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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덕원의순교자들

[덕원의 순교자들] (12) 페트루스 게르네르트 수사

by 파스칼바이런 2014. 5. 12.

[덕원의 순교자들] (12) 페트루스 게르네르트 수사

백동 덕원 수도원 지은 장인, 옥사덕의 첫 희생자로

 

 

페트루스 (요셉 발렌틴) 게르네르트 수사(Petrus Gernert)

▲ 그림=김형주(이멜다)

 

 

▲출생: 1882년 2월 14일, 독일 클라인벵크하임

▲세례명: 요셉 발렌틴

▲첫서원: 1909년 7월 11일

▲한국파견: 1911년 1월 17일

▲소임: 백동 수도원 농장 및 덕원 수도원 건축 담당

▲체포 일자 및 장소 : 1949년 5월 11일, 덕원 수도원

▲선종 일자 및 장소: 1949년 7월 3일, 옥사덕 수용소

 

 

 

▲ 덕원 수도원 농장에서 일하는 알트프르도 좀머 수사와 페트루스 게르네르트(오른쪽)수사.  

 

▲ 1911년 1월7일 파견식을 마치고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한국 선교사들. 사진 맨 왼쪽 첫 번째가 페트루스 게르네르트 수사다.

 

▲ 페트루스 게르네르트 수사가 1934년에 지은 함경북도 고원성당 전경.

  

페트루스 요셉 발렌틴 게르네르트 수사는 생전에 선교사로서 형제들과 교우들에게 아름답고 튼튼하고 따듯한 집과 미사를 드릴 견고하고 실용적인 성당과 경당을 지어줬지만, 자신에게는 들어가 쉴 관조차 허락되지 않은 옥사덕 수용소의 첫 번째 순교자다.

 

건축 공사 감독ㆍ농장 관리인ㆍ미장이ㆍ요리사 등 일인다역을 한 덕원의 노련한 수사인 게르네르트의 최고 작품은 바로 덕원 수도원 건물이다.

 

게르네르트 수사는 1882년 2월14일 독일 뷔르츠부르그 교구 클라인벵크하임에서 아버지 요셉 게르네르트와 어머니 마르가리타 슈미트 사이에 태어났다. 세례명은 요셉 발렌틴.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여러 집에서 급사와 하인으로 일했다. 1904년 초부터는 차일리츠하임의 한 유다인 가정에 고용돼 일하며 좋은 평판을 들었다.

 

1914년 재건된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의 전신인 상트 루드비히 원장좌 수도원에 1907년 3월 11일 입회한 그는 수도원 건축 현장에 투입돼 돌 깨고 지하실 파는 일부터 벽돌 얹고 미장하는 일까지 모든 공정을 배웠다.

 

성 베네딕도회 선교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건축 전문가로 성장한 게르네르트는 '페트루스'라는 수도명으로 1909년 7월 11일 첫 서원을 했다. 1910년 12월 한국 선교사로 선발된 그는 1911년 1월 7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파견식을 갖고 노르베르토 베버 아빠스와 플라치도 포겔 원장 신부와 함께 한국에 왔다.

 

# 농장 관리자ㆍ건축 공사 책임자

 

게르네르트 수사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시간도, 한국말을 배울 시간도 없이 백동 수도원 농장을 책임 맡아 수도원 대지에 과실나무 300그루와 묘목 2000그루를 심고 재배했다. 훈제와 소시지 제조 솜씨가 뛰어났던 그는 곧이어 농장일도 맡았다. 또 백동 수도원의 가파른 비탈을 계단식 경작지로 바꾸고 수도원과 목공소, 기숙사 건립 공사를 맡아 했다.

 

그는 수도생활 내내 단 하루도 쉬지 않을 만큼 열정적으로 일했다. 서울과 덕원을 오가며 농장과 공사 현장 감독을 했다. 게르네르트 수사는 서울 백동 수도원, 원산 주교관, 원산 수녀원과 학교, 시약소, 덕원 수도원과 신학교,영흥ㆍ고원ㆍ흥남ㆍ고산ㆍ원산 성당과 사제관 등 서울과 덕원 수도원 관할 대부분을 지었다.

 

그는 바위투성이의 구릉 지대를 폭약과 수작업으로 평평하게 정지 작업을 했고, 장마철 빗길에도 한겨울 허리까지 쌓인 눈길에도 공사장과 채석장을 오가며 맡은 소임에 충실했다. 한번은 눈길을 헤쳐가며 원산 성당 미사에 참례하러 가다 동사할 뻔도 했다. 이러한 그를 보고 덕원 수도자들은 "수도원의 충실한 보호자이며 지칠 줄 모르는 농장 관리자이며 건축 공사 책임자"라고 칭찬했다.

 

"1934년 6월 13일, 페트루스 수사가 곡괭이와 삽, 손수레를 가지고 고원에 와서 정지 작업을 시작했다. 금세 성당 기초가 완성됐고, 벽 쌓는 공사도 빠르게 진척됐다.…페트루스 수사가 너무 많이 고생했다. 한번은 아주 큰 일 날뻔한 위험한 사고가 있었다. 페트루스 수사가 비계에 서 있을 때 한 한국인 인부가 벽돌 짐을 지고 왔다. 비계에서는 짐을 던지면 위험하다고 페트루스 수사가 경고했는데도 인부가 짐을 내던지며 내려놓았다. 비계 위에는 벽돌이 쌓여 있었다. 인부가 짐을 내던지자 새끼줄이 끊어지면서 페트루스 수사와 한국인 인부가 4m 아래로 떨어졌다. 거기다가 쌓여 있던 벽돌이 페트루스 수사 위로 떨어져 얼굴과 팔에 큰 상처를 입었다"(엘리지오 콜러 수사 증언, 1934년 「덕원 연대기」 중에서).

 

이처럼 늘 위험한 공사 현장에서도 페트루스 게르네르트 수사는 공사 기간 내내 비바람이 들이치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초가집에서 지내며 청빈하게 살았다.

 

# 마지막까지 조용히 기도하며

 

북한에 공산당이 집권한 다음 1949년 5월 11일과 12일 사이의 밤에 게르네르트 수사는 다른 독일인 남녀 수도자들과 함께 체포돼 평양 인민교화소로 압송됐고, 이후 6월 24일 선교사 40여 명과 함께 옥사덕 강제 수용소로 옮겨졌다.

 

이곳에서 게르네르트 수사는 수용소 안에서 저질러진 학대에 쓰러진 첫 번째 희생자로 1949년 7월 3일 밤에 67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그의 시신은 관도 없이 멍석에 쌓여 수용소 공터에 묻혔다.

 

"페트루스 게르네르트 수사를 나는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 수사들이 나에게, 그는 이미 감옥에서 설사를 심하게 했고 구석에 조용히 앉아 깊은 생각에 잠기어 계속해서 기도를 했었다고 그에 관해 이야기를 해줬다. 수사들이 그를 간간이 업고 가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던, 수용소로 올라가는 어려운 길이 그를 매우 쇠약하게 했다.…그는 대부분 조용히 기도하면서 수용소 안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7월 3일 밤, 그는 바로 옆에 누워있던 사람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조용히 사망했다. 그는 수용소 위에 있는 돌투성이의 산허리에 묻힌 최초의 사람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그 앞에 섰을 때 나는 두려운 마음으로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옆에 눕게 될 것인지를 생각했다"(디오메데스 메펠트 수녀 증언에서).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