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원의 순교자들] (10) 루드비히 피셔 수사 우리말 서적 간행에 힘쓴 다재다능한 외국인 선교사
루드비히 칼 피셔 수사 (Ludwig Karl Fischer)
▲출생: 1902년 10월 23일, 독일 운터쉬텔츠하우젠 ▲세례명: 칼(Karl) ▲첫서원: 1924년 10월 15일 ▲한국 파견: 1925년 9월 27일 ▲종신서원: 1927년 10월 15일 ▲소임: 덕원 수도원 인쇄소,구둣방, 청ㆍ지원자 책임 ▲체포 일자 및 장소: 1949년 4월 28일, 덕원 수도원 ▲순교 일자 및 장소: 1950년 10월11일. 평양 인민교화소
▲ 피셔 수사가 인민교화소에서 임근삼 수사에게 전한 마지막 비밀 쪽지.
"림 수사 전 만히 감사함니다 나는 잘 잇숨니다 곡정하지 마십시오 루수 수사 솟습니다. 루드비히 피셔 O.S.B"
덕원 순교자 루드비히 피셔 수사의 마지막 비밀 쪽지 내용이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자신을 걱정하는 동료에게 감사하고 격려하는 의연하고 자상한 그의 인품을 느낄 수 있다.
피셔 수사는 성 베네딕도회 덕원 수도원에서 재정 담당 다고베르트 엥크 신부에 이어 두 번째로 북한 공산당 정치보위부원에게 체포됐다. 인쇄소 책임자였던 그는 반공 불온 전단을 제작, 배포했다는 날조된 혐의로 붙잡혀 수도자들 가운데 가장 비참하게 수감 생활을 하다 순교했다.
▲ 덕원 수도원 인쇄소 책임자인 루드비히 피셔 수사(가운데 수도복 입은 이)가 직원들과 함께 인쇄 작업을 하고 있다.
▲ 1925년 9월 27일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한국으로 떠나기 전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선교사들. 오른쪽 첫 번째가 루드비히 피셔 수사.
루드비히 피셔 수사는 1902년 10월 23일 독일 로텐부르크-슈투트가르트교구 뷔르템베르크의 작은 마을 운터쉬텔츠하우젠에서 제화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세례명은 칼(Karl). 그는 아버지 벤델린 피셔와 어머니 헬렌 회르너, 그리고 5남매 사이에서 성장했다. 그보다 한 살 많은 형은 발트 브라이트바흐의 성 프란치스코 의료수도회에 입회했다.
루드비히 피셔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회에 입회하기 전까지 한 번도 고향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 졸업 후 그는 3년간 남의 집에서 급사 생활을 했고 17세 때부터 아버지 밑에서 구두 만드는 기술을 배우기 시작해 1922년 제화 기능사 자격증을 획득, 마이스트로(장인)가 됐다.
피셔는 21세 되던 해인 1923년 1월 9일 독일 성 베네딕도회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 신청서를 냈다. 그의 본당 주임 신부는 추천서에 "칼은 훌륭한 청년이고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지금까지 흠잡을 데 없습니다. 윤리적으로 올바르고 신심이 깊기에, 제가 판단하건대 그가 수도 생활과 선교 활동에 아주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적었다.
# 서울에서 종신서원, 다양한 소임 맡아
이렇게 그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해 1923년 10월 '루드비히'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련기를 시작했다. 1924년 10월 15일 첫서원을 한 그는 이듬해인 1925년 9월 27일 신부 여섯과 수사 셋, 그리고 수녀 넷으로 구성된 선교단에 포함돼 원산대목구 덕원 수도원에 파견됐다.
1927년 10월 서울 백동 수도원에서 종신서원을 한 그는 자신의 재능을 본격 발휘했다. 그는 수도원 운전기사, 구둣방ㆍ제본소ㆍ인쇄소 책임자, 청ㆍ지원자 사감 등 5가지 소임을 맡아 열정적으로 일했다.
미국과 아일랜드 선교사, 한국 사제들, 덕원과 원산의 관리들과 평범한 시골 사람까지 그가 만든 구두를 신고 싶어했고 한꺼번에 가죽 슬리퍼 100켤레 주문이 들어와도 거뜬하게 혼자서 처리했다.
피셔 수사는 인쇄소 총책임자이며 덕원 수도원 원장인 루치우스 로트 신부와 함께 일제의 '한국어 말살 정책'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말 서적 간행에 힘썼다. 그는 한글로 된 기도서와 교리문답서 외에 독일어-한국어, 한국어-라틴어 문법책을 출간했다.
"인쇄소는 아직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어 「준주성범」을 인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고난의 시기가 닥쳐올 것입니다"(루치우스 로트 신부 1942년 4월 5일자 편지 중에서).
해방이 되자 루드비히 피셔 수사와 덕원 수도자들은 곧바로 한국어 「미사경본」과 교리서를 인쇄하면서 우리 민족과 기쁨을 함께했다.
# 날조된 '인쇄소 사건' 혐의로 체포, 수감
피셔 수사는 이 수도원 인쇄소 때문에 다른 수도자보다 먼저 1949년 4월 28일 보위부원들에게 체포돼 평양 인민교화소에 수감됐다. '인쇄소 사건'은 피셔 수사 감독 하에 있던 일꾼 2명이 하루 일이 끝날 즈음 수도자들 모르게 반공산주의 선전지를 인쇄했다가 발각된 사건이다. 이 일로 1949년 3월 중순 덕원 수도원 인쇄소는 폐쇄됐고, 일꾼 2명도 잡혔다. 한 달 후 정치보위부는 이 일의 주동자로 피셔 수사를 연행했다. 얼마 후 이 사건은 공산당 정치보위부가 수도원을 정부 전복 세력의 중심지로 몰아 수도원을 폐쇄할 목적으로 날조사건임이 밝혀졌다. 반공주의자로 가장한 보위부원이 인쇄소 일꾼 중 동조자를 물색한 것이다.
정치보위부는 피셔 수사 수감 10여 일 후인 1949년 5월 9일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를 시작으로 11일 모든 수도자를 연행하고 덕원 수도원을 폐쇄했다. 수도자들이 반공 전단을 인쇄하고 접견실에서 반동분자들과 비밀 협정을 맺고, 수도원 지하실에서 수녀들과 여러 차례 반동 회의를 열고, 테러 목적의 폭탄을 숨기고, 단파 송신기를 설치해 국제 스파이 활동을 지원했다는 죄명이었다.
피셔 수사는 평양 인민교화소에서 가혹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는 독방에 갇혔고, 세탁 노역에 시달렸다. 그의 옥중생활을 짐작할 수 있는 동료 수도자의 평양 인민교화소에 관한 증언이다.
"긴 복도를 지나 감방으로 들어갔다. 감옥은 좁고 더러웠다. 흑갈색 마룻바닥엔 피로 얼룩진 멍석이 깔려 있었다. 만지기조차 역겨웠다. 감방 비품이라고는 구석의 변기통 하나가 전부였다. 신문은 밤새도록 진행됐다. 1차 신문이 주로 인적 사항에 관한 것이었다면 2차 밤샘 신문은 본격적으로 개인의 범죄 행위를 파헤쳤다. 죄가 없으면 만들어 냈다. 간수들은 가죽 채찍을 허리춤에 차고 있다 반항하거나 말대꾸하는 이에게 휘둘렀다. 취조실에선 고성과 비명이 울려 퍼졌다. 채찍질과 비명이 밤을 찢어 놓은 날이면 우리는 감방에 쪼그리고 앉아 벌벌 떨면서 눈물로 기도했다. 이제는 완벽히 자유를 잃은 것이다"(제르투르다 링크 수녀 증언 중에서).
피셔 수사는 1949년 8월 평양 인민교화소에 수감 중이던 동료들이 옥사독 수용소로 이송될 때도 제외될 만큼 철저히 격리됐다. 기적적으로 그의 소식이 전해졌다. 평양 인민교화소 주치의인 노재경 씨가 이재호(알렉시오,평양교구) 신부의 친구였다. 노씨를 통해 김영근(베다) 부제를 비롯한 한국인 수도자들이 교화소에 수감돼 있는 독일인 수도자들과 비밀쪽지를 주고받게 됐다. 피셔 수사도 위협을 무릅쓴 노씨를 통해 임근삼(콘라도) 수사의 쪽지를 받기 전까지 수도원 사정을 전혀 몰랐다.
"그는 덕원 수도원 몰락에 대해 전혀 몰랐다. 수도원 자기 방에 십자가 대신 김일성 초상화가 걸려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김영근 베다 신부 증언록 「환갑」 중에서).
UN군이 평양을 탈환하기 직전까지 평양교화소에 갇혀 있었던 루드비히 피셔 수사는 1950년 10월 11일 아침, 트럭에 실려 모처로 압송된 후 살해됐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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