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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덕원의순교자들

[덕원의 순교자들] (27) 에우세비우스 로마이어 수사

by 파스칼바이런 2014. 5. 27.

[덕원의 순교자들] (27) 에우세비우스 로마이어 수사

덕원수도원, 신학교, 성당 등을 지은 최고의 일꾼

 

 

에우세비우스 (막시밀리안) 로마이어 수사

 

▲출생: 1897년 2월 12일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메링

▲세례명: 막시밀리안

▲한국명: 노안락(盧安樂)

▲첫서원: 1920년 4월 5일

▲종신서원: 1923년 4월 5일

▲한국 파견: 1924년 9월 3일

▲소임: 덕원수도원 목수

▲체포일자ㆍ장소: 1949년 5월 11일 덕원수도원

▲선종일자ㆍ장소 : 1951년 9월 1일 옥사덕수용소

 

▲ 에우세비우스 로마이어 수사(뒷줄 가운데, 점선)가 1925년 원산 선교본부를 방문한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앞줄 가운데)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로마이어 수사가 공사를 맡아 했던 덕원 수도원과 신학교 전경.

 

▲ 1936년 로마이어 수사가 건축한 고원성당.

 

 

목수인 에우세비우스 로마이어 수사는 덕원수도원에서 가장 중요한 일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덕원 및 연길수도원과 신학교, 덕원수도원 관할 성당과 학교 건물의 신축과 보수 작업을 도맡아 한 성실한 목수였다.

 

그는 또 덕원의 순교자들 가운데 가장 조용한 사람이었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묵묵히 소임에 충실하고 항상 남들에게 기꺼이 봉사할 준비가 돼 있는 열린 심성의 평수사였다. 학교 성적이 우수하고 생활기록부에 '공명심이 있는 소년'이라고 기록될 만큼 명석하고 활발한 그였으나 수도회 입회 후 첫서원 문서 서명 말고는 그가 쓴 글이 단 한 줄도 없을 만큼 자신을 철저히 낮추고 침묵하는 수도자였다.

 

그는 1897년 2월 12일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지방 레흐펠트 외곽 슈바벤 메링 마을에서 아버지 막스 로마이어와 어머니 크레스첸치아 쉐플러 사이에 태어났다. 세례명은 막시밀리안. 금세공인이었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다.

 

홀어머니 손에 자란 로마이어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상트 오틸리엔수도원에 들어와 목공 도제 수업을 받았고, 1914년 5월 정식으로 수도원에 입회했다. 하지만 얼마 있지 않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군에 징집돼 1916년부터 1918년까지 2년여 동안 프랑스 전선에서 격렬한 전투에 참전했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그는 1919년 3월 21일 '에우세비우스'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련기를 시작했고, 1920년 4월 5일 첫서원을, 1923년 4월 5일 종신서원을 했다. 그는 종신서원 후 1924년 3월 30일 필리핀 디날루피한의 성 베니토수도원에 파견됐다가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의 요청으로 그해 9월 3일 한국에 파견됐다. 이와 관련, 「원산 연대기」에는 "매우 기쁘게도 에우세비우스 수사가 필리핀에서 우리 수도원으로 파견됐다"고 적혀 있다.

 

로마이어 수사는 한국에서 덕원과 연길수도원, 덕원신학교, 평양주교좌성당 등 연이은 대규모 신축 공사 현장에서 목수 일을 지휘 감독했다. 그가 처음 맡은 일은 당시 주교관으로 사용하던 원산성당 공사였다. "원산성당은 분명 전 세계 주교좌성당 가운데 가장 초라한 성당일 겁니다. 길이 12m, 폭 5m, 높이 3m로 평일 미사 참례자들조차 수용하기 힘든 형편입니다. 주일과 대축일 미사를 두 대씩 봉헌해도 전 신자가 참례하기 어렵습니다. 옴짝달싹 못 하고 끼어 서 있거나 무릎을 꿇는 데도 그렇습니다. 여름에는 도저히 참지 못할 지경입니다"(「원산 연대기」중에서).

 

그는 한 번에 보통 2~3개 공사를 맡아 했다. 원산성당을 건축하면서 덕원수도원 공사를 시작했고, 1927년 말 덕원수도원의 첫 단계 공정이 마칠 무렵 신학교 공사를, 1928년 신학교 지붕 골격을 갖추자 즉시 만주 삼원봉성당으로 가서 종탑을 철거하고 새로 지었다. 또 1929년 5월 연길수도원을 지었다.

 

그는 후덥지근한 여름에도 장마를 피해 빠듯한 공기에 맞춰 공사를 마무리하고자 아침부터 밤까지 문틀과 창문을 달고, 마룻바닥에 못질하고, 칠을 했다. 겨울에는 장작불을 피워 언 몸을 녹여가며 일했다. 그를 지켜본 수도자들은 "그는 더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무리한 노동을 계속했다"고 안타까워했다.

 

1936년 그가 지은 고원성당이 완공됐을 때 본당 주임 엘리지오 신부는 "종이 처음 울리던 날은 도시에 큰 사건이 일어난 것 같았다. 사람들은 집 밖으로 뛰쳐나오거나 가던 길을 멈추고 서서 두리번거리며 종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성당은 그렇지 않아도 도시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어서 눈에 잘 띄었다. 그럼에도 성당을 못 보고 지나치는 사람이 있다면, 이제 날마다 울리는 종소리가 우리 주 하느님께서 사시는 곳을 알려 줄 것"이라고 감격했다.

 

1938년 9월 23일 덕원신학교가 화재로 전소되자 그는 신학교 재건 공사 감독으로 임명됐다. 오랜 세월 고된 노동으로 탈장 수술까지 한 그는 신학교를 완벽하게 재건했다. 수도자들은 그가 지은 덕원신학교를 '건축학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또 1946년 평양주교좌성당 건축공사를 맡아 1948년 여름까지 공사 현장을 감독했다. 북한 공산당의 방해로 공사가 중단되면서 1949년 봄에 덕원수도원으로 돌아왔다. 그가 짓던 평양주교좌성당은 미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됐다.

 

덕원수도원으로 귀환한 지 얼마 안 돼 1949년 5월 11일 덕원의 다른 수도자들과 함께 정치보위부원에게 체포된 그는 평양인민교화소에 수감됐다. 그는 교도소장 지시로 자신들이 수용될 옥사덕수용소 설계도를 급히 그려야 했다. 그러면서 그는 간수들의 묵인 하에 감옥의 수도자들에게 음식과 내복을 전했다. 1950년 10월 옥사덕수용소로 독일인 수도자들과 함께 이송된 그는 자신이 설계한 도면으로 다른 수도자들과 함께 수용소를 지어야만 했다. 굶주림과 동상으로 고생하던 그는 1951년 9월 1일 11시께 사망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동료 순교자들 증언

 

"에우세비우스 로마이어 수사는 거인 같은 체구의 목수였다. 수용소에서 굶주림으로 약해지기 전에는 무거운 통나무를 혼자 들어 옮겼다고 종종 자랑하곤 했다. 수용소 생활 첫해에 그는 다른 많은 사람처럼 해충과 불결함으로 인한 화농성 피부궤양을 심하게 앓았다. 만포 시절에 그는 심하게 동상에 걸려서 거의 모든 발가락의 피부가 벗겨지고 두 개 발가락에서는 관절 마디가 드러났다.

만포에서 돌아온 이후 그는 양 우리와 마구간 짓는 일을 했는데 이때는 비교적 건강이 좋았으며 비교적 환경에 적응을 잘하는 것처럼 보였다. 굶주림에 관해서 그는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그 후 그는 8월 뙤약볕 아래 제초 작업에 동원됐고, 이 일이 그를 매우 지치게 했다. 그는 자주 현기증과 허리 통증을 호소했다. 그러다 8월 중순 콜레라와 비슷하게 진행된 급성 장염에 걸리게 됐다. 적당한 식이요법과 강장제가 있었다면 그를 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이미 수척해진 그의 육체는 더는 감당해내지 못했다. 그는 9월 1일 11시께 사망했다. 우리 모두는 그를 좋아했다. 그의 평온하고 어떤 일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태도는 수용소 생활의 시달림 속에서 종종 우리를 유쾌하게 했다"(디오메데스 메퍼트 수녀 증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