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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덕원의순교자들

[덕원의 순교자들] (16) 바실리우스 마틴 하우저 수사

by 파스칼바이런 2014. 5. 16.

[덕원의 순교자들] (16) 바실리우스 마틴 하우저 수사

'위대한 성인' 꿈꿨던 위대한 순교자

 

 

바실리우스 마틴 하우저 수사 (Basilius Hauser)

 

 

▲출생: 1886년 11월 10일, 독일 뮐도르프 폴링 지역 바일러 발트

▲세례명: 마틴

▲한국명: 하연근(河蓮根)

▲첫서원: 1913년 10월 12일

▲한국파견: 1914년 5월 3일

▲소임: 서울ㆍ덕원 수도원 주방 담당

▲체포 일자 및 장소: 1949년 5월 11일, 덕원 수도원

▲순교 일자 및 장소: 1950년 2월 14일, 옥사덕 수용소

 

▲ 서울 백동수도원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 바실리우스 하우저 수사.

그의 몇 안 되는 사진 중 한 장이다.

 

▲ 하우저 수사는 평생 수도원 주방일을 하며 묵묵히 수도생활을 하면서도 한국인 수도자를 배려해 따로 한식을 준비하는 등 정 많은 수도자였다. 사진은 덕원신학교 식당에서 신학생들이 하우저 수사가 마련한 음식으로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

 

 

바실리우스 하우저 수사는 '하연근'(河蓮根)이라는 자신의 한국 이름처럼 드러나지 않고 자기 소임을 묵묵히 수행하는 은둔의 수도자였다.

 

미혼모 하녀 아들로 사제 꿈 포기

 

그는 1886년 11월 10일 독일 뮐도르프 폴링 지역 바일러 발트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테레스 하우저는 미혼모 하녀였다. 마틴이란 세례명으로 영세한 그는 특별한 재능도 없었고 덩치도 작은 허약한 소년이었다. 초등학교 성적도 모든 과목에서 가장 낮은 평점을 받았다. 하지만 근면하고 성실했던 그는 품행 평가엔 언제나 '매우 칭찬할 만함' '훌륭한 태도를 지님'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우저는 10살 때부터 9년 동안 성당 복사를 섰다. 처음 복사를 서면서 사제의 꿈을 키웠으나 몇 해 안 돼 미혼모의 아들은 신학교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포기했다.

 

하우저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제빵사가 되기 위한 도제 수업을 받았다. 하지만 기능장이 채찍을 휘두르며 학대해 그만뒀다. 다시 제빵사에 도전할 용기가 없었던 그는 도제가 아닌 제빵 조수로 일했다.

 

사회생활이 고단할수록 하우저는 성당을 찾았고 본당의 거룩한 미사 모임과 단체 활동을 활발히 하면서 신심을 키워나갔다

 

주방장 평생 소임

 

인첼본당 신부는 하우저의 수도원 입회 추천서에 "그는 우리 본당 공동체에서 가장 열심하고 착실한 젊은이입니다. 필수적인 그리스도인의 의무들을 완수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기도와 성사 참여를 통해 덕성스러운 생활 속에서 진보하려고 노력합니다"라고 적었다. 또 마틴 하우저가 마지막으로 일한 곳의 제방 기능장은 "나는 이 청년을 떠나보내는 것이 정말 내키지 않습니다"라고 추천서에 아쉬움을 표했다.

 

정작 하우저는 자신의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입회 청원서에 "위대한 성인이 되고 싶다"고 우직하게 고백했다. 하우저는 그의 소망대로 위대한 순교자가 됐다.

 

1911년 10월 5일 그는 바실리우스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련기를 시작했다. 바실리우스 하우저 수사는 1913년 10월 12일 첫서원을 했고, 1914년 5월 3일 한국으로 파견됐다. 그는 서울과 덕원수도원에서 주방장 소임을 맡았다.

 

바실리우스 하우저 수사는 평생 수도원 주방에서 일했으므로 「연대기」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이 조용한 주방장에 대해 수도자들은 그가 구운 성탄 쿠기를 칭찬하거나 사과주와 맥주를 제조하면 기뻐했을 뿐이다. 심성이 곱고 누구보다 배려심이 컸던 하우저 수사는 한국인 수도자와 신학생들에게 각별한 사랑을 쏟았다. 그는 신학교 부엌 옆에 따라 한국식 부엌을 꾸며 하루 세끼 밥을 짓고 한식 반찬을 만들어 한국인 형제들에게 제공했다. 또 50살이 넘어서도 신학생들을 위해 자신의 독방을 내어주고 공동침실로 옮겨갔다. 그리고 선교 본당을 맡은 독일인 신부들이 수도원을 방문하면 여행 가방에 소시지나 버터 덩어리를 넣어 슬쩍 건네주곤 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덕원 수도원을 폐쇄할 때 바실리우스 하우저 수사도 동료 수도자와 함께 1949년 5월 11일 체포돼 평양을 거쳐 6월 옥사덕 강제수용소로 이송됐다. 그는 수용소에서도 동료 수사들과 수녀들을 위해 부엌 일을 했다. 천식과 영양실조로 고통받은 그는 다른 수도자들에게 영양을 공급했지만 정작 자신은 음식을 거의 소화해 내지 못했다. 혹독한 수용소 환경을 이겨내지 못한 바실리우스 하우저 수사는 수종증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겪다가 1950년 2월 14일 순교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동료들의 증언

 

○…"바실리우스 수사가 병에 걸려 일을 못하게 됐다. 그가 주방 일을 아예 못하게 되면 어떤 문제가 생길지 그제야 비로소 짐작하게 됐다. 그는 세끼 식사뿐 아니라 빵을 굽고 소시지를 만든다. 포도주는 물론 온갖 음료도 직접 만든다. 우유가 남으면 치즈를 만들기도 한다.…그래서 우리는 바실리우스 수사가 보름간의 와병 끝에 일어나 옷을 몇 겹씩 껴입고 털외투까지 걸친 모습으로 다시 주방에 나타났을 때 몹시 기뻤다"(1935년도 「덕원 연대기」 중에서).

 

○…"사실 한국인 수사들은 한 번도 독일식 아침 식사를 즐기지 않았다. 그들은 아침을 먹어도 뱃속이 든든하지가 않고 허한 느낌이 든다고 했다. 그렇게 속이 허한 채로 오전 내내 노동해야 했다. 이제 주방장 수사는 유럽인 수사들을 위해 보릿가루로 만든 커피와 일상적인 유럽식 아침 식사뿐 아니라 밥을 지어 김치와 다른 반찬들과 함께 아침상을 차렸다. 이후로는 속이 허하다는 불평은 들려오지 않았다"(1938년도 「덕원 연대기」 중에서).

 

○…"바실리우스 하우저 수사는 수녀들이 수용소 부엌 일을 맡기 전까지는 동료 수사 한 명과 취사를 맡았다. 감옥에서의 시간이 그에게도 흔적 없이 지나가지는 않았다. 형편없는 음식이 그를 쇠약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늘 밝고 명랑했다. 주방에서 벗어나자 공사판 일을 자청해 돌과 진흙과 물을 나르고 목공 일을 돕는 데 여념이 없었다. 모든 사람이 그런 것처럼 그도 힘닿는 대로 공동체의 일을 돕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지치고 무감각해졌다. 수종증은 점점 더 심해졌다. 1950년 초부터 복수가 차기 시작했다. 그는 협착감과 갈증으로 굉장한 고통을 당했다. 그리고 수용소의 음식은 그런 환자들에게는 좋지 않은 것이었다. 우리의 가련한 환자들은 이렇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훌륭한 수사 바실리우스는 1950년 2월 14일 영원한 고향으로 갔다"(디오메데스 메퍼트 수녀 증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