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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덕원의순교자들

[덕원의 순교자들] (25) 이재철(베드로) 신부

by 파스칼바이런 2014. 5. 25.

[덕원의 순교자들] (25) 이재철(베드로) 신부

자신의 안위보다 신자, 수도자 돕기에 앞장선 '선한 목자'

 

 

이재철 베드로 신부

 

▲출생 : 1912년 5월 12일 서울

▲세례명 : 베드로

▲소속 : 함흥교구

▲사제수품 : 1940년 3월 25일

▲소임 : 원산 제2보좌, 성진ㆍ청진 주임, 함경도 순회 사목

▲체포일자 및 장소 : 1950년 6월 25일 청진성당

▲순교일자 및 장소 : 1950년 10월 초, 청진(추정)

 

 

▲ 덕원신학교는 신학생에게 신학과 철학뿐 아니라 높은 수준의 교양과목을 가르쳤다. 사진은 덕원신학교 각 학교 학생대표들이 교장 안셀름 로머 신부와 사감 티모테오 비털리 신부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둘째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이재철 신부.

 

▲ 1941년 9월 27일 성진본당 초대 주임으로 임명된 이재철 신부가 신자들과 함께 본당 설립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하느님의 종 이재철(베드로) 신부는 함경도에서 마지막까지 본당을 지키며 신자들을 돌보고, 자유를 찾아 월남하는 사람들을 돕던 착한 목자였다.

 

이재철 신부는 1912년 5월 12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덕원신학교에서 소신학교와 대신학교 과정을 모두 마친 그는 1940년 3월 25일 구대준(가브리엘)과 함께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같은 날 사제품을 받은 덕원신학교 출신 동기는 조상익(베드로,전주교구)ㆍ이태준(야고보,연길교구)ㆍ김성환(빅토리오,연길교구)ㆍ홍건항(갈리스도, 평양교구) 신부가 있다.

 

덕원수도원의 '보석'인 신학교는 1927년 12월 1일 개교했으나 1935년 2월 10일 조선총독부로부터 정식으로 학교 설립인가를 받았다. 중등과정 5년, 고등과정 2년, 철학과정 2년, 신학과정 4년을 인가받은 덕원신학교는 1940년대 들어 한국교회 중심 신학교로 성장했다. 서울신학교가 공식인가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1942년 강제 폐교됨에 따라 덕원과 연길뿐 아니라 서울, 평양, 대구, 전주 등 전국의 신학생을 받아들여 가르쳐야 했기 때문이다.

 

좋은 신학교로 자리 잡으려면 장기적인 안목이 필요하다. 이 말은 신학교에서 성장하는 학생뿐 아니라 그들을 지도하는 교사에게도 해당한다. 배워야 할 것을 다 배우고 나면 자신이 배운 것을 동포들에게 잘 가르쳐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덕원신학교에선 신학생들에게 철학과 신학뿐 아니라 음악ㆍ한국어ㆍ한국사ㆍ동양사ㆍ지리ㆍ물리 등 다양한 학문을 가르쳤다.

 

"신학교 교수 수가 너무 적으면 안 됩니다. 유럽에서도 그렇듯이, 한국인 신부는 이 나라에서 높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과 똑같은 수준의 교육을 받지 않으면 신부로서 일하기 힘듭니다. 거기다 한국인들은 유럽인들보다 교육열이 훨씬 높습니다.… 그러므로 한국인 신부들을 교육하는 데 소홀히 했다는 비난을 듣지 않으려면 철학과 신학 강의는 될수록 박사 학위를 받은 교수가 해야 합니다"(안셀름 로머 신부, 크리스소토모 슈미트 총아빠스에게 보낸 1930년 편지 중에서).

 

이렇게 좋은 교수진으로부터 사랑으로 양성된 이재철 신부는 사제품을 받고 원산본당 제2보좌로 부임했다. 특히 이 신부는 '키케로'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강론이 탁월했다. 덕원수도원의 요셉 쳉글라인 신부는 "내 한국어 실력이 너무 형편없어 갓 사제품을 받은 이 베드로 신부가 제2보좌로 원산에 파견됐다. 덕분에 나는 한국말 공부에 더욱 몰두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1941년 이재철 신부는 한반도 북동해안 북청과 나남 사이의 사목구 공백을 채울 선교 거점으로 설립된 성진본당 초대 주임으로 부임했다. "우리는 두 곳에 본당을 새로 설립했습니다. 하나는 성진인데, 그곳에서는 이철희(보니파시아) 수녀의 동생인 이재철(베드로) 신부가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 곳은 프리돌리노 짐머만 신부가 맡고 있는 계림입니다."(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 셰프트란의 슈미트 박사에게 보낸 1941년 10월 1일자 편지 중에서).

 

이재철 신부는 1945년 9월 청진본당 주임 마르코 바잉거 신부가 병사하자 제2대 주임으로 부임했다. 동해안 북쪽 항구도시인 함경도 청진은 러일전쟁 전에는 작은 어촌이었으나 1908년 일본이 이곳에 무역항을 열면서 발전했다. 1928년 청진에 철도가 놓이더니 1933년에는 만주로 가는 철로가 이어졌다. 함경북도에서 첫 번째로 설립된 청진본당에서 이 신부는 1945년 8월 해방 직후 소련군이 한반도로 진군하면서 벌어진 일본군과의 국지전을 피해 피난온 수도자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그 시점에 선교 지역은 온갖 전선 사이에 끼여 있었습니다. 항복을 거부한 일부 일본군은 무기를 산에 숨겨뒀습니다.… 이 베드로 신부는 본당을 지켜야 하기에 청진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사제관과 성당은 거의 비어 있었습니다. 이 신부는 최소한의 것만 빼고 나머지는 모두 안전한 곳에 숨겨뒀다고 했습니다. 청진본당엔 착한 한국인 이재철 베드로 신부가 모친과 함께 우리를 충심으로 접대해줬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3일 만에야 세수를 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배부르게 먹을 수 있게 됐습니다"(제르투르다 링크 수녀 증언 중에서).

 

1949년 5월 11일 덕원수도원에 있던 신부와 수도자들이 정치보위부원들에게 체포될 때 원산ㆍ고원ㆍ고산ㆍ영흥ㆍ흥남ㆍ함흥본당 신부들과 수사, 수녀들도 함께 잡혔다. 하지만 청진본당 이재철 신부와 강원도 이천본당 김봉식(마오로) 신부 이 둘은 체포를 면했다. 그래서 이 두 신부는 6ㆍ25전쟁 직전 체포될 때까지 비밀리에 함경도 청진, 회령, 웅기, 나남, 성진 지역 교우들을 돌보며 월남하려는 수도자와 신자들을 도왔다. 당시 정치보위부는 이 신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집에서 10㎞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성사를 주러 가도 미행이 붙었다. 그래도 이 신부는 공소 방문을 중단하지 않았다.

 

이 신부는 덕원수도원과 함께 원산수녀원이 폐쇄되자 본당에 파견 나와 있던 김안나(데레사) 수녀와 제삼례(율리아나) 수녀에게 수도복을 벗고 평복 차림으로 꾸미게 해 평양을 거쳐 월남하게 했다.

 

이 신부는 1950년 6월 25일 새벽 2시 30분께 청진성당에서 정치보위부원에게 체포됐다. 그 자리에는 당시 신학생이던 정환국(알로이시오, 부산교구) 신부가 함께 있었다. 같은 날 김봉식 신부와 이춘근(라우렌시오, 평양 서포본당 주임) 신부도 체포됐다. 1950년 10월 초순께(9일로 추정) 청진항만 등대에서 80여 명의 종교인들이 총살됐다. 청진본당 김 마리아 전교회장은 "이재철 신부도 이때 함께 순교했고, 시신은 바다에 던져져 수습할 수 없었다"고 증언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동료 수도자들 증언

 

"한국인 이 베드로 신부를 본당 신부로 내정해뒀습니다. 그는 매우 젊고 또 많이 배워야 하지만 열정만큼은 대단합니다. 이 베드로 신부에게 맡길 지역은 주민이 35만인데, 그들 가운데 흩어져 있는 가톨릭 신자부터 찾아내야 합니다. 현재 열심한 150명 정도만 모여 있습니다"(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 아달리코 뮐레바흐 신부에게 보낸 1941년 5월 23일자 편지 중에서).

 

"가끔 정치보위부 사람이 와서 이재철 신부와 같이 있는 사람들을 조사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신부님은 슬퍼서 우셨고, 나는 마음이 불안해 견딜 수 없어 민가에 숨어 있고 싶었습니다"(윤병원 마우라 수녀 증언 중에서)

 

"정치보위부에서 공산당원들이 와서 잠깐 문의할 것이 있으니 함께 정치보위부로 가자고 하는 것을 들으신 신부님께서는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음을 아시고 양복을 갈아입고 가시려 하셨습니다. 그러나 '즉시 올 터이니 빨리 가자'고 재촉해 제대로 입지도 못한 채 차에 실려 가신 후 소식이 끊어졌으니 치명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신부님께서 납치되신 다음 날이 주일이라 미사 참례하러 온 모든 교우가 이 비보를 듣고 어지신 목자를 잃게 된 설움을 참지 못해 성당 안은 순식간에 울음바다가 되고 말았습니다"(김윤숙 아녜스 수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