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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덕원의순교자들

[덕원의 순교자들] (17) 솔라누스(루돌프) 헤르만 수사

by 파스칼바이런 2014. 5. 17.

[덕원의 순교자들] (17) 솔라누스(루돌프) 헤르만 수사

수용소에서도 늘 제일 먼저 경당 찾아 기도 바쳐

 

 

솔라누스 (루돌프) 헤르만 수사 (Solanus Hermann)

▲ 그림=김형주(이멜다)

 

▲출생 : 1909년 5월 19일. 독일 아욱스부르크 탈

▲세례명 : 루돌프

▲첫서원 : 1933년 5월 13일

▲종신서원 : 1936년 7월 7일

▲한국파견 : 1936년 10월 11일

▲소임 : 건축 도장 담당

▲체포일자 및 장소 : 1949년 5월 11일, 덕원 수도원

▲순교일자 및 장소 : 1950년 12월 13일, 만포 관문리 수용소

 

 

 

▲ 수도원 입회 직전에 촬영한 헤르만 수사의 모습.

 

 

▲ 1938년 5월 15일 서울 성 베네딕도 수도원 아빠스좌 승격 25주년을 기념해 덕원 수도원을 배경으로 수도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맨 윗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솔라누스 헤르만 수사다.

 

 

▲ 덕원 수도원 평수사 경당.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성직수사들에게만 가대의무(라틴어 성무일도를 노래하는 일)가 있었으므로, 평수사들은 별도로 마련된 경당에서 모국어로 성무일도를 바쳤다.  

 

 

한국어를 사랑해 단어장을 만들어 들고 다니며 한글을 익힌 수사. 또 한국 어린이들을 너무 사랑해 그 아이들이 식민지 강점기 일본말을 쓰고 점차 일본인으로 동화돼 가는 것을 너무 가슴 아파한 수사. 솔라누스 헤르만 수사에 대한 동료 수도자들의 기억이다.

 

솔라누스 헤르만 수사는 1909년 5월 19일 독일 아욱스부르그 일러베르그 노이울름 지방 '탈'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철공 노동자이던 피우스 헤르만과 마리아 린터 사이에 태어났다. 세례명은 루돌프였다.

 

헤르만 수사는 독일의 여느 아이들처럼 가정과 초등학교에서 튼실한 신앙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초등학교 졸업 후 4년간 농사일을 배운 그는 1923년부터 3년간 바이센호른 도장(塗裝)장인 하베레스의 수습공으로 일하면서 그림과 칠을 배웠다. 이후 그는 1926년 기능사 시험을 통과해 칠장인이 된 후 1931년 2월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입회 전까지 칠장이로 생활했다.

 

'솔라누스'라는 수도명으로 수련기를 시작한 그는 1933년 5월 13일 첫서원을, 1936년 7월 7일 종신서원을 했다. 첫서원 직전 그는 부모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썼다. "거룩한 수도복을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쁩니다. 이 수도복을 다시 벗어야 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처음에는 아름답게 이어진 산등성이를 보노라면 고향의 산이 생각나 향수병도 앓았지만 지금은 괜찮습니다".

 

솔라누스 헤르만 수사는 종신서원을 받은 그해 10월 11일 덕원 수도원 선교 수사로 파견됐고, 그곳에서 건축 기술자로 일했다.

 

덕원 수도원 생활에 대해 그는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덕원 수도원을 처음 봤을 때 그 멋진 모습이라니! 이 머나먼 한국에서 동료 수도자들을 만나고, 독일말을 다시 듣자 고향에 있는 것 같습니다.…한국어 문법책을 받자마자 이 진기한 글자와 친해지려 애쓰고 있습니다"라고 부모에게 편지를 썼다(1936년 11월 30일자 편지 중에서).

 

솔라누스 하우저 수사는 한국민 특히 한국 어린이와 한국어를 정말 사랑했다. 한국에 온 지 갓 1년을 넘긴 1937년 12월 2일자 편지에서 그는 "처음에는 원산에서 염료를 사면서도 계산서에 쓰인 글을 한 줄도 읽지 못해 한국인 수사에게 번역을 부탁해야 했습니다. 한국말로 의사소통 하기 위해 처음에는 제가 직접 만든 작은 단어장을 항상 지니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단어를 찾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이제는 단어장이 꼭 필요하지는 않습니다"라고 부모에게 자랑했다.

 

그는 또 "제 밑에서 일하는 한국인 실습생들은 부모가 매우 가난해 옷이라곤 몸에 걸치고 있는 한 벌뿐입니다. 이들은 번번이 저에게 걱정을 안겨 줍니다. 어떤 아이는 양말이 없고, 어떤 아이는 저고리가 없습니다"(1934년 4월 17일자 부모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라며 안타까워하고 가난한 아이들에게 자신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다 내어줄 만큼 사랑으로 돌봤다.

 

그의 이런 행동에 동료 에지디오 아이히호른 수사는 솔라누스 헤르만 수사 부모에게 그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에 "솔라누스 수사는 모두에게 늘 친절하고 남을 도와주려고 애쓴 형제였습니다"라고 회고했다.

 

솔라누스 헤르만 수사는 오랫동안 심장 질환을 앓고 있었는데 동료 수도자에게 불편을 줄까 봐 알리지 않았다. 1949년 5월 덕원 수도원이 폐쇄되고 동료 수도자들과 함께 평양 인민교화소에 수감된 헤르만 수사는 유엔 연합군이 북진하자 옥사덕으로, 또 만포 강제수용소로 이송됐다.

 

심장 통증이 있던 그는 평양 인민교화소에서부터 몹시 쇠약해졌다. 옥사덕 수용소로 이송된 그는 끔찍한 굶주림으로 갈수록 쇠약해졌고 설사까지 계속했다. 1950년 늦가을 옥사덕 수용소를 떠나 만포로 이송될 때는 완전히 기력을 잃었다. 그런데도 끝까지 무거운 몸을 끌고 방공호까지 이르렀던 그는 1950년 12월 13일 동료 수도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생을 마감했다.

 

동료 수도자에게 솔라누스 헤르만 수사의 죽음은 극한의 절망과 맞닥뜨린 순간이었다. 그들은 한 달여 사이에 동료 네 명의 죽음으로 목격해야 했기 때문이다. 1950년 11월 6일 카누트 다베르나스 신부, 11월 15일 그레고르 조르거 신부, 12월 12일 힐라리우스 호이스 수사, 다음날 솔라누스 헤르만 수사가 순교했다.

 

리길재 기자 teotakos@pbc.co.kr

 

동료들의 증언

 

"이 작달막한 수사는 항상 튼튼하고 강인해 보였다. 그래서 수용소에서도 숯 굽는 일 같은 가장 힘든 작업은 늘 그의 몫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극심한 심장 통증을 느꼈고 방공호 구석 자리에 거의 의식을 잃은 상태로 누워 있었다. 12월 13일 이른 아침에 그는 그르렁거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 급히 가 보니, 이미 의식이 없고 병자성사만 겨우 받을 수 있었다.…솔라누스 수사의 죽음은 당시 아무런 희망이 없던 우리 처지를 바로 보여준 셈이었다"(디오메데스 메페르트 수녀 증언 중에서).

 

 "솔라누스 헤르만 수사는 매일 저녁 노동으로 기진맥진한 채 수용소로 돌아와 매일 먼저 경당으로 향하던 기억이 난다. 다 떨어진 남루한 옷을 입은 채 피곤에 지친 모습, 깊은 명상에 잠긴 숯검댕 투성의 얼굴은 많은 이의 기억 속에 옥사덕 수용소의 상징으로 오랫동안 각인됐다"(「북한에서의 시련」중에서).

 

 "경비병의 감시하에 시신을 움막 앞에 매장하려 했지만 땅이 얼어 우선 눈으로 덮어 두었다. 밤낮으로 연합군 비행기가 날아다녔고 방공포도 쉼 없이 불을 뿜었다. 추위와 굶주림, 포성, 병들어 죽어가는 형제들, 사방의 무장 병력들, 그 와중에 공동기도도 미사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다가올 비극은 지금까지의 체험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잔혹했다"(「분도통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