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원의 순교자들] (21) 김동철(마르코)신부 '단 한 명의 신자' 위해 끝까지 교회 지킨 파수꾼
김동철 마르코 신부
▲출생: 1913년 1월 3일 부산시 영주동 ▲세례명: 마르코 ▲사제수품: 1943년 3월 6일 ▲소임: 덕원신학교 교수, 평양대목구 안주ㆍ비현본당 주임 ▲체포일자 및 장소: 1950년 6월 27일 비현성당 ▲순교일자 및 장소: 1950년 10월 의주(추정)
▲ 덕원신학교 시절 소풍 나와 동기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김동철(뒷줄 가운데 흰색 셔츠 입은 이) 신부.
▲ 1943년 3월 6일 덕원수도원 성당에서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로부터 사제품을 받은 김동철 신부(왼쪽 초 들고 있는 이)가 가족 친지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동철(마르코) 신부는 덕원 자치수도원구 함흥대목구 소속 사제 가운데 유일한 남한 출신이다. 그는 1913년 1월 3일 부산시 영주동에서 김성준(요셉)과 박부경(베르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세례명은 마르코. 어머니 박부경은 병인박해 순교자 남종삼(요한) 성인의 외손녀이다. 또 부산교구 김동언(베드로, 1908~1981)) 신부가 그의 형이다. 김 신부 가족은 부산에서 경남 언양면(현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송대리로 이주해 살았다.
와세다대 중퇴하고 신학교 입학 김동철 신부는 언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가족이 일본으로 이사하게 되자 중등과정을 일본에서 마치고 와세다대학 전기공학과에 진학했다. 대학 재학 당시 그는 도쿄대교구 주교관에 유숙하며 일본어를 배우고 있던 원산본당 주임 파비아노 담 신부로부터 감화를 받고 대학을 중퇴하고 덕원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1943년 3월 6일 덕원수도원 성당에서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수품 직후 모교인 덕원신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일제 조선총독부에서 일본말로 미사를 하라는 압박이 심해져 덕원신학교 학장인 안셀름 로머 신부에게 일어를 잘하는 김 신부의 도움은 절실했다. 김 신부는 신학교에 있으면서 본당 신부가 여행 중이거나 부재 중일 때 함흥본당 사목을 돕기도 했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일본 본토와 한반도에 있는 미국인 선교사들을 모두 추방했다. 평양대목구는 1927년부터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사목을 전담하고 있었는데, 일본은 선교사들을 일제히 잡아 가두고 추방을 서둘렀다. 이에 1942년 6월 1일 전임 평양대목구장 오셰아 주교를 비롯한 메리놀회 사제, 수도자 전원이 본국인 미국으로 송환됐다. 메리놀회는 덕원신학교에서 평양대목구 출신 부제들을 최대한 서둘러 사제품을 줬지만 그래도 사제 수가 부족했다.
평양대목구장직은 노기남 서울대목구장이 잠시 겸직했다가 1943년 3월 9일 홍용호 신부가 제6대 평양대목구장으로 임명됐다. 대목구장 착좌식을 마친 홍용호 주교는 메리놀회 선교사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각 대목구에 신부 파견을 요청했다. 이때 서울대목구 김영식(베드로) 신부, 함흥대목구 한도준(마태오) 신부, 연길대목구 김충무(클레멘스)ㆍ한윤승(필립보) 신부 등 4명이 파견됐다.
그러다 평양대목구에 파견돼 사목활동을 하던 서울대목구 신부들이 1944년 12월 서울로 되돌아가자 덕원대목구에서 김동철(마르코)ㆍ최병권(마티아)ㆍ이춘근(라우렌시오) 신부가 파견됐다.
김동철 신부는 1944년 11월 평안남도 안주본당 제6대 주임으로 임명됐다. 일본 경찰의 감시와 갖가지 제약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일 수 없었지만,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자들에게 자치 능력과 자급자족 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앞장서서 모범을 보였다. 손수 농사를 짓는 한편 염소도 기르고, 묘목을 키우기도 했다. 1945년 4월 9일에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를 초대해 분원을 설립하고, 광복 후엔 '우리말 공부교실'을 개설, 좋은 결실을 거뒀다.
8ㆍ15 광복을 맞아 김 신부는 일본에서 돌아온 부모와 여동생, 질녀 등이 경북 예천에 자리 잡았다는 소식을 듣고 38선을 넘어 가족을 만났다. 가족과 함께 열흘간 지낸 김 신부가 북으로 돌아가려 하자 어머니 박씨는 "작은 신부야. 어디서든지 천주님을 위해 일하면 다 전교 사업이 아니겠느냐. 네 형 신부의 교구에서 사목함이 어떠하냐"며 극구 만류했다.
이에 김 신부는 "자기 본당을 버릴 수 없습니다. 38선이 무너지면 바로 첫차로 내려와 부모 형제를 만나뵙게 될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천당 가서 만납시다"라며 형 신부의 축복을 받은 후 다시 안주본당으로 왔다.
김 신부는 1946년 10월 평북 비현본당 주임으로 전임됐다. 일제 탄압으로 한동안 폐교됐던 성심학교를 다시 열고 가난한 아이들을 모아 가르쳤다.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운영되던 이 학교는 후원자 대부분이 공산당에게 재산을 몰수당하고 숙청돼 재정적으로 크게 어려워졌다. 김 신부는 할 수 없이 교사 2명을 감원하고 자신이 직접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때 감원된 교사 중 한 명이 불만을 품고 면 내무서에 "김 신부는 교회에서 반소련, 반정부 강론을 할 뿐 아니라 학교에서도 당국이 지시한 교육방침을 따르지 않고 종교교육을 한다"고 고발했다. 이 고발로 김 신부는 체포돼 감옥에 갇혔지만 평양대목구의 노력으로 사흘 만에 풀려났다. 하지만 성심학교는 1947년 여름 강제 몰수됐다.
1949년 5월 14일 평양대목구장 홍용호(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의 불법 납치를 시작으로 평양대목구 내 성직자들의 수난이 본격화됐다. 김동철 신부는 머지않아 자신에게도 수난의 때가 올 것으로 예측하고 신부들의 피랍 소식이 전해올 때마다 성체를 숨기는 일을 거듭했다. 그때마다 그는 "목자는 자기 양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는 홍 주교의 당부를 되새기면서 본당에 단 한 명의 신자가 남아 있어도 자신은 교회를 끝까지 지키겠다는 결의를 신자들에게 밝혔다.
유치장 안에서도 초연
김 신부의 성품은 대범하고 용의주도했다. 성심학교 사건으로 체포돼 내무서 유치장에 갇혀 있을 때도 태평스럽게 유치장 안에서 사흘간 잠만 잤다. 또 그는 자신 곁에 늘 붙어 다니던 감시원과 친해져 장기를 함께 둘 정도였다. 또 자신이 체포되면 살아선 못 나올 줄 알고 모든 성물을 수녀와 신자들을 시켜 은밀한 곳에 감추었다.
김동철 신부는 1950년 6월 27일 밤 11시께 비현본당 사제관에서 평양대목구 성직자 가운데 마지막으로 체포돼 끌려갔다. 이로써 평양을 비롯한 평안도는 한 사람의 목자도 없는 '침묵의 교회'가 되고 말았다. 그는 체포되던 날 저녁에 성당 종을 울려 신자들을 성당에 모으고는 짧은 이별 강론을 했다. 그는 교우들을 향해 "부디 조용히 하시오. 모든 것이 천주의 섭리로 되는 것이니 소동하지 마시오" 하고 신신당부했다.
내무소로 끌려간 김 신부는 그 후 의주교화소에서 찐 옥수수 한 주먹으로 끼니를 때우며 고단한 감옥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부였다. 이후 다시는 김 신부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그의 행방은 불분명하나 1950년 10월 인민군의 수용소 집단학살 때 순교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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