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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덕원의순교자들

[덕원의 순교자들] (05) 카누트 (베네딕토) 다베르나스 신부

by 파스칼바이런 2014. 5. 5.

[덕원의 순교자들] (5) 카누트 (베네딕토) 다베르나스 신부

백작 아들, 모든 것 하느님께 바친 열정적 사제로

 

 

카누트 다베르나스 신부(Canut Graf des Enffans d'Avernas)

▲ 그림=김형주(이멜다)

 

▲출생 : 1884년 3월 11일, 오스트리아 쉬름도르프

▲세례명 : 베네딕토

▲첫서원 : 1912년 7월 28일

▲사제수품 : 1914년 8월 13일

▲종신서원 : 1915년 8월 27일

▲한국 파견 : 1921년 1월 16일

▲소임 : 원산대목구 내평ㆍ고산본당 주임

▲체포 일자 및 장소 : 1949년 5월 11일, 덕원수도원  

▲선종 일자 및 장소: 1950년 11월 6일, 만포수용소

 

 

"누가 백작 아들의 그런 최후를 예상했겠습니까? 그보다 먼저 간 여섯 분 중 누구도 그렇게 참혹하게 죽지는 않았습니다."

 

"수도생활 내내 가난을 사랑하셨던 카누트 신부님은 죽을 때도 온전히 가난하게 돌아가실 수 있었습니다. 그분 시신은 대충 자루에 싸여 한국인 피랍자들이 들고 갔습니다."

 

카누트 다베르나스 신부의 임종을 지켜본 제르트루다 링크ㆍ디오메데스 메페르트ㆍ아르사시아 아이그너 수녀들의 증언이다.

 

카누트 다베르나스 신부는 1884년 3월 11일 오스트리아 그라츠-세카우 교구 쉬름도르프에서 태어났다. 쉬름도르프는 현재 슬로베니아 무르스카 소보타 교구 아프체이다. 그의 아버지는 신성로마제국 마지막 황제인 프란츠 2세로부터 1805년 작위를 받은 하인리히 엉팡 다베르나스 백작이고, 어머니는 안나 플라이다. 세례명은 베네딕토, 한국명은 나국재(羅國宰)다.

 

성경에 나오는 부자 청년은 자기 재산을 버리지 못해 예수의 제자가 되길 포기했지만 카누트 다베르나스는 성 프란치스코처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거적 한 장에 싸여 묻힌 그리스도의 참 제자다.  

 

 

▲ 고산성당에서 카누트 다베르나스 신부와 전교회장이 사목 문제를 협의하고 있다.

 

 

▲ 1932년 덕원 신학교 축제 때 악단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다베르나스 신부(오른쪽 두 번째).

  

# 삼형제 신부

 

그는 티롤 황제 사냥대 소위로 인스부르크대학 법학과 3학기를 다니던 1906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 청원서를 냈다. 그리고 내적으로 수도생활을 잘 준비했던 펠트키르크의 군 생활을 마치고 1911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했다. 그는 청원기를 거쳐 덴마크 임금으로 성인품에 오른 '카누트'를 수도명으로 받고 수련기를 시작, 1912년 7월 28일 유기서원을 했다. 이어 뮌헨대학에서 철학과 신학 공부를 마친 후 1914년 8월 13일 사제품을 받은 그는 이듬해 1915년 8월 27일에 종신서원을 한 후 1921년 1월 16일 한국 선교사로 파견됐다.

 

카누트 신부의 두 형제도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었다. 형 레오폴드 다베르나스 신부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회 소속으로 그보다 먼저 한국에 와 덕원수도원 부원장 겸 덕원본당 주임 신부로 사목하다 1944년 12월 20일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다. 또 그의 동생 하인리히 다베르나스 신부는 세카우 수도원에 입회해 1952년 브라질의 한 보이론 연합회 수도원에서 선종했다.

 

# 영하 30℃에도 난방 안 되는 사제관에서

 

1921년 4월 9일 빈첸시오 슈스터ㆍ마르코 바잉거 신부와 함께 서울에 도착한 다베르나스 신부는 한국말을 채 배우기도 전인 그해 6월 13일 압록강 건너 간도 지역 한국인 본당을 인수하러 가는 선발팀에 소속돼 연길로 갔다. 그는 이질에 걸려 1923년 봄 서울 수도원으로 후송되기 전까지 삼원봉과 팔도구 성당에서 사목했다. 그는 영하 30℃가 넘는 날씨에도 난방이 안 되는 사제관과 창호지가 찢어지고 무너질 듯한 삼원봉성당에서 1921년 겨울을 나야 했다. 하지만 그는 새벽 미사부터 밤 10시까지 고해소에서 고해성사를 줄 만큼 열정적으로 사목했다.

 

"미사 중에 성작 속의 얼음을 세 번이나 녹여야 했습니다. 위만 살짝 언 것이 아니라 정말로 성작 밑바닥까지 꽁꽁 얼었습니다. 미사 경본대 옆에 있는 촛불로 얼음은 쉽게 녹였지만, 미사의 경건함은 반감됐습니다. 손가락이 얼얼해 미사 내내 신경이 쓰였습니다"(다베르나스 신부 보고서 중에서).

 

수도원에서 건강을 회복한 다베르나스 신부는 1923년 10월 내평 선교기지 책임자로 부임했다. 1930년 그는 옹색하고 외딴 마을에 신자라고는 열다섯 가구밖에 없는 내평을 떠나 인근 소읍인 고산으로 본당을 옮겼다. 고산이 제대로 된 본당 모습을 갖추자 1931년 원산수녀원 첫 분원을 설립, 유치원을 운영했다.

 

카누트 다베르나스 신부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신자들을 위해 살았다. "정말 영웅적이며 가없는 희생의 삶이었습니다. 그가 단순히 개인적으로 편안한 삶을 포기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미사에 필요한 용품들도 포기해야 했습니다. 제대포, 사제복, 제대 장식 등은 없으며 늘 가난에 짓눌려 살아야 했습니다"(제르트루다 링크 수녀, 1935년 보고서 중에서).

 

# 심장ㆍ신장 약화, 다리부종도 앓아

 

그의 '희생적 삶'은 건강을 앗아갔다. 심장과 신장이 크게 나빠졌고 다리 부종을 앓았다. 하지만 그는 매일 수녀원 미사를 집전하고 수녀들의 영성 지도를 맡아 했다. 공동 기도에도 참여했고, 또 신자들에게 힘닿는 데까지 고해성사를 줬다.

 

건강 악화로 덕원수도원에서 한 달 남짓 요양 중이던 다베르나스 신부는 동료 수도자들과 함께 1949년 5월 11일 공산당 보위부원들에게 체포돼 평양 인민교화소를 거쳐 옥사덕 수용소로 끌려갔다. 심장병을 앓던 그는 세 시간 동안 산길을 걸어 올라가는 것이 무리가 돼 심장마비로 쓰러져 소 등에 실려 옮겨졌다. 건강이 나쁜데도 그는 담배 수확과 가공 등 농사일과 부엌일을 도왔다.

 

1950년 10월 유엔군의 북진과 미군의 폭격이 심해지자 인민군은 옥사덕 수용자들을 압록강 연안 만포 수용소로 옮겼다. 미군의 공습이 더욱 거세지자 수용소 경비병들은 만포 수용자들을 압록강 넘어 중국 땅 들판으로 내몰아 추위와 굶주림, 사람들의 조롱에 내던져진 채 끔찍한 3일을 보내게 했다.

 

"날씨가 몹시 추웠다. 새벽 흰 서리에 옷이 흠뻑 젖었다. 배가 몹시 고팠으나 먹을 것은 없었다. 사람들이 우리를 빙 둘러서 있었다. 우리는 너덜너덜한 죄수복을 입고 앉아 있었다. 많은 사람이 우리를 비웃고 조롱했다. 대부분 우리를 미군 포로로 알았다"(「북한에서의 시련」 중에서).

 

# 고결한 평온함 속으로

 

결국 들판에서 살을 에는 사흘 밤을 보낸 후 걸어서 만포수용소로 돌아온 카누트 다베르나스 신부는 1950년 11월 6일 병자성사를 받고, 단발마의 고통도 없이 조용히 사망했다. 수도자들은 그를 품위 있게 안치할 그 어떤 방편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음날까지 수도자들은 그가 짧은 잿빛의 죄수복을 입고 머리엔 통나무를 벤 채 빈 옆방의 바닥에 누워있는 것을 봐야만 했다.

 

"우리는 외적인 상황이 그렇게 궁핍했음에도 그의 얼굴에 퍼져있는 고결한 평온함과 숭고한 기품에 감동을 받았습니다"(디오메데스 메페르트 수녀 증언).

 

다음날인 7일에 한국인 포로들이 와서 다베르나스 신부의 시신을 넝마에 담아 들고 나갔다. 수도자들은 그의 시신이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나중에 그의 시신을 옮긴 포로 중 한 사람이 수도자들에게 매장지를 정확하게 알려줬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