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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덕원의순교자들

[덕원의 순교자들] (09) 파스칼리스 (요한) 팡가우어 수사

by 파스칼바이런 2014. 5. 9.

[덕원의 순교자들] (9) 파스칼리스 (요한) 팡가우어 수사

황무지 같은 하느님 선교지를 아름답게 가꾼 정원사

 

 

파스칼리스 (요한) 팡가우어 수사(Paschalis Fangauer)

 

▲출생: 1882년 1월 8일, 독일 레겐스부르크 엑글핑

▲세례명: 요한 세례자

▲첫서원: 1907년 10월 20일

▲한국 파견: 1909년 11월 7일

▲종신서원: 1911년 6월 23일

▲소임: 백동ㆍ덕원 수도원 농장 및 정원 담당

▲체포 일자 및 장소: 1949년 5월 11일, 덕원 수도원

▲순교 일자 및 장소: 1950년 4월 16일, 옥사덕 수용소

 

1909년 제1차로 한국에 파견된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소속 선교사 6명 가운데 2명이 북한 공산 치하에서 순교했다. 그 중 한 명이 바로 파스칼리스 요한 팡가우어 수사이다.

 

팡가우어 수사는 1882년 1월 8일 독일 쾨퍼링(레겐스부르크)의 작은 마을 엑글핑에서 태어났다. 세례명은 요한 세례자. 아버지 미하엘 팡가우어는 용병 출신으로 소농과 날품팔이를 했고, 어머니 마리아 반컬은 매일 30분을 걸어 성당 미사에 참례할 만큼 열심한 신자였다.

 

# 11남매 중 6명이 수도자

 

그의 형제는 모두 11남매였다. 그 가운데 6명이 수도자가 됐다. 형 게오르그는 살레스의 프란치스코회 수사 신부가 됐고, 누이 둘은 티롤의 잠스 수녀원 수녀, 다른 한 누이는 말러스도르프 수녀원의 발트사센 원장 수녀가 됐다. 형 미하엘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 바르나바스 수사로 수도원 정원을 관리했다.

 

1904년 군 복무를 마친 그가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할 때 쾨퍼링 본당 신부는 추천서에 "요즘 세상에는 여러 유혹 때문에 하느님을 섬기기 어렵지만, 그는 양심의 보호를 받아서 자기 형이 했던 것처럼 세상과 결별하기를 원합니다. 요한은 훌륭한 청년으로 온전히 순수하고 밝고 쾌활한 성격입니다"라고 적었다.

 

팡가우어가 작성한 수도원 입회 청원서를 보면 그의 신심을 잘 알 수 있다. "불쌍하고 약한 죄인이 높으신 분의 인도에 겸손하게 순종해 심사숙고해 결정하였으니 하느님의 은총으로 수도원에 받아주시기를 청합니다. 하늘의 성부께서 여러분에게 하셨듯이 저를 불쌍하게 여기시어, 당신의 요청을 수행하도록 제게 은총을 베푸실 것이고, 언젠가 그분의 자비로 제가 '오너라!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저의 진정하고 분명한 원의입니다."

 

 

▲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강제 징집돼 독일 조차지인 중국 칭다오로 떠나기 전 숭공학교 학생들과 에우제니오 오스터마이어 수사와 기념 사진을 찍고 있는 팡가우어(둘째 줄 왼쪽 세 번째) 수사.

 

▲ 자신이 가꾼 백동 수도원 농장을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는 파스칼리스 팡가우어 수사.

 

▲ 독일 상트오틸리엔 수도원 '선교' 잡지 1915년 4월호에 팡가우어 수사가 기고한 '일본에서의 포로 생활' 내용에 실린 사진. 왼쪽부터 야누아리오 슈뢰더 수사, 고트리프 아우어 수사, 파스칼리스 팡가우어 수사.

 

 

# 제1차 한국 파견 선교사로 입국

 

1905년 10월 15일 요한 팡가우어는 '파스칼리스'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련기를 시작해, 1907년 10월 20일 첫 서원을 했다. 그의 첫 수도원 소임은 친형인 바르나바스 수사를 돕는 정원사 일이었다. 유기서원기 2년을 지낸 후 1909년 11월 7일 27세의 팡가우어 수사는 제1차 한국 파견 선교사로 선발돼 그해 12월 28일 한국 땅을 밟았다.

 

서울 백동 수도원에서 그의 소임 역시 농장과 정원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그는 한국 풍토에 맞는 묘목을 연구해 나무들을 접붙여 품종을 개량하고, 비탈을 계단식 경작지로 만들어 채소 모판을 넓히고 온상을 설치하는 등 황무지 언덕을 농장으로 탈바꿈시켰다.

 

# 부지런하고 성실한 농장 정원사

 

1911년 6월 23일 종신서원을 한 팡가우어 수사는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냉철할 관찰력으로 언제나 새로운 것을 시험해 보는 단호한 의지를 갖춘 수사'로 정평이 났다. 그는 묘목 2000여 그루를 혼자 관리했고, 여름에는 서울 백동에서 가을에는 원산 농장에서 일할 만큼 육체적으로 힘든 일을 마다치 않았다. "파스칼리스 팡가우어 수사 지휘 아래 농장 일이 척척 진행되고 있다. 원산 주변에는 멋진 과수원들이 줄지어 있다. 여기서는 어린아이 머리만 한 큰 사과가 열리는 사과나무를 비롯해 여러 종의 유실수가 재배된다. 여기서 수확되는 과일은 일본, 중국, 러시아까지 팔려 간다."(원산 본당 주임 안드레아 에카르트 신부, 1921년 7월 20일자 편지 중에서)

 

"파스칼리스 수사가 포도나무와 각종 과일나무를 심은 농원을 돌본다. 그는 농원에서 최대한 많은 소득을 올리려고 부지런히 일하고 있다. 그것이 다 본당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농원 수익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루치우스 로트 신부 1928년 가을 보고서 중에서)

 

"파스칼리스 수사는 원산 본당을 세운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강인한 노동으로 본당 뒤편의 황무지를 꽃이 만발한 정원으로 탈바꿈시켰고, 우리가 일 년 내내 하루도 채소와 과일을 먹지 못하는 날이 없도록 애썼다."(1935년 「원산 연대기」 중에서)

 

# 학대와 영양실조로 순교

 

나이가 들어 쇠약해져도 좀처럼 일을 느슨하게 하는 법이 없던 팡가우어 수사는 1949년 5월 10일 한밤중에 원산 성당에서 북한 공산당 정치보위부원들에게 체포됐다. 동료 수도자들과 함께 평양 인민교화소로 압송된 그는 다시 옥사덕 강제 수용소로 이송됐다. 수용소 생활 중에도 매일 밤 얼음장 같은 개천물로 목욕한 후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그는 학대와 영양실조로 쓰러져 1950년 4월 16일 순교했다. 그의 나이 68세였다.

 

"파스칼리스 팡가우어 수사의 위통과 장질환은 감옥의 거친 음식 때문에 더 악화됐다. 그러나 그는 만성 설사, 탈진, 피부 수종, 복부 팽만으로 병세가 짙어가도 남 돕기를 좋아해 곳곳에 많은 도움을 줬다. 방과 부엌 땔감으로 소비될 엄청난 양의 섶나무를 묶는 데도 열심이었다. 파스칼리스 수사는 매우 훌륭한 정원사이고 위대한 명상가이며 하느님 뜻에 온전히 몸을 바친 사람이다. 마지막 몇 주 동안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평온하고 맑은 정신으로 죽음을 준비할 시간을 허락하신 것에 감사하곤 했다." (디오메데스 메펠트 수녀 증언 중에서)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