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원의 순교자들] (29) 오이겐 오스터마이어 수사 '하느님의 포도밭' 일궈 최고의 미사주 제조한 장인
오이겐 (미하엘) 오스터마이어 수사 (Eugen Ostermeier)
▲출생: 1885년 9월 17일, 독일 뮌헨 ▲세례명: 미하엘(Michael) ▲한국명: 오이근(吳利根) ▲첫서원: 1907년 2월 3일 ▲종신서원: 1910년 2월 3일 ▲한국파견: 1912년 9월 1일 ▲소임: 정원사, 농장 책임자, 건축가, 포도주 양조 책임자 ▲체포 일자 및 장소: 1949년 5월 11일, 덕원수도원 ▲선종 일자 및 장소: 1949년 9월 14일, 옥사덕수용소
▲ 오스터마이어 수사가 나귀를 타고 백동수도원 포도밭을 둘러보고 있다.
▲ 오이겐 오스터마이어 수사가 서울 백동수도원 포도밭에서 한국인 일꾼과 함께 망중한을 보내고 있다.
성 베네딕도회 서울 백동ㆍ덕원수도원의 정원사이며 건축가요, 포도주 양조 책임자였던 오이겐 오스터마이어 수사는 부지런하면서도 도덕적으로 엄격한 삶을 살았던 수도자다.
그는 1885년 9월 17일 독일 바이에른 뮌헨에서 농부인 아버지 요셉 오스터마이어와 어머니 크레첸시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례명은 미하엘. 그는 도나우뵈르트와 뮌헨의 김나지움에서 초등학교 저학년을 다녔고 4학년을 마친 후 공부를 중단하고 뮌헨의 한 인쇄소 점원으로 일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 가정에서 성장한 그는 아주 부지런하고 행실이 바르다는 칭찬을 들었다.
1904년 말,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평수사로 입회한 그는 '오이겐'(에우제니우스 Eugenius)이라는 수도명을 받고 1907년 2월 3일 첫서원을 했다. 오틸리엔수도원에서 정원사로 양성된 그는 1910년 2월 3일 종신서원을 하고 1912년 9월 1일 한국으로 파견됐다.
숙련된 정원사요 농장 관리인이었던 그는 한국에 입국하자마자 백동수도원이 운영하던 실업학교인 '숭공학교' 교사로 일했다. 하지만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파스칼리스 팡가우어 수사, 고트리프 아우어 수사와 함께 징집돼 독일 조계지(租界地, 치외법권 지역)인 중국 칭다오를 방어하는 군인이 됐다. 위생병 보직을 받은 그는 일본군이 칭다오를 점령하자 군복을 벗고 가져갔던 수도복으로 갈아입고는 아무런 방해 없이 귀환해 1914년 12월 7일 서울 백동수도원에 도착했다.
그는 백동수도원 주변 비탈에 꽤 넓은 포도밭을 일궈 다양한 품종을 재배해 아주 훌륭하고 순수한 미사주를 제조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또 1921년 9월 9일 포도 압착기를 제작, 더욱 신선한 포도주를 양조해 3년간 충분한 미사주 재고를 확보했다.
한국에서 17년을 보낸 그는 1929년 봄 독일로 돌아가 덕원수도원 건축 기금을 모금하기 위해 전국을 누볐다. 1930년 10월 30일 기능공 수사들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덕원수도원 농장 전체를 감독하면서 청진ㆍ영흥ㆍ고산 성당 수녀원 건물을 직접 지었다. 또 덕원수도원 포도밭을 조성해 포도주를 생산했다. 이 포도주는 제2차 세계대전과 일제의 탄압으로 질식할 것 같던 시절 덕원수도원 재정에 큰 도움을 줬다. "우리는 얼마 동안 그럭저럭 견딜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만이 아시겠지요. 포도주가 큰 도움이 됩니다. 현재 우리 미사주를 한국 전역에 공급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우리 미사주에 관심이 있습니다. 다른 어디서도 우리 미사주 같은 것은 구하지 못합니다"(루치우스 로트 원장 신부, 1942년 5월 17일자 우츠나흐 선교총무 아달리코 뮐레바흐 신부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이 포도주 생산시설은 1949년 북한 정치보위부가 덕원수도원에 탈세 혐의를 뒤집어씌우는 빌미가 된다. 하지만 1946년 3월 북한 공산당의 토지개혁으로 오스터마이어 수사가 경작하던 포도밭은 이미 사라졌고, 포도 압착장도 가동을 멈춘 지 오래였다. 그러자 정치보위부는 양조장에 비축돼 있던 포도주 재고를 압수하고, 덕원수도원 재정담당 다고베르트 엥크 신부를 탈세 혐의로 1948년 12월 1일 체포했다.
1949년 5월 11일 덕원수도원에서 동료 수도자들과 함께 체포돼 평양인민교화소에 감금됐다가 옥사덕으로 이송된 오스터마이어 수사에겐 가혹한 수용소 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64세 늙은 몸으로 매일 하루 12시간 이상의 강제노동에 시달렸던 그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속절없이 무너져 1949년 9월 14일 순교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동료 수도자들 증언
"총 200젠트너(10톤)의 포도를 수확했고, 1927년 1월에 들어설 때까지 종종 후식으로 신선한 포도를 맛봤다. 다양한 시도 끝에 독일식 리즐링 포도주뿐 아니라 머스캣 포도주와 각종 프랑스식 포도주도 손색이 없음이 입증됐다. 우리가 1917년부터 생산해 온 미사주를 만주의 추위에 견딜 만큼 진하게 만들기 위해, 양조 장인 오이겐 수사가 겨울에 미사주를 꽁꽁 얼려두었던 것이 효과적이었다"(1926년 「서울 백동연대기」 중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젊은 남자가 찾아와 며칠 동안 일자리를 구걸했다.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였다. 눈물로 하소연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오이겐 수사는 보름마다 일꾼들을 교체하기로 했다"(1932년~1933년 「덕원 연대기」 중에서).
"오이겐 오스터마이어 수사는 감옥에 갇혀 있을 때부터 병약했다. 그는 수용소에서 계속되는 노동을 더는 계속할 힘이 없었다.… 그의 장 질환이 급속히 악화됐다. 오랫동안 그 상태는 이질처럼 보였다.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모습이 눈에 띄게 초췌해졌을 때 나는 위암과 같은 소화기 종양이라고 의심했다. 9월 12일, 임종의 방 앞에서 수녀들이 '성모 성가'를 불렀을 때 그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인 1949년 9월 14일에 사망했다. 그는 탁 트인 들판 위 가을의 푸른 나무 아래 안치됐다가 동료 수도자 무덤 옆에 안장됐다"(디오메데스 메페르트 수녀 증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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