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원의 순교자들] (18) 힐라리우스 (베네딕토) 호이스 수사 39년간 목공, 간호 등 다방면에서 헌신한 '만물박사'
힐라리우스 (베네딕토) 호이스 수사 (Hilarius hoiß) ▲ 그림=김형주(이멜다)
▲출생: 1888년 6월 27일, 독일 운터라우(Unterau) ▲세례명: 베네딕토 ▲한국명: 허희락(許喜樂) ▲첫서원: 1910년 8월 15일 ▲한국파견: 1911년 1월 7일 ▲종신서원: 1913년 11월 1일 ▲소임: 숭공학교 교사, 수도원 건축 담당 ▲체포일자 및 장소: 1949년 5월 11일, 덕원수도원 ▲선종일자 및 장소: 1950년 12월 12일, 만포 관문리 수용소
▲ 숭공학교 교사로 한국에 파견된 힐라리우스 호이스 수사가 학생들과 함께 제작한 수레를 둘러보고 있다.
▲ 대령동성당 전경. 힐라리우스 호이스 수사가 지은 이 한국인 성당은 마적에 의해 1935년 전소됐다.
▲ 약초를 이용한 자연요법 치료에 뛰어났던 오이스 수사가 한국인 환자들을 간호하고 있다.
'수도원의 만물박사' 힐라리우스 호이스 수사. 목공ㆍ철공ㆍ도장ㆍ요리ㆍ약초재배ㆍ제약ㆍ간호 기술에 뛰어난 그는 성 베네딕도회 서울ㆍ덕원ㆍ연길ㆍ일본 도노가오카 수도원의 건축기사,주방장, 의사 노릇을 도맡아 한 살림꾼이다.
호이스는 1888년 6월 27일 독일 뮌헨 프라이징 교구 코헬제의 작은 마을 운터라우에서 아버지 안드레아스 호이스와 어머니 마리아 보오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례명은 베네딕토.
아버지 안드레아스는 날품팔이였고, 어머니 마리아는 그가 네 살 되던 해에 뇌막염으로 숨져 호이스는 외삼촌 집에서 자랐다.
호이스는 초등학교 졸업 후 운터파이센부르그에서 마차 수리 기술(제차도제)을 배웠다. 이곳 본당 신부는 그가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할 때 기꺼이 추천서를 써줬다. 본당 신부는 추천서에 "호이스는 규정에 따라 축일과 의무축일에 자주 성체를 영했으며, 기쁜 마음으로 정비공장에서 일했고, 필요할 때에는 농사일도 했다. 그의 품행은 모범적이고 윤리적이며 종교적이다"라고 적었다.
1907년 10월 12일 입회한 그는 '힐라리우스'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련기를 시작했다. 1910년 8월 15일 첫서원을 한 그는 1911년 1월 7일 서울 백동수도원으로 파견돼 기술학교인 '숭공학교'에서 목공과 마차 수리 기술을 가르쳤다. 서울 백동수도원에서 화급히 필요한 사람이었던 호이스 수사는 한국 도착 즉시 작업장을 만들어 한 유럽인이 부탁한 헌 마차를 완전히 새것처럼 수리해 첫 주문을 지체없이 완수했다. 그는 1913년 11월 1일 서울 백동수도원에서 종신서원했다.
그의 활동에 관해 1915년 상트 오틸리엔 「선교잡지」는 "현재 한국 민중의 빈곤을 고려하건대, 이 실업학교가 당분간은 이 민중을 사회적으로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 수사들은 실제 작업을 지도할 뿐 아니라 몸소 열심히 함께 일한다. 이를 통해 육체노동이 인간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높인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소개했다.
힐라리우스 호이스 수사는 숭공학교에서 기술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아픈 학생들을 기꺼이 돌보는 등 사랑으로 대했다. 1920년 초 서울에 유행성 독감이 크게 번져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다. 보니파시우스 사우어 아빠스는 이 사실을 보고하면서 "이 전염병으로 하루에 200명씩이나 사망했다. 특히 어린아이들이 많이 희생됐다. 만일 우리가, 특히 힐라리우스 호이스 수사가 돕지 않았다면 사망자가 훨씬 많았을 것이다"(1920년 1월 20일자 편지 중에서)라고 적었다.
'만물박사'였던 호이스 수사는 새로 생기는 선교지마다 파견돼 북한과 중국 땅 간도와 연길 지역에 많은 한국인 선교기지를 지었다. 덕원수도원을 세우기 전 원산에 첫 번째로 파견된 기능공 수사였던 그는 원산성당을 고쳐 임시 수도원 시설을 갖췄다. 또 이곳에 목공소와 농장, 진료소를 세워 쉼 없이 일하다 과로로 지쳐 패혈증에 걸려 열흘간 입원하기도 했다.
그는 1921년 두만강 건너 중국 땅 북간도로 파견돼 팔도구ㆍ삼원봉ㆍ용정ㆍ대령동ㆍ합마당 성당과 학교, 주택 등을 지었다. 또 함흥ㆍ흥남 펠리치타 성당을 세웠다.
북간도에서 성당 건축 공사를 할 때마다 호이스 수사는 마적들을 피해 밤마다 신자들 집을 옮겨 다니며 잠을 자야 했다. 그는 또 성당 건축일 뿐 아니라 사제관 주방 아주머니에게 유럽 요리 비법을 전수하고 빵 굽는 법을 가르쳤다. 또 마적과 일본군의 위협에 대비해 성당을 지키기 위해 밤마다 몽둥이를 들고 보초를 서야 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새 연길지목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꼽혔던 그가 지은 대령동 성당은 1935년 마적들에 의해 불타버렸다.
1941년 덕원수도원이 보이론연합회로부터 인수한 일본 도노가오카수도원의 '대목수'로 파견됐다가 1943년 귀국한 호이스 수사는 모든 일을 놓고 수도원 주변 숲에서 약초를 찾아 모으는 일을 했다. 한국에 파견된 지 32년 만에 겨우 다소 한가한 소임을 맡게 된 것이다.
힐라리우스 호이스 수사는 1949년 5월 11일 덕원수도원에서 동료 수도자와 함께 체포돼 평양 인민교화소로 끌려갔다. 이후 옥사덕 수용소를 거쳐 만포까지 '죽음의 행진'을 했다.
수용소에서도 잠시라도 쉬지 않았던 그는 동료 수도자들을 위해 감실과 자그마한 촛대 등을 만들어 경당을 꾸몄다. 또 '귀향 여행'을 위한 산책용 지팡이를 만들어 동료들에게 나눠줬다. 아울러 그는 동상으로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다리가 붓자 강제 노역을 하고 돌아온 동료들의 낫을 갈아주고 수도자들이 채집해온 약초로 자연요법 치료제를 만들어 제공했다.
동료들에게 끝없이 도움을 줬던 힐라리우스 호이스 수사는 1950년 12월 12일 갑작스럽게 운명했다. 영양실조와 심한 동상이 원인이었다. 그의 유해는 한국인 포로들이 운반해 매장했고, 다음날 수도자들은 그의 무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동료들의 증언
"힐라리우스 수사는 여러 본당에 도움을 줬다. 상황에 따라 주업이 달라지지만, 아무튼 혼자서 목공과 철공, 건축기사, 주방장, 의사 노릇까지 해냈다"(「서울 백동수도원 연대기」, 1922년).
"힐라리우스 호이스 수사는 감옥에서부터 지속적인 설사로 인해 매우 약해졌으며, 다리가 부었기 때문에 수용소에서는 처음부터 대부분 앉아서 쉬운 일만 했다. 그는 약용 식물에 정통해 있었으며,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의 희망에 따라 특히 한국의 식물 연구에 전념했다. 그는 나에게 유용한 충고를 많이 해줬으며, 할 수 있는 한 자주 나에게 식물에 관한 설명을 해줬고, 내가 돌아다니면서 그런 식물을 수용소로 가져오면 맞다는 것을 확인해 줬다. 그는 세밀한 작업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거칠고 억센 큰 손으로 온갖 종류의 아름답고 유용한 물건을 만들어 냈다.… 1950년 12월 12일 새벽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그에게는 진정한 구원을 의미했다. 하느님께서는 이 위대한 명상가를 분명히 잘 받아들이셨을 것이다"(강제 수용소의 의사 디오메데스 메퍼트 수녀 증언 중에서).
"힐라리우스 수사는 위대한 기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특히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서도 묵주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북한에서의 시련」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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