁 때의 짧은 휴식도 그들에게는 엄청난 부담이다. 이런 생활을 잠시 또는 얼마간 경험해 보고는 결국 많은 이가 떠나가 버렸다"(루치우스 로트 원장 신부, 1937년 「덕원연대기」 중에서). 하지만 김치호 지원자는 수도 규칙과 수도원 생활에 잘 적응해 아주 유능한 구두장이가 됐고 흠잡을 데 없는 구두를 만들어 냈다.

 

1927년 12월 1일 성 베네딕도회 서울 수도원이 덕원으로 완전히 이전한 다음, 그의 총명함과 원의가 고려돼 김치호는 진로를 바꿔서 신학교 준비반 과정을 시작했다. 1929년부터는 중등과정(초급반 5년, 고급반 2년)을 시작했고, 1936년 말에는 2년간의 철학 과정을 시작해 1938년 봄에 마쳤다. "현재 신학교 철학 과정 학생 중에 실습생 출신이 한 명 있다. 그는 지원자로 시작해 신학교로 옮겨 와서도 늘 자기 반에서 독일인 신학생들에게 뒤처지지 않는 가장 뛰어난 학생이다. 구두 짓는 솜씨도 여전한 데다가 음악적 재능도 지니고 있어 바이올린, 피아노, 오르간, 트럼펫 연주도 잘하고 철학적ㆍ자주적으로 사유할 수 있으니 유명한 사제가 될 전망이 밝다"(1937년 「덕원연대기」 중에서).

 

김치호는 1938년 4월 9일 성 베네딕도회가 한국에 진출한 지 25년 만에 처음으로 성직 수사 지망 수련자로 선발돼 사부 성 베네딕토의 이름을 수도명으로 받고 법정 수련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 예수 부활 대축일 후 월요일인 1939년 4월 10일 첫 서원을 했다. 그는 첫 서원 후 즉시 신학 과정을 시작해 1942년 5월 1일 덕원 수도원 성당에서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 주례로 사제품을 받았다.

 

 

 

▲ 덕원 신학교 교수 신부들과 김치호(앞줄 왼쪽 교복차림 첫 번째)를 비롯한

신학생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 김치호 신부가 누나 김 마리아나 수녀(1950년 10월17일 피살)와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한국인 첫 수도자 사제 탄생은 언젠가는 그와 그의 뒤를 이을 한국인 사제들이 유럽인 신부들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수도회 운명을 결정하리라는 희망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덕원의 독일인 수도자들은 김치호 신부를 '수도원의 황태자'로 부르며 특별 대우를 해줬다. 신부들은 수도원 식당과 회의실에서 평수사들 둘레의 돋은 자리에 앉았다. 이것은 종신서원 후에나 이뤄지는 '승급'이었다. 하지만 김 신부는 예외였다. 덕원 수도자들은 수련자 시절부터 그를 돋은 자리에 앉혔다. 독일인 수도자들이 김 신부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김 신부는 라틴어뿐 아니라 독일어를 완벽하게 구사해 독일인 수도자의 한국말 선생 역할을 했다.

 

김 신부는 1942년 6월 덕원본당 보좌로 부임해 본당 사목과 한국인 수련자 지도를 도왔다. 그는 아주 훌륭한 강론가로서 청년 사목을 담당했다. 시와 수필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젊은 독일인 선교사들의 한국어 강론 준비(번역과 윤문)에 많은 도움을 줬다. 그리고 1944년 덕원 수도원 수련장 보좌로 임명됐고, 1945년에는 덕원본당 주임으로 사목했다.

 

건강을 돌보지 않고 사목 활동에 헌신하던 김 신부는 1946년 1월 폐병으로 쓰러졌다. "그는 사제가 되고 몇 년간 너무 많은 일을 했습니다. 다시 일할 수 있으려면 아마도 1~2년은 쉬어야 할 것입니다. 날마다 미사를 집전하는 것 말고는 아무 일도 못합니다. 그가 언제 다시 일하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1947년 「덕원연대기」 중에서).

 

1949년 5월 11일 밤 북한의 공산당 정치보위부원들이 덕원 수도원에 들이닥쳐 모든 독일인 선교사뿐 아니라 한국인 김치호ㆍ김종수(베르나르도)ㆍ김이식ㆍ최병권(마티아) 신부 등을 체포해 평양 인민교화소로 압송했다.

 

"밤 12시 30분에 또다시 종소리가 수도자들을 잠에서 깨웠다.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 등이 체포된 지 이틀 후였다. 필요한 짐을 이미 꾸려 뒀던 수도자들이 마음을 단단히 먹고 현관 앞에 모였다. 정치보위부 요원들이 책상 앞에 다리를 벌리고 앉았다. 누군가 수도자 명단을 가지고 있었다. 부원장 신부부터 시작해 수도자 전부를 하나하나 불러내어 한 줄로 정렬시켰다. 독일인 신부와 수사, 한국인 신부들이 차례로 트럭에 올랐다. 결핵을 앓고 있던 김치호 신부는 폐가 한쪽밖에 없었다. 그때까지 자기 방에 누워 있던 그가 빠진 것을 알아차린 정치보위부 요원들이 그의 방으로 안내하라고 했다. 그러고는 잠들어 있는 사람을 총으로 찔러 깨웠다. 그렇게 신부가 모두 사라지고 수도원은 고아원이 돼 버렸다"(김삼도 마인라도 수사 증언 중에서).

 

평양 인민교화소에서 김치호 신부는 8㎡ 면적의 습기 찬 좁은 감방에 동료 18명과 함께 갇혔다. "김베네딕토 신부는 폐병을 앓고 있었다. 그는 탁한 공기 속에서 거의 숨을 쉬지 못했다. 그는 호흡 곤란으로 인해 밤중에는 발작적으로 코를 골아 우리는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가련한 형제를 깨울 수가 없었다. 이 비좁은 공간에서의 공동생활에서는 전염의 위험성이 아주 높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폐렴 환자가 어디 다른 격리된 공간으로 옮겨질 수 있도록 해달라고 계속해서 부탁했다. 그러나 그런 조치는 내려지지 않았다”(「북한에서의 시련」 중에서).

 

1950년 10월 5일 북한 인민군들이 평양 인민교화소를 말끔히 비우고 북쪽으로 후퇴할 때, 김치호 신부는 폐병으로 각혈이 심한 상태였다. 인민군은 그를 다른 수도자들과 함께 후송하지 않고, 각목으로 때려 죽였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