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원의 순교자들] (26) 이춘근 라우렌시오 신부 병약했지만 하느님 섭리 굳게 따른 '외유내강'의 사제
이춘근 라우렌시오 신부 ▲ 그림=김형주 이멜다
▲출생 : 1915년 3월 8일, 경기도 양주군 신암리 ▲세례명 : 스테파노 ▲소속 : 덕원수도원 ▲사제수품: 1939년 6월 24일 ▲첫서원 : 1942년 7월 26일 ▲종신서원 : 1945년 8월 15일 ▲소임 : 덕원신학교 사감 및 교수, 평양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담당, 서포본당 주임 ▲체포 일자 및 장소 : 1950년 6월 24일 평양 순안공소 ▲순교 일자 및 장소 : 1950년 10월 5일 평양인민교화소(추정)
▲ 1950년 6월 16일자로 루치우스 로트 원장 신부가 이춘근 신부에게 평양인민교화소에서 라틴말로 써 보낸 '전권 위임' 비밀 편지.
▲ 평양 서포본당 신자들이 성체거동 행렬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평양교구
하느님의 종 이춘근(라우렌시오) 신부는 서울대교구 사제로 사목하다 완덕에로 나아가기 위해 성 베네딕도회 덕원수도원으로 입적한 수도사제이다.
그는 1915년 3월 8일 유서 깊은 교우촌인 경기도 양주군 남면 신암리에서 아버지 이공명(바오로)과 어머니 홍 베로니카의 3남 4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세례명은 스테파노.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의 이근재(부르노, 1925~2006) 수사가 그의 동생이다.
그는 고향에서 보통학교 4년을 마친 뒤 서울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해 수학했다. 신심 깊고 섬세했던 그는 어려움과 고통이 닥칠 때마다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극복하고 성장했다. 어릴 때부터 병약했던 그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고통을 참아 이기셨는데 이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며 모든 걸 참고 견뎠다. 또 그가 11살 때에 모자에 곡식 낟알을 가득 모아들고 왔기에 어머니가 "그걸 뭣 하러 주워 왔느냐"고 묻자 "천주님께서 주신 곡식을 사람들은 왜 아깝게 여기지 않고 밟고 다니는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서울에서 투병, 탈북 기회로 삼지 않아
신심 깊던 그의 가족은 그가 신학교에 입학하자 매일 묵주기도와 성체조배를 잊지 않았다. 무릎이 성치 않던 그의 할아버지는 문고리를 잡고 손자를 위해 정성을 다해 기도했다고 한다.
신학생 시절 말수가 적었으나 작은 일에도 열심이었던 그는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인을 특히 공경했다. 그는 스물다섯 나이로 1939년 6월 24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제9대 서울대목구장 라리보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교구 사제로서 그는 황해도 사리원본당 보좌로 1년간 사목한 후, 1940년 7월 경기도 장호원(감곡)본당 보좌로 전임해 1년 정도 생활했다. 이 신부는 영성생활에 매진하기 위해 1941년 교구장 라리보 주교의 추천을 받아 덕원수도원에 입회해 수련을 시작했다.
'라우렌시오'라는 수도명으로 법정 수련을 마친 그는 1942년 7월 26일 첫서원을 했다. 수도생활을 함께한 동생 이근재 수사가 싱글벙글 웃으며 청소하는 형에게 "그리 일하는 게 즐겁습니까?" 하고 묻자 이 신부는 "일처럼 성스러운 것이 어디 있겠느냐"며 만족해했다.
이 신부는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이 일제 치하에서 해방되던 날 종신서원을 했고 덕원신학교 사감 신부 겸 교수로 일했다. 1946년 어느 날, 말을 할 수 없을 만큼 성대에 문제가 생겨 서울성모병원에 입원한 그는 공산당이 덕원과 연길수도원 재산을 몰수하고 탄압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완치가 되지 않은 몸으로 1947년 봄, 38선을 다시 넘어 덕원으로 돌아갔다. 서울 체류를 탈북의 기회로 이용하지 않고 수도원으로 돌아온 그를 보고 수도자들이 왜 돌아왔느냐고 묻자 그는 "저는 오직 하느님의 섭리를 따라 살 뿐"이라고 말했다.
수도원에 돌아온 이 신부는 사제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평양대목구장 홍용호(프란치스코) 주교의 요청으로 평양교구에 파견돼 1948년 10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담당 신부 및 평양 서포본당 9대 주임 신부로 사목했다. 그는 평양에서 공산당의 종교인에 대한 박해와 교회 활동에 대한 제약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하루는 본당 수녀와 회장과 함께 보안서로 연행돼 심문을 당하고 뺨까지 맞는 고초를 겪었다. 이 신부가 평양에 파견온 지 7개월여 된 1949년 5월 11일 덕원수도원은 폐쇄됐고 수도자들은 체포돼 평양인민교화소로 압송됐다.
선교회와 수도원 관련 전권 위임받아
이 소식을 들은 이 신부는 당시 평양인민교화소 의무관으로 일하던 노재경씨를 통해 수도자들과 비밀리에 연락을 주고받으며 필요한 약품을 전달했다. 그는 감옥에 갇혀 있는 덕원수도원장 루치우스 로트 신부에게 라틴어 비밀 편지로 선교회와 수도원과 관련된 전권을 위임받고 한국인 남녀 수도자들을 1년여간 평양에서 돌보며 월남을 도왔다. 그는 수도생활의 계통과 규범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혼란의 와중에 규율을 지키지 않고 경고를 무시하는 한 성직 지망 수사의 독일 유학을 허락하지 않고 종신서원을 하기 전에 사제품을 받아선 안 된다고 단호하게 결정했다. 또 한국인 유기서원자들의 법정 기간을 연장해 수도자 신분을 잃지 않도록 도왔다. 이때 동생 이 수사가 함께 월남하자고 강권했으나 그는 "저 많은 양을 두고 내가 어디로 가겠냐"며 신자들을 돌봤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수녀원 건물과 서포성당이 몰수돼 순안공소로 거처를 옮긴 이 신부는 "밥 먹는 시간이 아깝다"며 끼니마저 거르고 아픈 성대로 성사를 주고 미사를 봉헌했다.
이 신부는 1950년 6월 24일 밤, 평양교구 내 모든 신부가 체포될 때 정치보위부원에게 연행돼 행방불명이 됐다. 이 신부의 지시로 평양에 몸을 숨기면서 의사 노재경씨를 통해 평양인민교화소 수도자들과 비밀 서신을 주고받던 임근삼(콘라도) 수사는 "1950년 10월 5일 이춘근 신부를 비롯해 한국인 신부들이 피살됐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동료 수도자들 증언
"보위부원들이 순안공소에 들이닥치자 절 구석진 곳에 끌고 가서 '난 이제 마지막인 것 같소. 이젠 평양인민교화소에 수감된 성직자들의 소식을 살피고 보살피는 일도 더는 못하게 됐소. 임 수사 역시 신변이 위태로우니 한시바삐 이 자리를 피해 평양으로 나가 몸을 숨기시오. 그리고 위험한 큰길로 가지 말고 샛길로 가시오'라고 말씀하신 후 체포돼 끌려가셨습니다"(임근삼 수사 증언).
"사랑하올 라우렌시오 신부님! 편지와 축하에 감사. 바깥에서 온 첫 소식. 많은 기도 부탁. 어르신(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의 죽음은 우리도 알고 있었음. 당일은 몰랐음. 교화소 식사가 맞지 않아 고생하셨을 게 분명. 심한 설사로 피골상접. 교화소 내 매장됐으리라 추정"(덕원수도원장 루치우스 로트 신부가 1950년 3월 4일자로 평양인민교화소에서 보낸 비밀 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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