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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덕원의순교자들

[덕원의 순교자들] (24) 구대준 가브리엘 신부

by 파스칼바이런 2014. 5. 24.

[덕원의 순교자들] (24)구대준 가브리엘 신부

신앙 선조에 부끄럽지 않은 후손, 끝까지 양떼 지킨 목자

 

 

구대준 가브리엘 신부

 

▲출생 : 1922년 서울 이화동

▲세례명 : 가브리엘

▲소속 : 함흥교구

▲사제수품 : 1940년 3월 25일

▲소임 : 덕원신학교 사감, 흥남본당 주임, 회령ㆍ계림본당 주임

▲체포 일자 및 장소 : 1949년 5월 11일 원산 수녀원

▲순교 일자 및 장소 : 1950년 6월 25일 이후 행불, 평양인민교화소

 

 

 

▲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에게 사제품을 받고 있는 구대준 신부.

 

▲ 구대준 신부가 사제품을 받은 후 어머니에게 첫 축복을 하고 있다.  

 

▲ 덕원신학교 신학생 시절 소품을 받고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구대준 신부(맨 왼쪽). 소품(小品)은 오늘날 독서직이나 시종직에 해당하는 품이다.

 

 

"이 피정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릅니다."

 

1949년 5월 10일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도원에서 한국 수녀들의 연례 피정을 지도하던 구대준(가브리엘, 회령본당 주임) 신부는 박해를 암시하는 말로 강의를 시작했다. 그의 말대로 그날 밤 수녀들과 함께 정치보위부원에게 체포된 구 신부는 자신의 선조가 걸었던 순교의 길에 동참했다.

 

함흥교구 소속인 구대준 신부는 1912년 4월 27일 서울 종로구 이화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구종진(프란치스코)은 한말 궁내부 주사로 관직에 있다가 1905년 경술국치 이후 순사교습소 한문 교관을 지냈다. 그는 한국인 첫 영세자인 이승훈(베드로) 순교자의 후손 이정자(마리아)와 결혼하면서 세례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했다. 구 신부는 3형제 가운데 차남으로 형 '원준'은 일본 유학 중 1923년 발생한 간토대지진 때 희생됐고, 동생 상준(요한 세례자)은 바로 저명한 구상 시인이다.

 

한국인 첫 덕원신학교 사감 신부

 

구 신부는 14살 때 어의동보통학교(현 효제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1926년 사제가 되기 위해 베네딕도회가 설립한 백동 소신학교에 입학했고, 이듬해 신학교가 덕원으로 옮겨감에 따라 덕원신학교에서 수학했다.

마침 관직에서 물러난 아버지는 덕원수도원에서 교육사업을 도와달라는 청을 받았다. 아버지는 아들 뒷바라지도 할 겸 가산을 정리해 온 가족과 더불어 덕원수도원 아랫마을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수도원 인근의 문평, 옥평 등지에 해성학원을 설립해 원장으로 육영사업에 힘썼다.

 

구 신부는 과묵하고 생각이 깊어 철학과 신학 과정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여러 분야에 조예가 깊었다. 특히 문학에 뛰어났고 덕성이 깊어 수도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는 1940년 3월 25일 덕원수도원 성당에서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 주례로 이재철(베드로) 신부와 함께 사제품을 받았다. 수품 후 그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덕원신학교 사감 신부로 임명됐다. 그는 신학생들에게 자율적이면서도 책임을 다하는 생활을 하도록 지도했다.

 

구 신부는 1943년 4월 칼리스토 히머 신부 후임으로 제2대 흥남본당 주임으로 부임했다. 당시 흥남본당 신자들은 전국 각처에서 모여든 가난한 이주민들이었고, 대부분 질소비료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였다. 구 신부는 객지에서 외롭게 지내는 사람들에게 다정한 벗이 돼 주었다. 매일 밤이 깊도록 성당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온종일 신자들에게 시달리면서도 강론 준비를 철저히 해 주일마다 신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의 생활은 매우 엄격해 식복사를 두지 않고 식사를 본당회장 집에서 해결했다. 수수와 좁쌀이 가득 섞인 험한 잡곡밥에 반찬도 언제나 회장네 식구와 똑같이 먹었다. 의복도 두 벌 이상 가지고 있지 않았고, 생활비도 교구에서 지급하는 한도에서 충당하고 미사예물은 모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썼다. 또 사제관에 '대건의원'을 개설해 병원비가 없는 가난한 이들을 치료해 줬다. 의사 서영옥(마리아 데레사)씨가 대건의원을 맡아 운영했는데, 후일 구 신부의 동생 구상 시인의 부인이 됐다.

 

효심이 깊었던 구 신부는 중풍으로 4년간 병석에 누워 있는 아버지에게 매 주일 병자영성체를 줬다. 또 배변이 원활치 못한 아버지를 위해 변을 손가락으로 후벼낼 정도였다. 어쩌다 과일이나 과자가 선물로 들어오면 모아서 부모에게 가져다 드리기도 했다.

 

구 신부는 또 용기와 강단이 있어 당시 흥남포로수용소에 수용돼 있던 영국군 병사들을 찾아가 고해성사를 주고 위로하기도 했다. 또 일제의 사설학원 폐쇄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해성학원을 계속 운영했다.

 

1945년 해방 후 공산당의 탄압으로 신앙이 약한 신자들이 교회를 멀리하는 가운데서도 구 신부는 원산수녀원에 수녀 파견을 요청해 성 베네딕도 수녀회 흥남분원을 설립했다.

 

구 신부는 1945년 8월 22일 밤 약탈을 자행하던 소련군에게 회령본당 주임 비트마로 파렌코프 신부가 피살되고, 계림본당 프리돌리드 짐머만 신부가 사망하자 두 본당 신자들을 돌보기 위해 자원해 부임했다.

 

구 신부가 이런 결심을 할 무렵 동생 구상 시인이 이를 만류하고 함께 월남을 권유하자 "저 독일인 성직자들은 고국을 버리고 한국에 와서 이 고초를 겪는데, 내야 내 땅, 내 교구, 내 본당, 내 교우들이 있는데 이를 버리고 가기는 어디를 가느냐?"고 잘라 말했다.

 

수녀들 피정 지도 중 체포

 

구 신부는 1949년 5월 10일 원산수녀원에 한국 수녀들의 연례 피정 지도를 하러 갔다. 피정을 시작한 그날 밤 그는 정치보위부원들에게 체포돼 다음 날 평양인민교화소로 이송 수감됐다. 그는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와 같은 방에 갇혔다.

 

그는 1949년 8월 5일께 쇠약한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에게 병자성사를 줬다. 이후 그의 행방과 자취를 찾을 길이 없다. 함께 수감됐던 수도자들은 구대준 신부가 1950년 10월 초 분명 다른 신부들과 함께 피살됐을 것이라 믿고 있다.

 

리길재 기자 teotok os@pbc.co.kr

 

동료수도자들의 증언

 

"평양인민교화소에서 구대준 신부와 같이 있었는데 언제나 근엄하고 맘과 얼굴에 기쁨의 미소와 평화를 잃지 않고 아주 평화스러운 사제로 끝까지 살다가 어느 날 어디론지 끌려가서 그 후 다시 만나지 못했습니다"(호노라도 밀레만 신부 증언 중에서).

 

"5월 11일 밤 자정 직후 정치보위부 요원 여섯이 원산본당 사제관에 난입했다. 한 명은 권총을 꺼내 들었다. 내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은 한국인 구 가브리엘 신부였다. 회령본당 주임으로 그는 며칠 전 한국 수녀들의 피정을 지도하러 원산에 왔다. 그날 저녁 때 나는 그에게, 피정을 중단하고 회령으로 돌아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말했었다. 그러나 그는 그냥 있겠다고 했다. 내가 동료 수사들을 깨울 때 총을 든 정치보위부원이 따라붙었으나 그의 방문 앞은 그냥 지나쳐 갔다. 사실 구 가브리엘 신부는 나와 함께 살던 사람도 아니었다. 나는 그가 도망갈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우리가 압송된 직후 실시한 가택수색에서 그가 발각돼 함께 체포됐다"(파비아노 담 신부 증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