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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덕원의순교자들

[덕원의 순교자들] (11) 일데폰스 플뢰칭어 수사

by 파스칼바이런 2014. 5. 11.

[덕원의 순교자들] (11) 일데폰스 플뢰칭어 수사

뚝딱뚝딱, 명동성당 강론대에 숨결 넣은 주인공

 

 

일데폰스 (안드레아스) 플뢰칭어 수사(Ildefons Flotzinger)

▲ 그림=김형주(이멜다)

  

▲출생: 1878년 7월 20일, 독일 타이딩

▲세례명: 안드레아스

▲첫서원: 1909년 10월10일

▲한국 파견: 1909년 11월 7일

▲종신서원: 1912년 11월 24일

▲소임: 수도원 목공소 책임자

▲체포 일자 및 장소: 1949년 5월11일, 덕원 수도원

▲순교 일자 및 장소: 1952년 3월20일, 옥사덕 수용소

 

 

일데폰스 플뢰칭어 수사는 한국에 파견된 첫 번째 독일 선교사 그룹의 일원으로 1909년 12월에 입국해 43년간 이 땅에서 활동하다 순교했다. 수도원 목공 책임자였던 그의 흔적은 지금도 여러 곳에 남아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서울 명동 주교좌 성당 네오고딕식 강론대이다. 백동ㆍ덕원 수도원과 관할 모든 본당 및 학교 시설 대부분이 그의 손에 의해 지어졌을 만큼 플뢰칭어는 빼어난 장인이었다. 또 그는 항상 한국인이나 중국인들과 함께 식사하고 초라하기 짝이 없는 공사장 움막에서 잠을 잤을 만큼 겸손하고 청빈한 수도자였다.

 

플뢰칭어는 1878년 7월 20일 독일 뮌헨-프라이징 교구 함가우에 있는 아메랑 읍의 작은 마을 타이딩에서 소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세례명은 안드레아스. 아버지를 일찍 여윈 그는 어머니 안나 쿤처, 두 남매와 함께 외가에서 성장했다. 첫 서원식때 차비가 없어 가족 모두가 참석하지 못할 만큼 살림살이가 넉넉지 못했던 그는 초등학교 졸업 후 삼촌에게 목공을 배운 후 여러 도시를 돌며 기능과 견문을 넓혔다.

 

# 첫서원 후 곧바로 한국행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다 회복한 그는 1906년 여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했다. 일데폰스라는 수도명으로 1909년 10월 10일 첫서원을 한 그는 곧바로 한국 선교사로 선발돼 그해 11월 7일 파견됐다.

 

1909년 12월 28일 5명의 선교사와 함께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한 그는 보니파시오 사우어 원장 신부의 안내로 순교성지를 순례한 후 여장을 풀었다. 이날 플뢰칭거는 그의 여행기에 "영원 속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쁘게 고대하며, 우리의 남은 삶을 사랑하는 하느님께 바쳐 그분의 거룩한 뜻을 이루기 위해 힘쓰겠습니다"라고 적었다.

 

한국에서 그의 첫 임무는 벽돌로 수도원 목공소를 짓는 것이었다. 수도원이 완공되기 전 한국인을 위한 기술학교인 숭공학교 건물을 지은 그는 35명의 실습생을 가르치는 목공 선생으로 활동했다. 또 그가 만든 가구 등은 백동 수도원 재정 자립에 큰 도움을 줬다. "일데폰소 수사는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 건립 초창기부터 탁월한 능력으로 특히 어려운 전쟁 시기에 초인적인 인내와 끈기로 목공소를 이끌었다"(1921년 「백동 연대기」 중에서).

 

1912년 11월 24일 종신서원을 한 그는 원산본당 사제관과 해성학교, 문평학교, 청진성당, 중국 송화강 인근 가목사성당, 부금성당, 고원성당, 회령성당, 덕원 수도원 신학교 등 수도원 관할 선교 지역 여러 본당과 학교들을 건축했다. 1938년에는 간도 의란 카푸친 수도회를 위해 성당과 사제관 지어 '명예 카푸친 회원' 자격을 받기도 했다. 이 모든 일을 하면서도 그는 수도원 자금을 한 푼이라도 아껴 선교비로 충당하려고 거의 홀로 일했다. 고된 노동을 기쁨으로 받아들인 그는 공사 중에도 꼬박 하루를 걸어 이웃 성당 미사에 참례할 만큼 기도생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올해로 나도 쉰 살을 넘어선다. 6년 후면 인생의 절반을 수도원에서 보낸 셈이 되지. 긴 세월이었지만 금방 흘러갔구나. 수도원에서 사는 것은 지루하지 않아. 늘 할 일이 있고 멋진 변화와 기도와 노동이 있기 때문이지. 또 죽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 아무것도 잃을 게 없거든"(1929년 3월 31일 수녀원에 입회하는 조카딸에게 보낸 플뢰칭어 수사 편지 중에서).

 

그는 "대패질을 하면서 아이들 마음속에 신앙의 싹을 틔워 주었음이 분명하다"며 아이들이 작업장에 놀러 오는 것을 언제나 반겼다.

 

 

▲ 1911년 백동 수도원 목공소에서 실습생과 힐라리오 호이스 수사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플뢰칭어(맨 뒷줄 가운데)수사.  

 

▲ 일데폰소 플뢰칭어 수사가 만든 서울 명동 주교좌 성당 네오고딕식 강론대.

 

▲ 의란 가목사 성당 앞에서 카푸친회의 '봉헌 및 은총회' 회원 증서를 받고 있는 플뢰칭어 수사(오른쪽).

 

 

# 수용소에서 뇌출혈로 쓰러져

 

플뢰칭어 수사는 1949년 5월 덕원 수도원의 동료 수도자와 함께 정치보위부원에게 체포돼 평양 인민교화소로 수감됐다. 71세였던 그는 수감생활을 비교적 잘 견뎌냈다. 동료 수도자를 위해 이동 화덕도 만들고, 낫을 갈고 다른 봉사활동도 했다. 그러나 압록강 인근 만포ㆍ 청천을 거쳐 옥사덕 수용소로 이송되면서 뇌출혈을 일으킨 후 극도로 쇠약해졌다. 차가운 감옥 바닥에 누운 채 묵주기도만 하던 그는 1952년 3월 20일 추위와 영양실조로 순교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지금까지 이곳에서처럼 많이 굶어 본 적이 없다. 이런 비참한 상황에 도움을 주지 못하고 그저 보고만 있는 것이, 제 나라를 떠나온 선교사의 가장 큰 고통이란다. 선교사는 많은 사람이 개종하고 미래와 영원을 위한 행운을 찾아 얻는다면, 기쁘게 제 나라를 떠나 온갖 궁핍을 감수할 것이다"(1929년 5월 22일 플뢰칭어 수사가 동생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