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원의 순교자들] (14) 그레고르 루드비히 기게리히 수사 전기 난방 등 만능기술자이며 순명의 일꾼
그레고르 루드비히 기게리히 수사 (Gregor Giegerich)
▲출생: 1913년 4월 29일 독일 프랑켄 그로스발슈타트 ▲세례명: 루드비히 ▲첫서원: 1932년 10월 20일 ▲종신서원: 1936년 1월 19일 ▲한국파견: 1939년 1월 6일 ▲소임: 덕원 수도원 전기 설비, 난방 기관실, 운전기사 ▲체포 일자 및 장소: 1949년 5월 11일 덕원 수도원 ▲선종 일자 및 장소: 1950년 10월 3/4일, 평양 인민교화소
▲ 1936년 가을 독일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 전봇대에 올라 전기 설비 공사를 하고 있는 기게리히(왼쪽) 수사.
▲ 1940년 성령강림대축일에 덕원 수도원을 방문한 경성대목구장 라리보 주교와 수도자들이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셋째줄 가운데(원 안)가 그레고르 기게리히 수사다.
▲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 묘지에 있는 그레고르 기게리히 수사의 묘비.
덕원 수도원의 만능 기술자인 그레고르 루드비히 기게리히 수사는 언제나 순명하고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온화한 성품의 수도자였다. 동료 수사들은 그에 대해 일본 파시즘과 북한 공산당의 압제에도 자신의 운명을 평온하고 느긋한 마음으로 견뎌낸 수도자라고 증언한다. 하지만 기게리히 수사는 성소 문제로 자신에게 조언을 청하는 이들에게 늘 "하느님이 부르시면 따르라"고 충고할 만큼 확고한 소명을 지닌 선교사였다.
"저는 이곳이 매우 마음에 듭니다. 물론 고향과는 완전 딴판이지요. 방바닥에서 잠을 자는 것이 우리 유럽인에게는 그리 편치 않아도 흥미롭기는 합니다.…그래도 용기를 내야겠지요. 좋은 시절이 다시 올 겁니다. 우리는 하느님 손안에 있으며 선교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선교 사업을 위해, 그리고 이 머나먼 동아시아를 위해서도 많이 희망하고 많이 기도합시다"(1941년 1월 19일자 기게리히 수사 편지 중에서).
손재주 남달라
그레고르 기게리히 수사는 1913년 4월 29일 독일 프랑켄 그로스발트에서 농부인 알로이스 기게리히와 베르타의 12자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세례명은 루드비히. 그는 초등학교 졸업 후 1928년 4월 열다섯 살에 성 베네딕도회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 전기 설비 실습생으로 들어갔다. 그는 도제 기간이 끝나기 전인 1929년 3월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에 입회했다. 사감인 베르흐만스 신부는 그에 대해 "품행이 바르고 노력이 두드러진 학생"이라고 평가했다. '그레고르'를 수도명으로 1932년 10월 20일 첫서원, 1936년 1월 19일 종신서원을 한 기게리히 수사는 1939년 1월 6일 한국 선교사로 선발돼 덕원 수도원에 파견됐다.
한국 파견 전에 이미 전기기사 장인 시험에 합격한 그는 뮌스터슈바르작 새 수도원 건물과 덕원ㆍ연길 수도원 관할 성당 전기 설비 공사를 맡아서 했다. 손재주가 남달랐던 그는 전기 설비뿐 아니라 덕원 수도원 난방 기관실,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 운전기사 등 여러 소임을 맡아 쉴 틈 없이 바쁘게 생활했다.
"난방기는 여름에 몇 주를 제외하곤 매일 돌아가고 있습니다. 겨울철인 지금은 기계가 쉬는 시간이 없습니다. 매일 아침 6시 반이면 제가 기계를 작동시킵니다.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곧장 난방장치를 켜야 합니다. 기계가 작동하면 대개 밤 9시 30분까지 돌아갑니다. 열너댓 시간 동안 쉬지 않고 가동되는 겁니다.… 지난 밤부터 다시 혹한이 몰아쳐 영하 12℃에 매서운 바람까지 불고 있습니다"(1941년 1월 19일자 편지 중에서).
일본이 항복하고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하면서 공산주의는 한국에도 들어왔다. 1946년 무렵 성 베네딕도회 연길 수도원은 이 중국 공산당의 증오 희생물이 됐다. 덕원 수도원도 소련의 붉은 군대가 철수하고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자 곧바로 박해의 칼바람이 몰아쳤다. 1949년 5월 초 덕원 수도원은 공산당 정치보위부원들에게 점거됐고 그레고르 기게리히 수사는 동료 수도자와 함께 평양 인민교화소에 갇혔다.
"한국에서는 5월 중순이면 느닷없이 여름이 시작되므로, 수감생활도 괴로워졌다. 좁은 공간은 숨이 턱턱 막히게 했다. 밤낮으로 땀을 흘리니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었다. 식사 때마다 18명이 마실 물이 고작 서너 국자 분량이다. 물을 달라고 외쳐보아도 간수는 배식구를 닫아 버렸다.… 가장 끔찍한 고통은 불확실성이었다. 당국이 노리는 바가 무엇일까? 어떤 일이 닥칠까? 석방ㆍ수용소 생활ㆍ추방ㆍ총살? 노동도 사역도 없으니 생각의 쳇바퀴가 더욱 괴로울 뿐이었다. 석 달에 단 두 번 복도에서 찬물로 몸을 씻고 땀에 찌든 속옷을 빨 수 있었다. 설사로 고생하는 사람도 많았다. 루치우스 로트 원장 신부는 수인들을 돼지 취급한다고 항의해 보았지만 그게 바로 딱 어울리는 취급이라는 대답만 들었다" (요셉 쳉글라인 신부 증언 중에서).
북한 공산당 법정은 아주 교묘하게 아무 상관도 없는 사건들을 부풀려 수도원 재산을 압수하는 구실로 삼았다. 기게리히 수사는 허락 없이 사진기를 소유했다는 죄목으로 구속됐다.
그레고르 기게리히 수사는 다른 수감자들이 옥사덕 강제 수용소로 이송된 후에도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와 루치우스 로트 원장 신부, 그레고르 슈테거 신부, 다고베르트 엥크 신부, 요셉 그라하머 수사, 루드비히 피셔 수사와 함께 평양에 남게 됐다. 이들 모두는 얼토당토않은 죄명을 뒤집어쓰고 특별 보호를 받았다.
감옥에서 사우어 주교 아빠스 돌봐
기게리히 수사는 평양 인민교화소 감옥에서 위대한 희생정신으로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를 돌보았다. "주교 아빠스의 감옥은 더럽고 좁아서 간이 침상을 높을 자리도 없을 뿐더러 구석 변기통에서는 악취가 코를 찔렀다. 주교 아빠스는 체포 당시 입고 있던 속옷에 푸른 수의를 걸쳤는데 봄 가을이라면 몰라도 겨울에는 배겨내지 못한다. 난방은 물론 없다. 추워도 참아야 한다. 씻을 물도 귀하다"(김영근 신부 회고록 중에서).
독방에 홀로 갇혀 죽어가는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를 버려둘 수 없었다. 평양 인민교화소에 남은 수도자들은 점점 정신이 혼미해지는 노인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고 지켜만 보는 것이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주교 아빠스의 상태가 악화되자 기게리히 수사가 그의 독방으로 이감됐다.
"그레고르 수사는 밤낮으로 정성껏 주교님을 보살폈다. 그는 침대도 없어 나무 맨바닥에 요만 하나 깔고 잤다.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는 사흘간 의식이 없다가 1950년 2월 7일 아침 6시 조용히 선종했다. 주교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그레고르 수사도 탈진해 한 달 동안 주교 아빠스의 감방에서 몸져누워 있었다"(김영근 신부 회고록 중에서).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의 빈 감방은 이후 다섯 명의 평양교구 사제들로 채워졌다.
1950년 10월 유엔군의 진격으로 북한군이 후퇴하기 시작했을 때, 평양 인민교화소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북한 공산당원들 손에 죽었다. 이 운명은 그레고르 기게리히 수사도 비켜가지 못했다. 기게리히 수사는 1950년 10월 3일과 4일 밤 사이에 루치우스 로트 원장 신부, 그레고르 슈테거 신부, 다고베르트 엥크 신부, 요셉 그라하머 수사, 루드비히 피셔 수사와 함께 살해됐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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