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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덕원의순교자들

[덕원의 순교자들] (20) 김종수(베르나르도) 신부

by 파스칼바이런 2014. 5. 20.

[덕원의 순교자들] (20) 김종수(베르나르도) 신부

수도원 재정, 수련 책임 맡은 믿음직한 성직 수사

 

 

김종수 베르나르도 신부

▲ 그림=김형주(이멜다)

 

▲출생: 1918년 2월 12일, 북간도 삼원봉

▲세례명 및 수도명 : 베르나르도

▲첫서원: 1943년 9월 8일

▲사제수품: 1948년 4월 6일

▲소임: 덕원수도원 재정 부책임 및 한국인 수도자 수련장

▲체포일자 및 장소: 1949년 5월 11일 덕원수도원

▲순교일자 및 장소: 1950년 10월 5일 평양(추정)

 

 

▲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와 덕원신학교 교수진이 신학생들과 한자리에 모였다.

1936년에 촬영한 이 사진 가운데 앞줄 오른쪽 세번째 학생이 김종수 신부로 추정되고 있다.

 

▲ 연길교구는 한국천주교회사처럼 선교사보다 먼저 신앙에 목말라한 한국인 평신도에 의해 복음화됐다. 사진은 연길교구장 테오도르 브레허 주교 아빠스가 1937년 10월 18일 삼도구공소를 방문, 견진성사를 주례하고 있다.

 

 

"1896년, 한 사내가 천주교라는 종교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사내는 이 종교를 더 많이 알고 싶어서 친구 3명과 함께 750㎞ 떨어진 서울로 길을 떠났다. 아마도 그는 서울의 초가지붕들 사이에서 교회 하나가 삐죽이 올라오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은 듯했다. 사내들은 회령을 거쳐 청진으로, 또 거기서부터는 작은 연안선을 타고 원산으로 향했다. 육지를 가로지르는 행군을 시작하려는 찰나에 그들은 천주교 신자들을 만났다. 신자들이 그들을 루이 에우제브 아르망 브레 신부에게 데리고 갔다. 더는 서울까지 갈 필요가 없었다. 사내들은 브레 신부에게서 복음에 관한 말씀을 듣고 즉각 세례를 받았다"(암브로시오 하프너 신부 「김이기 혹은 한국의 봄」 중에서).

 

이 글 내용처럼 중국 길림성 용정시 호천개 출신 김영렬(요한 세례자)과 '북관(北關) 12사도'가 펼친 간도 지방 선교 활동은 마치 한 편의 조선복음전래사를 보는 듯하다. 간도 지역 조선인 이주민 선교의 중심지는 1907년 용정본당에 이어 1909년에 설립된 삼원봉본당이다.

 

연변조선자치주 삼원봉에서 출생

 

덕원의 순교자 가운데 하느님의 종 김종수(베르나르도) 신부가 이곳 삼원봉 출신이다. 그는 1918년 2월 12일 오늘날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자치주 용정시 영암동인 삼원봉에서 태어났다. 세례명은 베르나르도.

 

당시 삼원봉에는 훗날 서울대목구 보좌 주교였다가 초대 대전교구장이 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아드리앵 조제프 라리보 신부가 지은 아름다운 성당과 학교가 있었다. 또 본당 소유의 언덕에 멀리서도 볼 수 있도록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다. 이곳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대해 하르트만노 에벌 신부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삼원봉 신자들의 신앙생활이 발전하는 모습을 살펴보자면, 매일 저녁 성당에 모여 공동 저녁기도를 바치는 것을 들 수 있다. 남녀 학생들이 하루씩 번갈아 가며 선창을 한다. 어린아이들도 짧지 않은 저녁기도를 쉽게 따라 익힌다.…신자들이 집에서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은 매우 보기 좋았다. 한국교회 초창기를 떠올려도 쉽게 이해가 된다. 본당 공동체 모두 하나 된 마음으로 성당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더 자주 보고 싶다"(하르트만노 에벌 신부, 1926년 「삼원봉 본당 연대기」 중에서).

 

삼원봉은 본디 부촌이었지만 1919년 마적들의 약탈로 가난해진 작은 마을이다. 마적들의 손에 부모가 죽자 어린 김종수는 살아남은 친척의 손에 이끌려 회령으로 가서 전임 삼원봉 주임이었던 빅토리노 차일라이스 신부의 도움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는 1935년 8월 31일 17살에 덕원소신학교에 입학했다. 그해 덕원신학교에선 이춘근(라우렌시오, 덕원 순교자, 하느님의 종) 신학생이 신학교 가는 길에 마적들에게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마적들은 그의 어머니를 협박해 몸값을 요구했지만, 어머니는 몸값을 줄 돈이 없었다. 이춘근 신학생은 3주 동안 인질 17명과 함께 둘씩 묶여 초가에 갇혔다. 그러다 그는 사슬을 푸는 데 성공했고, 감시자가 잠자는 사이 그곳을 빠져나와 공포에 떨면서 사흘 밤낮을 깊은 숲속에서 헤매다 겨우 길을 찾아 용정하시본당 코르비니아노 슈레플 신부한테로 무사히 피신했다.

 

중등 과정을 마친 후 1942년 9월 덕원수도원에 입회, 세례명 그대로 수도명으로 삼은 김종수 성직 지망 수사는 지극히 평범한 수도자였다. 다른 한국인 수도자처럼 장상들이 걱정할 만큼 건강이 나쁘지 않았고, 시험들도 무난히 통과해 달리 눈길을 끌 일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 심지어 김종수 신부가 첫서원을 한 1943년 9월 8일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의 편지에도 그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다. "오늘 한 성직 지망 수련자의 첫서원식이 있었습니다.…우리에게는 수도서원을 한 한국인 사제 두 사람, 즉 김(치호) 베네딕토 신부와 이(춘근) 라우렌시오 신부, 그리고 성직 지망 수사 한 명이 있습니다"(아달리코 뮐레바흐 신부에게 쓴 편지 중에서).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수도자

 

기록상으로는 존재감이 없어 보이지만 수도원 안에서 맡은 보직을 보면 그가 수도원 공동체 내에서 믿음직하고 견실하다는 평을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48년 4월 6일 사우어 주교 아빠스에게 사제품을 받은 김종수 신부는 곧바로 덕원수도원 재정 담당 부책임자로 임명됐다. 그는 외부인과 수도원 일을 협상하고 수도원 미래를 기획하는 일을 맡아 했다. 또 그는 1949년부터 한국인 수사 18명을 책임 맡은 수련장으로 임명됐다. 수도원의 두 기둥이라 할 수 있는 재정과 수련자 양성 책임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김종수 신부가 덕원수도원에서 이 땅의 선교사업을 위해 얼마만큼 중책을 맡아 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는 1949년 5월 11일 덕원 수도원에 있던 모든 독일인 수도자들 그리고 한국인 최병권(마티아)ㆍ김이식(마르티노)ㆍ김치호(베네딕도) 신부와 함께 체포돼 평양 인민교화소로 압송됐다. 1949년 8월 5일 평양 인민교화소에 수감됐던 대부분의 독일인 수도자들이 옥사덕으로 분리, 수용된 후 그의 행방은 알 수 없다. 1950년 10월 5일 인민군이 북으로 퇴각할 때 피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동료들 증언

 

"지금까지 당신이 밤늦도록 우리를 찾아 치료하고, 만날 때마다 좋은 소식으로 위로해 주시면서 우리에게 기울이신 노력을 생각하면 감사와 감동의 눈물이 우리 가슴을 적십니다. 모든 동료 수도자의 이름으로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기서 우리가 시달리는 질병들은 설사, 소화불량, 발열, 종기입니다. 우리를 정기적으로 방문할 수 없다면, 사정이 허락되는 한 응급 상황에 대비할 다이아진, 아스피린 같은 구급약과…폐병을 앓고 있는 56호(김종수 베르나르도 신부)에게는 간유나 다른 강장제를 마련해 주시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1949년 어느 날 평양인민교화소에서 루치우스 로트 신부가 자신들을 돕던 주치의 노재경씨에게 보낸 비밀 편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