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원의 순교자들] (8) 다고베르트 엥크 신부 수도원의 뛰어난 재정 행정가, 박해의 첫 칼날에 희생
다고베르트 엥크(Dagobert Enk) 신부
▲출생: 1907년 9월 15일, 독일 뮌헨 ▲세례명: 오토 ▲한국명: 엄광호(嚴光豪) ▲첫서원: 1928년 5월 14일 ▲사제수품: 1933년 3월 26일 ▲한국 파견: 1934년 4월 2일 ▲소임: 덕원 수도원 재정 담당 ▲체포 일자 및 장소: 1948년 12월 1일, 덕원 수도원 ▲순교 일자 및 장소: 1950년 10월 3/4일, 평양 인민교화소
# 신심있는 가문 출신 다고베르트 엥크 신부는 성 베네딕도회 덕원 수도원 수도자들 가운데 제일 먼저 북한 정치보위부원에게 체포돼 박해를 받았다. 그가 수도원 재정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1907년 9월 15일 독일 뮌헨에서 태어났다. 세례명은 오토, 이름은 프리드리히이다. 그의 한국 이름은 '엄광호'(嚴光豪)로 "오롯하게(엄격하게) 빛을 따라 걷는 사람"이란 뜻으로 풀이해도 무방할 듯하다. 가족은 상인인 아버지 에두아르트 엥크와 맥주 양조업 집안 출신인 어머니 안나 아이크비클러, 두 누이 힐데와 안나, 형제 에두아르트가 있었다.
어릴 적부터 허약했던 그는 뮌헨보다 공기가 좋은 시골에서 자라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뮌헨 인근 이스마닝에서 몇 년을 지낸 후 프라이부르크 할아버지 집에서 성장했다. 할아버지와 고모 손에 자란 그는 1914년 프라이부르크 인문계 베를톨드 김나지움에 입학했으나 할아버지가 죽고 고모가 뮌헨으로 이사해 1923년 뮌헨 비텔스바흐 김나지움으로 전학, 학업을 마쳤다.
1927년 1월 8일 비텔스바흐 김나지움 종교담당 교사는 19세의 오토 엥크에 대해 "그는 아주 재능있는 학생으로 신심 있는 가문 출신답게 종교와 연관된 모든 것에 커다란 관심과 열성을 보이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사제 성소, 수도원, 선교에 관해 이야기하곤 하는데 그의 사고방식과 모범적 생활 태도, 순명 정신과 자제력, 겸손과 이타심, 타인을 위한 성소의 이상적 지향, 항구함을 고려할 때 그가 선교 사제나 수도 사제가 되기에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단 그가 건강하다는 것을 전제로"라고 평가했다.
# 학창시절부터 수학과 물리학에 두각
엥크는 김나지움 시절 종교 과목과 수학ㆍ물리학에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졸업 후 건강해지길 바라는 부모의 뜻에 따라 삼촌이 경영하는 농장에서 1년간 머무르며 식물 재배와 가축 사육 방법을 배웠다.
그는 1928년 3월 15일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해 '다고베르트'라는 수도명으로 수련을 시작, 그해 5월 14일 첫 서원을 했다. 뮌헨대학교에서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신학 과정을 마친 그는 1933년 3월 26일 사제품을 받고, 이듬해인 1934년 4월 2일 한국 선교사로 덕원 수도원에 파견됐다.
# 덕원 수도원 재정 담당
1933년 12월 중국 다롄항에 도착, 덕원 수도원으로 건너온 그는 한국말을 채 배우기도 전에 재정 담당으로 임명돼 수도원 살림살이를 맡아 꾸려나갔다. 그는 효율성을 우선으로 따져 진취적으로 일해 탁월한 행정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재정 담당 소임을 맡자마자 전문가와 일꾼들을 동원해 수도원 뒷산에 수맥을 찾아 수도원과 신학교, 농장이 겪던 물 부족 현상을 단박 해결했다. 또 물이 샘에서 물 저장고까지 15m 거리를 저절로 흘러 저장되도록 경사를 이용한 수로관을 만들어 연간 상당한 전기요금을 절약했다. 아울러 화재 등 각종 재난에 대비해 소방대를 조직하고 소방대장직을 맡기도 했다.
엥크 신부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에서의 자금 지원이 끊겨 덕원 수도원 운영에 어려움을 겪자 농장 수사들과 함께 수원에 있는 조선총독부 농사시험장을 찾아가 가축 사육뿐 아니라 옥수수, 밀, 보리, 포도 등 각종 곡물과 유실수 재배 기술을 익혀 소출 증대에 힘썼다. 또 호프를 재배하고 질 좋은 포도주를 생산해 수도원 운영에 힘을 보탰다.
▲ 다고베르트 엥크 신부가 한국어 선생에게 한국말을 배우고 있다.
▲ 학창 시절 수학과 물리학에 뛰어났던 엥크 신부는 덕원 수도원 재정 담당을 맡으면서 탁월한 행정 능력을 발휘했다. 사진은 새로 구입한 오토바이 앞에서 기념촬영하는 엥크 신부.
▲ 1934년 4월 한국으로 파견되기 전의 다고베르트 엥크 신부.
# 조작된 밀주 제조 혐의로 체포
다고베르트 엥크 신부는 1948년 12월 1일 밀주 제조와 탈세 혐의로 체포돼 원산으로 압송, 인민교화소에 갇혔다. 그의 체포를 신호탄으로 덕원 수도원에 대한 북한 정치보위부의 노골적 박해가 시작됐다. "이른바 밀주 제조 사건은 공산당에 속했던 농업조합 지도위원회와 문평 세관, 원산시 당국이 음모해 꾸민 사건이다. 국영 조합장이 포도주와 과일주 생산에 관한 협약을 맺자고 수도원을 설득했고, 계약을 맺기도 전에 화물차들이 포도를 싣고 왔다. 그러자 세관이 들이닥쳐 법에 저촉되는 밀주를 생산해 탈세했다며 수도원을 기소했고, 내무서장이 엥크 신부를 체포해 압송했다."(루치우스 로트 원장 신부 증언록 중에서)
# 징역 7년형 받아
다고베르트 엥크 신부는 원산 인민교화소에 5개월간 갇혀 있다가 1949년 5월 11일 다른 수도자들과 함께 원산에서 평양 인민교화소로 이송됐다. 이곳에서 엥크 신부는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와 루치우스 로트 원장 신부, 루페르트 클링자이스 신부, 그레고르 슈테거 신부, 요셉 그라하머 수사, 그레고르 기게리히 수사와 함께 징역 7년형을 받았다.
"우리는 거기에 관해 조사받은 바 없어서 변호할 기회도 없었다고 이의를 제기함. 판사(대좌)는 수일 내로 설명하겠다고 해놓고 감감무소식. 판결은 5분 만에 끝났음. 소좌만 참석."(1950년 3월 4일 루치우스 로트 원장 신부 비밀 쪽지에서)
중죄인으로 취급된 이들은 8월 5일 독일 수도자들이 옥사덕 수용소로 이송될 때 제외됐다. 평양 인민교화소에 남아 있던 이들은 1950년 10월 유엔군이 진격해 오자 한국 공산당원들에게 피살됐다. 다고베르트 엥크 신부도 그들 가운데 함께 있었는데 1950년 10월 3일 또는 4일 밤에 총살돼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죽음으로 증거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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