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톨릭 관련>/◆ 덕원의순교자들

[덕원의 순교자들] (19) 김봉식(마오로) 신부

by 파스칼바이런 2014. 5. 19.

[덕원의 순교자들] (19) 김봉식(마오로) 신부

신학교 입학 위해 140km 걸어간 의지의 성직수사

 

 

김봉식 신부

 

▲출생: 1913년 8월 24일 북간도 훈천 태평촌

▲세례명: 예로니모

▲첫서원: 1939년 3월 26일

▲사제수품: 1942년 4월 5일

▲소임: 연길대목구 팔도구본당 보좌,훈춘본당 보좌, 도문본당 주임, 함경도 지역 순회사목

▲체포일자 및 장소: 1950년 6월 24일 원산

▲순교일자 및 장소: 1950년 10월 9일 원산

 

▲ 연길 수도원 첫 한국인 성직 지망 수련수사인 김봉식(마오로, 왼쪽) 신부와 최영호(요한 마리아 비안네, 오른쪽) 수사가 수련장인 빅토리노 차일라이스 원장 신부와 함께 하고 있다. 이들은 1938년 3월 23일 수련기를 시작했다. 최영호 신부는 후일 월남해 왜관수도원 설립에 동참했다.

 

▲ 김봉식 신부의 첫 사목지인 팔도구본당 해성학교 학생들 앞에서 연주하고 있는 수사들. 김 신부는 이곳 본당과 학교에서 미사와 강의 때 한국말을 사용 금지령을 일본 관동군으로부터 받았지만 몰래 한국어를 가르치며 종교 교육을 했다.  

 

 

김봉식(마오로) 신부는 성 베네딕도회 연길 성 십자가 수도원 소속 첫 한국인 성직 수사이다.

 

그는 1913년 8월 24일 북간도 훈춘 지방 팔지 육도포 작은 마을 태평촌에서 태어났다. 세례명은 예로니모. 그의 부모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아버지는 육도포본당 전교회장이었다. 누나 김 안나는 포교 성 베네딕도회 원산 수녀원에 입회 '요사팟'이란 수도명으로 첫서원을 했으나 폐병으로 요절했다. 동생 김봉옥(플라치다) 수녀는 연길에 스위스 캄의 성십자가 수녀회가 진출하자 원산에서 연길수녀원으로 입적했다.

 

그는 재능은 뛰어나지 않았으나 강인하고 끈기있는 소년이었다. 1928년 9월 신학생으로 선발된 그는 중국땅 간도에서 덕원까지 가는 길에 죽을 고생을 했다. 여름 장맛비로 철도가 끊기는 바람에 팔지 태평촌에서 거의 100km 거리를 걸어 용정을 거쳐 삼원봉에 도착했다. 삼원봉성당에서 지친 몸을 추스린 그는 다시 40km를 걸어 회령에 당도했다. 이곳에서 신학생들을 기다리던 신학교 학장 안셀름 로머 신부는 기차에 이들을 태워 덕원까지 왔다. 덕원신학교에서 그는 예비과, 중등과 그리고 철학과를 마쳤다.

 

그는 연길 수도원 첫 번째 한국인 성직 지망 수련수사로서 1938년 3월 23일에 법정 수련을 시작했고, 1939년 3월 26일에 최영호(요한 마리아 비안네) 수사와 함께 첫서원을 했다. 이후 그는 1942년 4월 5일 예수 부활 대축일에 연길 수도원 성당에서 테오도로 브레허 주교 아빠스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첫 소임, 팔도구본당 보좌

 

팔도구본당 보좌로 부임한 김봉식 신부는 사제직 시작부터 갖은 박해를 받았다. 그는 일본 관동군으로부터 미사 때와 본당 해성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칠 때 한국말 사용 금지령을 받았다. 1944년 만주국 일본 괴뢰정부는 연길 수도원이 설립한 모든 학교를 국유화해 버렸다. 하지만 김 신부는 학교가 몰수된 후에도 종교교육을 받기 어려운 아이들을 보살피며 우리말을 가르쳤다.

 

해방이 되자 북간도를 점령한 소련군이 성당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팔도구성당도 마찬가지였다. 소련군은 엔젤마로 첼너 수사를 살해했다. 또 중국인 공산당원들은 장개석 추종자를 사살하고 성당의 제단 십자가를 떼어 부수고 기도서를 불태웠다. 본당 주임 레지날도 에그너 신부와 김봉식 신부, 아말라리오 굼프 수사는 신변에 위협을 느껴 몰래 피신했다. 이후 김 신부는 훈촌본당 보좌로 발령받아 팔도구를 떠났다. 얼마후 김 신부는 본당 주임 엑베르토 되르플러 신부와 함께 1946년 4월말 체포됐다. 그들은 도문을 거쳐 연길로 압송됐다. 김 신부는 풀려났으나 유럽 선교사들은 연금됐다.

 

1946년 5월말 중국 공산당에 의해 연길 수도원이 폐쇄되고 모든 독일인 수도자들이 남평수용소로 감금된 후 김 신부는 도문성당으로 돌아와 신자들을 돌봤다. 당시 중국에는 도처에서 '인민재판'이 자행됐다. 인민재판은 무자비한 고발에서 시작돼 고문과 폭행, 학살로 마무리됐다. 도문에는 ?뺐翩愿瑛? 인민재판이 두려워 만주에서 피신해 온 한국인이 많았다.

 

도문과 훈춘 지역을 다니며 신자들을 돌보던 김봉식 신부는 1947년 7월 모든 종교에 반대하는 대규모 선동이 시작되고 공포 통치가 8개월간 지속되자 견딜 수 없어 덕원 수도원의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의 승낙을 받고 한국인 수녀들과 함께 덕원 수도원으로 갔다.

 

덕원 수도원으로 온 김 신부는 순회 사목자가 됐다. 그는 함경남북도 지역을 순회하며 '평신도 묵상회'를 개최, 신자들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맞설 수 있도록 교육했다.

 

1949년 이천본당 임시 주임으로 부임한 김봉식 신부는 6ㆍ25 전쟁이 일어나기 하루 전날인 1950년 6월 24일 정치보위부원에게 체포돼 원산 와우동에 있는 교화소에 수감됐다.

 

원산 교화소에 수감

 

유엔군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북한군은 1950년 10월 9일 원산 교화소에 수감돼 있던 400여 명의 인사들을 교화소 뒷산 대방공호 속에서 무참히 학살했다. 김봉식 신부와 춘천교구 이광재(티모테오) 신부가 순교했다.

 

이들 두 신부의 시신은 다음날 살육 현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한준명 목사의 말을 듣고 원산본당 신자들이 시체더미에서 찾아냈다. 김 신부는 의복으로, 이광재 신부는 어릴 적 다친 손가락으로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김봉식 신부 시신은 등 뒤로 손이 포박된채 머리에 총상을 입은 처참한 모습이었다.

 

순교자인 두 사제의 유해는 10월 23일 유엔군 군종신부인 존 머피 신부와 패트릭 오코너 신부가 주례한 장례미사 후 원산성당 뒷동산에 있는 본당 묘지에 안장됐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동료들 증언

 

"1942년 부활절 후 첫 주일에 한국인 베네딕도회원 김 마오로 신부가 첫 미사를 봉헌했다. 우리는 큰 잔치를 벌여 축하했다. 그는 예전에 10년 넘게 독립 본당이었던 우리 본당 관할 육도포 마을 출신이다. 그곳 전교회장의 아들인 그는 1927년 9월 이 지방 출신 소년 네 명과 함게 덕원 신학교로 길을 떠났다. 그 다섯 신학생 가운데 숭고한 목적을 성취한 이는 김 마오로 신부뿐이다.…한국인들은 자기네 동포 가운데 거룩한 사제직을 담당할 사람이 다시금 배출된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했다"(엑베르토 되르플러 신부, 「훈춘 연대기」 중에서).

 

"교구에 남은 한국인 신부는 셋인데 서로 본당이 멀다. 1949년 5월에 셋 다 체포돼 그중 둘이 살해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중 한 사람, 김봉식 마오로 신부의 시신이 오늘 발견됐다. 나머니 한 신부는 원산 북쪽에 있었다. 그래서 원산과 전 교구에는 신부가 없다"(패트릭 오코너 신부, 1950년 10월 26일자 보고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