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원의 순교자들] (22) 김이식 마르티노 신부 시대적 격랑 속에서도 마음은 오롯이 주님 향해
김이식 마르티노 신부 ▲ 그림=김형주(이멜다)
▲출생: 1920년 7월 20일, 강원도 양양 ▲세례명: 예로니모 ▲첫서원: 1945년 3월 19일 ▲종신서원: 1948년 11월 14일 ▲사제수품: 1948년 12월 26일 ▲소임: 덕원본당 보좌 ▲체포일자 및 장소: 1949년 5월 11일 ▲순교일자 및 장소: 1950년 10월 3일, 평양(추정)
▲ 해방 이후 공산주의자들이 북한을 통치하면서 덕원수도원의 모든 것은 피폐했다. 특히 1948년 말 김일성 정권이 공포정치를 펼치면서 사정은 더욱 심했다. 이 무렵 사제품을 받고 본당 사목활동을 시작한 김이식 신부의 사진 한장조차 남아 있지 않을 만큼 수도원은 힘들었다. 사진은 김이식 신부가 사목했던 덕원본당 신자들의 모습이다. 사진 가운데 주교가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다.
▲ 덕원수도원은 1949년 5월 11일 북한 공산 정권에 의해 폐쇄됐다. 공산 정권은 수도원 건물을 개조해 농과대학(현 원산농업대학)을 설립했다. 사진은 북한군이 후퇴하면서 불을 질러 모든 수도원 건물이 전소된 모습.
"1948년 12월 소련군이 북한을 떠나자 공산주의자들이 통치권을 독점했다. 그때부터 가톨릭교회에 대한 공공연한 탄압이 시작됐다. 공산 정부는 헌법상 종교의 자유를 선포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공장이나 사업체에 취업하려면 신상카드를 작성해야 했다. 종교 관련 문항에 그리스도인이라 밝히면 해고되고 배급표를 받지 못했다. 가족과 함께 굶어 죽으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식솔을 생각해서 불신앙을 고백해야 하는 가장을 뉘라서 욕할 수 있겠는가? 많은 경우 그리스도인들은 겉으로만 그랬고 마음으로는 신앙을 잃지 않았다고 고백했다"(크리소스토마 슈미트 수녀 증언 중에서).
"압박이 점점 심해졌다. 주민의 감시는 중압감을 더하고 있다. 집집이 방문객 명부를 갖춰야 하며, 묵고 갈 손님들은 미리 내무서에 신고해야 한다. 어린 학생들도 여행 증명서가 있어야 여행할 수 있으며, 신고 의무를 준수해야 한다"(요셉 쳉글라인 신부 증언 중에서).
소련군 철군 이후 북한 사정은 공산당에 의한 폭압과 공포 정치로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한마디로 북한은 '동토의 땅'이 됐다. 소련군으로부터도 전적으로 자유를 보장받아 북한 땅 어디든 마음대로 다니며 설교를 했던 선교사들은 이제 수도원 안에서도 감시 대상이 됐다.
동토의 땅에서
1948년 말 북한 공산당의 공포정치로 인해 한치 앞 정국을 내다볼 수 없던 덕원수도원에 모처럼 축제의 웃음꽃이 폈다. 성탄절 다음 날인 성 스테파노 순교자 축일인 12월 26일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 주례로 김이식(마르티노) 신부의 사제 서품식이 거행됐기 때문이다.
김이식 신부는 1920년 7월 20일 강원도 양양에서 태어났다. 그의 세례명은 예로니모다. 동해에 면한 38도선 접경 산악지역인 양양의 주민 대부분은 가톨릭 신자였다. 그래서 1949년 봄, 북한 공산당이 어떠한 종교 시설 건립도 금지하며 탄압할 무렵, 성 베네딕도회 수녀들은 옛 원산대목구 관할 밖 첫 분원을 바로 양양에 세우려 했다. 당시 북한 땅이었던 양양은 김이식 신부가 평양에서 순교한 1950년 10월 남한에 속하게 됐다.
김이식은 18살 되던 해인 1938년 춘천지목구 소속 신학생으로 서울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했다. 종교 탄압을 노골화하던 조선총독부는 1942년 1월 3일 노기남 주교가 서울교구장으로 임명되자마자 비인가를 빌미로 2월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폐쇄를 통보했다. 이 조치로 김이식은 1942년 4월 초 신학과정 10명, 철학과정 13명, 소신학교과정 3명과 함께 덕원신학교로 옮겨와 신학 공부를 계속했다.
덕원신학교에서 철학과정 2년을 마친 김이식은 1944년 3월 초 노규채(아우구스티노)ㆍ김영근(베다)과 함께 덕원수도원에 입회, '마르티노'라는 수도명을 받고 성베네딕도회 성직 지망 수사로 법정 수련을 시작했다. 이후 그는 1945년 3월 19일에 첫서원을 했고, 1948년 11월 14일 종신서원, 그해 12월 26일 덕원수도원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늦춰진 사제수품
김이식 신부가 사제품을 받기까지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1945년 봄, 소련군의 원산 침공이 두려웠던 일본군은 신학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덕원신학교를 징발해 병영으로 사용했다. 또 해방 후 1946년 봄, 신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으나 몇 년 동안은 땔감과 양식이 부족해 휴교가 잦았다.
"마지막으로 석탄을 때 본 것이 4년 전이었습니다. 지금은 탄가루를 때고 있습니다.…이러쿵저러쿵 말들은 많습니다. 저는 얼어 죽을 정도는 아닙니다. 셔츠 두 개를 껴입고 내의도 받쳐 입었습니다"(루치우스 로트 원장 신부, 1949년 1월 14일자 편지 중에서).
잦은 휴교령 외에도 김 신부의 사제수품 시기가 늦어진 원인이 또 있었다. 그가 일본 홋카이도 하코다테 카미소에 있는 트라피스트수도원으로 옮겨가길 원했기 때문이다.
"그는 올봄에 종신서원을 해야 했으나, 그때 자신의 소명은 트라피스트회에 있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종신서원을 한 후 곧 사제품을 받을 것입니다. 그동안 교구 소속인 그의 동기들은 모두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본디 사제서품식을 일이 년 후 봄에 할 예정이었으나 여러가지 이유로 앞당겨 거행했습니다. 그러나 사목자격시험을 치르지 않은 사제인 김종수(베르나드로) 신부와 김이식 성직 지망 수사는 학업을 정식으로 마칠 것입니다"(루치우스 로트 원장 신부, 1948년 11월 6일자 편지 중에서).
김이식은 수도 성소 문제로 학업을 다 마치지 못했으나 1948년 12월 20일 덕원본당 주임 우달리코 자일러 신부가 발진티푸스로 갑자기 사망하자 그의 빈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급하게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덕원본당 보좌로 사목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육체노동을 즐겼고 등산도 좋아해 산속에 자리 잡은 덕원본당 공소들을 방문하는 데 적임이었다.
김 신부는 1949년 5월 11일 덕원 수도원에 있던 30명의 모든 독일인 수도자들 그리고 한국인 최병권(마티아)ㆍ 김종수(베르나르도)ㆍ 김치호(베네딕도) 신부와 함께 체포돼 평양 인민교화소로 압송됐다. 1949년 8월 5일 평양 인민교화소에 수감됐던 독일인 수도자 대부분이 옥사덕으로 분리, 수용된 후 김이식 신부의 행방은 알 수 없다. 인민군은 1950년 10월 5일 북으로 퇴각할 때 집단 학살을 자행했는데 김이식 신부는 그때 피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동료 수도자들 증언
"나진과 나남본당은 계속 공석입니다. 지난 4년간 우리는 선교 인원 중 10명을 잃었습니다. 1948년 12월 26일 김이식 마르티노 부제의 사제 서품식이 거행됐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김 마르티노 신부는 신학교 신부들의 짐을 덜어줘야 합니다. 젊은 한국인 신부들은 수도생활을 더 선호하기 때문에, 본연의 선교 활동에는 그리 열정적이지 않습니다. 수도자들은 수도원 내부의 소임에만 집중하는 방향으로 갈 것입니다만, 한국인 사제가 없어서 당분간은 그것도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루치우스 로트 원장 신부, 1949년 1월 16일자 편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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