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원의 순교자들] (31) 박빈숙 루치아 수녀 완성하지 못한 수도자의 길, 순교로써 천상으로 이어져
박빈숙 루치아 수녀
▲출생: 1919년 10월 14일 평남 순안 ▲세례명: 안젤라 ▲첫서원: 1943년 6월 22일 ▲체포 일자 및 장소: 1950년 9월 24일, 평남 순안 ▲순교 일자 및 장소: 1950년 10월 11일, 평남 순안
▲ 원산수녀원 수녀들이 정성껏 제의를 만들고 있다.
▲ 툿찡 수녀회 원산수녀원인 성 임마쿨라타의 집. 박빈숙 수녀가 수도생활을 한 수도원이다.
박빈숙(루치아) 수녀는 공산 정권의 박해를 피해 북한을 탈출해 38선을 넘으려는 한국인 수녀들을 위해 고향에 남았다가 체포돼 순교한 하느님의 종이다.
그는 1919년 10월 14일 평안남도 순안에서 화목하고 다복한 천주교 집안에서 3남매 중 맏딸로 태어났다. 세례명은 안젤라. 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원산수녀원 부원장이며 한국인 수녀가족 책임수녀였던 박정덕(골룸바) 수녀와 박한덕(올리바) 수녀가 고모들이다.
그는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에게서 자랐지만, 활동적이고 신앙심이 두텁고 주관이 뚜렷한 아이였다. 또 어머니에게서 깊은 연민으로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돕는 법을 배운 그는 아픔과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언제나 도와주려 해 동네 주민들에게 늘 칭찬을 받던 아이였다.
그는 19살이 되던 해인 1938년 8월 22일 고모 박정덕 수녀의 종신서원식에 참석해 큰 감명을 받은 후 그 자리에서 원산수녀원에 입회했다. 1942년 1월 15일 '루치아'라는 수도명으로 수련을 시작한 그는 크리소스토마 슈미트 수녀에게서 음악 지도를 받아 음악교사 시험에 합격, 교사 자격증을 획득했다. 하지만 수련원 생활에서 매사에 뛰어난 것이 오히려 걸림돌이 돼 그는 서원 허락을 제때에 받지 못해 수련 동기들과 함께 첫서원을 할 수가 없었다. 충격을 받은 그는 공동체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낙담해 있는 그에게 고모 박정덕 수녀는 "누가 먼저 서원을 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더 고귀한 순교의 화관을 받느냐가 중요하다. 인내를 갖고 참고 기다려라"고 격려했다. 이 말을 깊이 묵상한 그는 큰고모 수녀를 찾아가 "이 시련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기간으로 봉헌하겠다"고 말한 후 기쁘게 수도생활을 다시 시작했고, 1943년 6월 22일 첫서원을 했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세계 제2차 세계대전 내내 원산수녀원은 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총본부로부터 고립돼 있었다. 일제 조선총독부는 수녀들의 선교를 방해했고 적대국 출신인 프랑스인 수녀들을 감금했다. 미사를 마치면 매번 애국 의식을 거행했고, 승전보가 전해질 때마다 수녀들과 학생들은 강제로 작은 일장기를 흔들며 몇 시간씩 행진해야 했다.
해방 이전 1945년 8월 10일께 소련군이 북한 땅에 들어왔다. 선발대로 들어온 소련군은 부녀자들을 함부로 겁탈했고, 몇몇 신부들을 살해하고 선교사들의 자유를 제한했지만 드러나게 박해하지는 않았다. 소련군이 철수한 후 정권을 장악한 김일성은 1949년 벽두부터 교회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1949년 5월 10일 밤, 정치보위부원들은 원산수녀원에 들이닥쳐 수녀들을 체포하고 수녀원을 몰수했다. 독일인 수녀들은 평양인민교화소에 몇 달 동안 수감됐다가 산악지대에 위치한 옥사덕 강제노동수용소로 끌려가 1954년에 석방될 때까지 고통을 겪었다.
19명의 한국인 수녀들도 원산 인민교화소에 감금됐다. 그들은 '게으르고 쓸모없는 인민들'로 고발돼 결혼을 강요당했다. 일주일 후 한국인 수녀들은 "수도복을 벗고 평복 차림으로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 혼인해 인민을 위해 봉사 노력하라"는 정치보위부원의 지시를 받고 석방됐다.
수녀들은 "수도자를 만드는 것은 수도원 건물이나 수도복이 아니라 마음과 정신"이라고 서로 격려하고 모두가 마음을 다해 포교 베네딕도 회원으로서 소명에 충실히 살아갈 것을 결심했다.
박빈숙 수녀는 고모 박정덕ㆍ한덕 수녀와 함께 원산에서 평양을 거쳐 고향인 순안으로 돌아갔다. 그는 집안에만 있지 않고 겁없이 공산당원들이 회의실로 사용하던 공소 건물에 아이들을 모아 놓고 일주일에 3번씩 성가와 교리를 가르쳤다.
한국인 수녀들을 책임지고 있던 그의 큰고모 박정덕 수녀는 젊은 수녀들부터 차례로 월남시킬 계획을 짰다. 1950년 2월 박정덕 수녀는 당시 덕원수도원 한국인 수사 책임자였던 김영근(베다) 부제의 연락을 받고 북한 탈출을 감행했다. 하지만 박빈숙 수녀는 큰고모 수녀에게 "저희가 사라지면 보위부원들이 의심하게 되고 또 탈출 도중 만약 심문을 받게 될 경우, 귀가 어두운 작은고모 수녀가 엉뚱한 진술을 해 다른 자매들의 북한 탈출 기회를 모조리 망치게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통일이 돼 원산에서 다시 수도공동체가 모일 때까지 집에서 수녀로서의 사명을 이어가며 기다리겠습니다"라며 탈출을 거부했다. 이렇게 한국인 수녀들이 차례로 월남하는 동안 박빈숙 수녀는 난청이 심한 작은고모 박한덕 수녀와 북한에 머물렀다.
순안은 평온한 마을이었다. 한때 박 수녀 집에서 머슴 일을 했던 사촌 중 한 명이 공산당 고위직에 올랐다. 그는 정치보위부 상부에 박 수녀의 모든 움직임을 일일이 고해바쳤고 1950년 9월 24일 그는 체포돼 순안 정치보위부에 감금됐다. 얼마후 국군이 북진해 순안 인근에 당도했을 때 공산군은 1950년 10월 11일 모든 수감자를 산으로 끌고 가 총살했다. 박빈숙 수녀도 이날 순교했다. 31살이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목격자 증언
"루치아 수녀는 수감 중에 온갖 수난을 겪었다. 공산군이 수감자를 산으로 끌고 갈때 다른 수감자들은 양손을 줄에 묶어 끌고 갔지만, 루치아 수녀는 몸이 상해 손은 호송줄로 묶인 채 달구지에 누워서 실려 갔다. 달구지가 시골 자갈길을 터덜거리며 지나갈 때마다 극심한 통증으로 신음을 내며 끌려갔다. 공산당들이 그들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고 루치아 수녀를 함부로 매질했기에 온몸이 상했다. 그들은 다른 죄수들과 함께 루치아 수녀를 동리에서 약 2㎞ 떨어진 산모퉁이로 싣고 가서 파놓은 구덩이에 죄수들을 한데 세워 놓고 모두 총살한 후 한곳에 묻어버리고 도망쳤다"(고향 지인이 박정덕 수녀에게 한 증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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