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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덕원의순교자들

[덕원의 순교자들] (13) 마리아 프룩투오사 게르스트마이어 수녀

by 파스칼바이런 2014. 5. 13.

[덕원의 순교자들] (13) 마리아 프룩투오사 게르스트마이어 수녀

365일 중 363차례 빈민지역 찾은 '헌신'의 표상

 

 

마리아 프룩투오사 게르스트마이어 수녀

(M. Fructuosa Gerstmayer)

 

▲출생: 1898년 2월 4일 독일 바인가르텐

▲세례명: 마리아

▲첫서원: 1923년 2월 2일

▲종신서원: 1926년 10월

▲한국파견: 1926년 9월 4일

▲소임: 원산 마리아의 도움 시약소 책임 간호사

▲체포 일자 및 장소: 1949년 5월 11일 원산 수녀원

▲선종 일자 및 장소: 1952년 9월 16일 옥사덕 수용소

 

 

▲ 원산 마리아의 도움 시약소에서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는 수녀들.

맨 왼쪽의 수녀가 프룩투오사 게르스트마이어 수녀다.

 

▲ 성체용 제병을 굽고 있는 프룩투오사 수녀.

 

▲ 봇짐을 매고 시약소를 찾아온 환자에게 의자를 내어주고 있는 프룩투오사 수녀.

 

 

"프룩투오사 수녀는 가난한 이들 움막으로 먹을 것, 옷가지, 약품, 붕대 등을 가져다주었다. 이 항구도시 원산에서 그녀 외에는 그들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자기를 위해서는 최소한의 것으로 만족했고, 옷은 끝없이 기워 입었다. 건강도 돌보지 않았다. 빈민들이 굴을 파고 사는 도시 외곽 산비탈 움막으로의 행렬, 한여름 찌는 듯한 더위 속의 노정, 폭풍과 장대비를 뚫고 가는 길, 눈더미를 헤치며 얼어붙은 길을 걸어가는 것은 그녀의 일과였다. 죽어가는 사람을 대할 때도 전혀 스스럼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 그녀의 건강은 극한을 견뎌야 했다. 몸을 질질 끌고, 발걸음도 옮기지 못하고, 길을 가던 도중에 탈진해 주저앉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제르투르다 링크 원장 수녀 편지 중에서).

 

▨ 어릴 때부터 선교사 꿈꿔

 

마리아 프룩투오사 게르스트마이어 수녀는 원산 선교지에서 평생을 환자와 가난한 이를 돌보고 사랑한 수도자다. 그녀는 1898년 2월 4일 독일 바인가르텐에서 공구ㆍ 철물ㆍ 가정 집기ㆍ 주방기구 등을 파는 막스 게르스트마이어와 율리아나 비르크의 넷째 딸로 태어났다. 세례명은 마리아. 10남매 사이에서 자란 그녀는 이미 8살 때 "이교 어린이들에게 선교하러 가고 싶다"는 희망을 밝혔다. 초등학교 졸업 후 삼촌 신부 사제관에서 보조 식복사로 일하다 2년 후 가사와 주방일을 더 배우기 위해 남의 집 식모살이와 아버지 가게 일을 도왔다.

 

23세 때인 1921년 3월 1일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에 입회한 그녀는 '프룩투오사'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련을 시작, 1923년 2월 2일 첫서원과 1926년 10월 종신서원을 한 후 두 번째 한국 선교 수녀단에 속해 입국했다. 우리말로 '열매를 많이 맺는 이'란 뜻의 프룩투오사 수도명처럼 그녀는 순수했고 언제나 남을 도울 준비가 돼 있는 선교사였다.

 

▨ 가난하고 병든 자 위해 23년간 헌신

 

게르스트마이어 수녀는 원산 선교지에 도착하자마자 마리아의 도움 시약소 책임 간호사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순회보건사업 약국 책임자로 임명됐다. 그녀는 원산 시약소에서 매일 60~80명의 환자를 치료했고, 시약소 일이 끝나면 걸어서 2~5시간 걸리는 빈민 지역을 찾아가 그들을 돌봤다. 그녀는 주일이면 성체 앞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비신자들, 무신론자들을 위해 기도했고, 도움을 청하면 망설임이나 불평 없이 위독한 병자들을 찾아가 치료하고 대세를 베푸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것이 그녀의 행복이었고 소명이었다.

 

게르스트마이어 수녀는 치료 때를 놓쳐 죽어가는 환자들에게 열정적으로 대세를 베풀었는데 그 수가 적어도 5000여 명에 이른다. 또 1928년 한 해만 진료소 치료 4000회, 빈민 지역 방문 치료 363회를 할 만큼 헌신적으로 일했다. 북한 공산당 정치보위부원에게 체포돼 수용소에 갇히기 전까지 그녀는 23년간을 매일 한결같이 일했다. 2번이나 티푸스를 앓아 청각이 손상됐지만 그녀는 가난한 이들을 찾았다. 가난하고 병든 이들은 한국어를 배울 틈이 없어 독일말을 섞어가며 서툴게 우리말을 해도 그녀를 어머니처럼 찾고 따랐다. 동료 수녀들은 그녀를 "지칠 줄 모르는 그러나 휴양이 매우 필요한 사람"이라고 늘 불렀다.

 

▨ 독일인 선교 수녀 중 가장 먼저 체포돼

 

해방 후 북한을 점령한 공산당은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덕원과 원산의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활동을 철저하게 억압했다. 특히 프룩투오사 게르스트마이어 수녀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그러나 그녀가 워낙 원산 주민들에게 사랑받고 있어 함부로 해칠 수가 없었다.

 

북한 공산당 정치보위부원들은 덕원 수도원을 탈세 혐의로 엮어 박해하기 위해 재정 담당 다고베르트 엥크 신부를 제일 먼저 체포했듯이 '게르스트마이어 수녀가 아이에게 독을 먹였다'는 거짓 사건을 꾸며 원산 수녀원을 박해했다. 결국 1949년 5월 원산 수녀원 수녀들은 체포돼 몇 달 동안 평양 인민교화소에 갇힌 다음 남자 수도자들과 함께 옥사덕 수용소로 옮겨졌다.

 

▨ 죽는 날까지 동료 위해 궂은 일 마다 안해

 

수용소 수감자들은 자신들의 노동으로 필요한 것들을 구해서 살아야 했다. 프룩투오사 게르스트마이어 수녀는 수용소 주방에서 하루 18시간 일했다. 그녀는 과도한 노동으로 점차 약해져 주방일을 하지 못하게 되자 수용소 동료들을 위해 옷 수선 일을 맡아 했다. 강제 노역으로 해지고 젖은 낡은 옷과 양말을 바느질하고 밤새 솥뚜껑과 화덕에 올려놓고 말려 새벽에 입고 나갈 수 있게 했다. 또 감시병들의 해진 옷도 수선해줬다.

 

그녀는 2년 넘게 수용소 생활을 버티다 굶주림과 뇌출혈로 1952년 밤 12시 30분 고행성사와 병자성사를 받고 숨을 거뒀다. 시신은 관도 없이 널빤지에 실려 옥사덕 수용소 묘지에 안장됐다.

 

"감옥에서 이미 그녀는 설사와 수종을 앓았고, 수용소 생활을 하는 동안에 한 번도 완전히 건강을 회복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단호하고 자기를 잊어버리는 태도로 부엌일을 했으며, 수녀들에게 생기와 즐거움을 가져다줬다. 그녀는 1951년 뇌출혈을 일으켜 후 점차로 회복되고 있었지만, 그녀가 힘든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나는 그녀가 수선하는 일에 배치돼 조용하게 앉아서 하는 일을 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그녀는 여기서도 밤늦게까지 관솔불을 켜놓고 숯 노동자와 벌목 인부들의 떨어진 장갑을 수선하면서 과다한 작업을 했다. 그녀는 다시 뇌일혈을 일으켰으며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1952년 9월 15일 밤에 매우 평화롭게 사망했다. 장갑 수선을 통해 그녀에게서 끊임없이 도움을 받았던 신부와 수사들은 그녀에게 전구의 도움을 청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중에 점차로 개선된 우리의 상황은 그녀의 전구 없이는 전혀 일어날 수 없었을 일이었다" (디오메데스 메페르트 수녀 증언 중에서).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