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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덕원의순교자들

[덕원의 순교자들] (34) 아르눌프 요셉 슐라이허 신부

by 파스칼바이런 2014. 6. 8.

[덕원의 순교자들] (34) 아르눌프 요셉 슐라이허 신부

 

 

 

신약성경 우리말로 번역 출간한 벽안의 선교사

 

 

그림=김형주(이멜다)

 

▲ 아르눌포 신부가 회령성당에서 강론하고 있다.

 

▲ 1937년 독일에서 파견된 신학생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아르눌포 신부(둘째 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 그는 덕원수도원에서 가장 키가 작은 수도자였다.  

 

▲ 알렉시오 브란들 신부가 그린 옥사덕수용소 전경.  

 

 

아르눌프 (요셉) 슐라이허 신부Arnulf Schleicher)

 

▲출생: 1906년 9월 21일, 독일 플라움로흐

▲세례명: 요셉

▲한국명: 안세명(安世明)

▲첫서원: 1926년 5월 15일

▲사제수품: 1930년 7월 13일

▲한국파견: 1932년 4월 10일

▲소임: 덕원신학교 교수, 덕원수도원 수련장, 부원장

▲체포 일자 및 장소: 1949년 5월 9일 덕원수도원

▲선종 일자 및 장소: 1952년 6월 28일 옥사덕수용소

 

 

아르눌프 슐라이허 신부는 옥사덕수용소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순교한 덕원의 수도자다.

 

그는 1906년 9월 21일 독일 로텐부르크-슈투트가르트교구 뇌르트링겐 인근 플라움로흐에서 아버지 칼 슐라이허와 어머니 데레사 깁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례명은 요셉.

 

어릴 때부터 명석했던 그는 김나지움을 졸업한 후 1923년 1월 상트 오틸리엔수도원에 입회해, 1925년 5월 10일 ‘아르눌프’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련을 시작했다. 이후 1926년 5월 15일 첫서원을 한 그는 로마 성 안셀모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0년 7월 13일 사제품을 받은 그는 1932년 4월 10일 덕원신학교 교수로 한국에 파견됐다.

 

그는 신학교 강의를 맡기 전 한국말을 배우고 전국을 돌며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탐구했다. 또 고산과 원산본당 보좌를 맡으면서 선교사로서 현장 사목 일상을 체험했다. 그 와중에 그는 「원산의 종교ㆍ사회적 상황과 선교의 관계」라는 제목의 논문을 작성해 발표했다. 그는 이 논문에서 “선교사는 자기 쪽 사람뿐 아니라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야 할 비신자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한다”며 “종교 상황과 사회상을 배워 익혀 선교 활동에 반영하는 것은 모든 선교사에게 필요불가결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이 논문에서 “한국 고래의 좋은 관습이 유럽의 근대적 사상과 풍습과 행동 방식에 밀려나고 있다”면서 “공산주의는 이런 상황을 자기 이념에 이용하기 위해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가톨릭 교회야말로 한국을 유일하게 도울 수 있고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고 설명했다.

 

1934년 9월부터 덕원신학교 교수로 활동한 그는 교의신학과 성경 주석학을 강의했다. 그는 일제의 강압에도 굴하지 않고 한국말로 강의했고, 한국어 어휘로만 설명하기 부족한 것을 느끼고 한문 공부도 열심히 했다.

 

그는 특히 1941년 「신약성경 서간ㆍ묵시편」을 우리말로 번역 출간, 일찍이 프랑스 선교사들이 번역해 놓은 네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합쳐 마침내 온전한 한국어 신약성경이 존재할 수 있게 됐다. 슐라이허 신부는 특히 한국인 교구 사제 양성에 열정을 쏟았다. 언젠가는 선교지의 책임을 한국인 사제들에게 맡겨야 한다고 인식한 그는 한국어 신학잡지 발간을 추진했고, 한국인 사제들에게 길잡이 역할을 했던 2권짜리 「설교학 개론」도 펴냈다.

 

그는 또 능변가로 유명해 본당 특별 강론이나 피정에 번번이 불려다녔다. 그는 신자들을 위해 주일미사 때 늘 한국말로 강론했다. 또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반대해 「어느 것이 참된 종교인가」라는 책자를 제작, 1만 부를 신자들에게 배포했다.

 

교수직을 수행하면서 덕원수도원 수련장과 부원장직을 맡은 그는 1949년 5월 9일 보니파시우스 사우어 주교아빠스와 루치우스 로트 원장 신부와 함께 체포돼 평양인민교화소에 갇혔다. 한여름이던 그해 8월 5일 동료 수도자와 함께 그는 옥사덕수용소로 이송됐다.

 

옥사덕수용소에서 그는 억류된 수도자들의 최고 장상이었다. 그래서 수용소 경비대는 사사건건 그에게 책임을 물어 횡포를 부리고 폭행을 가했다. 그는 학자였지 숙련된 노동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동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쓰러졌어도 거름더미를 태웠다.

 

그는 1952년 봄부터 기관지염을 심하게 앓았고, 신장과 심장도 나빠져 심한 부종으로 고통을 겪다 그해 6월 28일 순교했다. 그의 주검을 확인한 경비병은 슬퍼하는 수도자들에게 소리쳤다. “아까워할 것 없어. 어차피 더는 일을 못 할 테니.”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