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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덕원의순교자들

[덕원의 순교자들] (23) 루페르트 (요셉) 클링자이스 신부

by 파스칼바이런 2014. 5. 23.

[덕원의 순교자들] (23) 루페르트 (요셉) 클링자이스 신부

한국인 사제 양성 못자리 일군 학자 수도자

 

 

루페르트(요셉) 클링자이스 신부 (Rupert Klingseis)

▲ 그림=김형주(이멜다)

 

▲출생: 1890년 1월 5일 뮌헨 마리아 힐프

▲세례명: 요셉

▲한국명: 길세동(吉世東)

▲첫서원: 1911년 10월 8일

▲종신서원: 1914년 10월 11일

▲사제수품: 1915년 7월 16일

▲한국파견: 1930년 11월 9일

▲소임: 덕원신학교 철학 교수

▲체포일자 및 장소: 1949년 5월 9일, 덕원수도원

▲순교일자 및 장소: 1950년 4월 6일, 평양 인민교화소

 

 

▲ 덕원수도원 방에서 명상에 잠겨 있는 루페르트 클링자이스 신부.

 

 

▲ 덕원신학교에는 원산대목구와 연길지목구, 평양지목구 신학생들이 주로 공부했다.

사진은 덕원신학교 신학생들이 수업하고 있는 모습.

 

하느님의 종 루페르트 요셉 클링자이스 신부는 독일에서도 저명한 철학자로 한국인 사제 양성에 평생을 바친 수도자였다. 그는 특히 한국인 신학생들의 학문적 식견을 넓히고 이들을 교수 요원으로 양성하기 위해 유럽 유학 주선에 노력했고 해방 후 우리말로 강의하기 위해 50이 넘은 나이에도 한국어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은 학자였다.

 

철학ㆍ신학 박사인 명석한 수도자

 

클링자이스 신부는 1890년 1월 5일 독일 바이에른 뮌헨의 외곽마을 마리아 힐프에서 태어나 '요셉'이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아버지가 굶어 죽었을 만큼 궁핍했지만, 그의 가정은 신앙심 깊은 성가정이었다. 어릴 때부터 명석했던 클링자이스는 14살이 되던 해인 1904년부터 마인 강변에 있는 상트 루드비히 소신학교에서 공부했고,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김나지움으로 옮겨 최고 성적으로 졸업했다.

 

1910년 가을 상트 오틸리엔수도원에 입회한 그는 '루페르트'라는 수도명으로 성직 지망 수련기를 시작, 1911년 10월 8일 첫서원을 했다. 그 후 로마 성 안셀모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이어 1914년 10월 11일 종신서원과 1915년 7월 16일 사제품을 받은 그는 1918년 뮌헨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클링자이스 신부는 1922년부터 1930년까지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철학대학 학장직을 맡아 철학 강의를 했고,수도원 부원장직도 함께 수행했다.

 

1930년 덕원신학교 철학 교수로 있던 크리소스토모 슈미트 신부가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보좌 아빠스로 선출돼 독일로 돌아오자 그를 대신해 루페르트 클링자이스 신부가 1930년 11월 9일 덕원수도원으로 파견됐다. 그는 1931년 1월 2일 엘리지오 콜러 신부와 함께 입국해 덕원신학교에서 15년 동안 철학과 윤리신학, 교회사, 라틴어를 강의했다.

 

그는 한국 이름 '길세동'(吉世東)처럼 한국인에게 조금이나마 더 보탬이 되고자 신학생 양성과 함께 피정 지도도 활발히 했다. 덕원신학교의 수업이 대부분 라틴말로 진행됐지만 그는 한국어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요즈음 학교 강의 외에 달마다 한 번꼴로 한국어 강론을 하고 있습니다. 강론 원고를 독일어로 작성해 내가 한국어로 번역한 다음, 곧 사제품을 받을 제자(노규채 아우구스티노)에게 넘겨 주면, 그는 한국인들이 알아듣기 쉬운 말로 일일이 문장을 고쳐 줍니다. 그렇게 원고가 완성되면, 유창하게 읽을 수 있을 때까지 저 혼자 맹연습을 해야 합니다. 시간이 흐르면 이 일이 조금씩 쉬워질 것입니다"(클링자이스 신부 1938년 12월 4일자 편지 중에서).

 

그 와중에도 1940년에는 국민 계몽 총서 제1권으로 「인간의 영혼은 물질인가 정신인가」를 펴내기도 했다. 영혼의 불멸성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그리스도교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결코 타협할 수 없음을 주장한 이 책은 5000부나 출간됐다.

 

1945년 8ㆍ15 광복과 함께 북한 땅을 점령한 공산군은 덕원수도원에 극심한 제약을 가했다. 전기는 물론 연료와 음식마저 단절되거나 제한됐다. 덕원수도원의 수도자들은 속옷가지가 누더기로 변해 가도 여벌이 없었다. 소련군의 진주와 북한 공산당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신학교는 계속 운영됐고, 그 역시 철학강의를 계속했다.

 

"내게는 수건이나 손수건조차 멀쩡한 것이 하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석탄을 때 본 것이 4년 전이었습니다. 아무튼 나는 얼어 죽을 정도는 아닙니다. 셔츠 두 개에 내의까지 껴입었습니다. 창문도 종이로 막아 뒀습니다"(클링자이스 신부 1949년 1월 14일자 편지 중에서).

 

루페르트 클링자이스 신부는 매우 뛰어난 기억력을 갖고 있었다. 전력 사정이 좋지 않아 시간전례(성무일도)를 바치다가 갑자기 정전돼 성당이 깜깜해질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그가 외우는 시편 소리만 성당에 울려 펴졌다. 반면, 그는 일상사에 대한 상식은 전혀 없었다. 물품이 귀해 덕원신학교에서 교수 신부나 손님들을 위해 짚신을 실내화로 대신 비치해 놓았는데, 그는 짚신을 어떻게 신는지 몰라서 항상 거꾸로 신고 다녔다.

 

일은 몹시 서툴렀지만 공동체 의식이 투철해 공동 소임에 절대로 빠지는 일이 없었다.

 

'나쁜 사상' 유포죄로 체포돼 순교

 

1949년 5월 9일 밤 11시에 북한 정치보위부원들이 덕원수도원에 난입해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 루치우스 로트 원장 신부, 아르눌프 슐라이허 부원장 신부, 루페르트 클링자이스 신부를 원산으로 압송했다. 이들은 5월 11일 다른 수도자와 함께 평양인민교화소로 이송됐고 감옥에서 재판을 받았다. 루페르트 클링자이스 신부는 영혼의 영원성을 주장하는 반공산주의 저술을 출판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돼 5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 모든 것은 이른바 '나쁜 사상' 때문이었다. 나쁜 사상이란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에 대치되는 성경과 그리스도교의 이념을 지칭하는 것이었다"(루치우스 로트 신부, 1950년 10월 편지 중에서).

 

루페르트 클링자이스 신부는 11개월간의 힘든 수감생활 끝에 1950년 4월 6일 성목요일에 평양인민교화소에서 가혹한 학대와 영양실조로 순교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동료 수도자들 증언

 

"루페르트 신부는 수업 시간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도 늘 기분 좋게 생활하고 성인처럼 기도합니다. 그는 강의를 잘하기 때문에 신학교에서 매우 인기가 좋습니다"(엘리지오 콜러 신부, 아달리코 뮐레바흐 신부에게 보낸 1940년 7월 14일자 편지 중에서).

 

"밀을 수확하는 시기가 오면, 공동체 전체가 수도원 농장으로 나가 밀을 베었는데, 그도 항상 밀 수확을 도왔다. 6월 하순이라 날씨가 더워서 멱을 감을 정도로 땀을 흘려가면서도 그는 싫은 내색하지 않고 일을 했다. 서투른 일을 너무나 열정적으로 하는 모습이 안쓰러워 다른 형제들이 아무리 말려도 공동 소임에 빠지는 법이 없었다. 수도 형제들은 하는 수 없이 그가 일하도록 놔두었고, 한 명이 뒤를 따라다니며, 그가 해놓은 일을 다시 고쳐 놓곤 했다. 덕원 수도원에서 그와 함께 생활했던 수도형제들은 그를 두고 기도하고 일하는 전형적인 베네딕도회 회원이라고 평했다. 그는 기도에 열심이었고, 학문 연구에도 매진했다. 그는 학식으로 쌓은 명성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겸손하게 살면서 모든 이들에게 친절했다"(덕원수도원 연대기 중에서).

 

"두달 뒤(1950년 10월), 나는 장 안토니오 수사와 오영길 이멜다 수녀와 함께 삽을 들고 다시 묘지로 가서, 신학교 교수이자 철학박사인 루페르트 신부님의 시신을 찾았다. 그분의 얼굴에는 빨래번호 273이 새겨진 손수건이 덮여 있었다. 바지는 원장 신부님 것을 입고 있었다. 루페르트 신부님은 임종 때 죄수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차림새로 매장되는 것을 루치우스 원장 신부님이 원치 않아 당신 바지를 그분께 입혀 드렸던 것이다. 루페르트 신부님은 나쁜 일이라곤 정말 하나도 한 적이 없다"(임근삼 콘라도 수사 증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