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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덕원의순교자들

[덕원의 순교자들] (28) 마르쿠스 메츠거 수사

by 파스칼바이런 2014. 5. 28.

[덕원의 순교자들] (28) 마르쿠스 메츠거 수사

작은 일에도 최선 다해 '살아있는 성인'으로 칭송 받아

 

 

마르쿠스 메츠거(Markus Metzger) 수사

 

▲출생: 1879년 1월 26일, 독일 모나츠하우젠 트라우빙

▲세례명: 시몬

▲한국명: 정양리(丁洋利)

▲첫서원: 1900년 10월 14일

▲종신서원: 1904년 10월 14일

▲한국 파견:  1911년 1월 7일

▲소임: 서울ㆍ덕원수도원 관리인

▲체포 일자 및 장소 : 1949년 5월 11일, 덕원수도원

▲선종 일자 및 장소 : 1949년 8월 3일, 옥사덕 수용소

 

 

▲ 수도원 복도에서 명상에 빠져 있는 마르쿠스 메츠거 수사.

수도원 관리소임을 맡은 그는 평소엔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 덕원수도원 수도자들과 함께 소풍을 나왔다가 한국인 소년과 함께 환하게 웃으며

사진을 찍고 있는 메츠거 수사(뒷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 메츠거 수사는 나이 일흔에 옥사덕 수용소 건설 선발대로 뽑혀 혹사를 당하다 순교했다.

사진은 수용생활을 했다가 생환한 수도자가 그린 옥사덕 수용소 스케치.

 

 

성 베네딕도회 서울ㆍ덕원수도원 관리인이었던 마르쿠스 메츠거 수사는 평소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그러나 없어서는 안 되는 공기 같은 존재였다. 서울과 덕원 수도원을 한 번도 떠나지 않은 유일한 수도자였던 그는 자신의 소임에 충실한 조용한 수도승이었다.

 

메츠거 수사는 1879년 1월 26일 독일 모나츠하우젠 트라우빙에서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디센 상트 게오르겐의 하녀 데레사 메츠거였다. 태어난 지 이틀 만에 트라우빙 성당에서 빌헬름 신부에게 '시몬'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받은 그는 전 과목 '매우 우수' 평점을 받을 만큼 머리 좋고 재능 뛰어난 소년으로 성장했다.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어머니를 돕기 위해 하인으로 고용돼 생활하다 1897년 상트 오틸리엔수도원에 입회했다. 1900년 10월 14일 '마르쿠스'라는 수도명으로 첫서원을 했고, 1903년 동아프리카 선교사로 파견됐다. 1904년 10월 14일 종신서원을 한 그는 1905년 동아프리카 선교지에 내전이 일어나 많은 선교사가 순교하고 부상당하자 동료 수도자와 함께 독일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1911년 1월 7일 한국 선교사로 선발돼 노르베르토 베버 총아빠스와 동행, 같은 해 2월 22일 서울 백동수도원에 도착했다.

 

서울 수도원 생활부터 순교 때까지 그의 소임은 '관리인'이었다. 작업장을 깨끗이 정돈하고, 난로와 석유 램프, 굴뚝 등을 손질하고, 온갖 곳을 쓸고 닦고 씻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또 타지에서 온 동료나 손님에게 편안한 잠자리를 마련해 주고, 세탁물을 빨래하고 계절 옷을 깨끗이 정돈 손질했다. 그는 한국 여인들이 옷감을 구별하지 않고 무조건 방망이로 빨랫감을 두들겨 대는 것을 보고 중요한 세탁물을 삼복더위건, 한 겨울이건 직접 빨아 관리할 만큼 꼼꼼했다. 그래서 동료 수도자들은 환갑이 넘어서도 건강하게 자신의 소임을 맡아 하는 그에게 "걸레를 빨 때마다 손과 팔에 냉수욕한 게 건강 비결"이라고 장난을 치기도 했다.

 

그의 꼼꼼함과 빈틈없는 일 처리는 1927년 9월 서울 백동수도원에서 덕원수도원으로 이사 갈 때 빛을 발했다. 그는 화물 열차 16량을 가득 채운 이삿짐의 모든 상자 내용물을 일일이 기록해 놓고 하나하나 확인하고, 1932년 초 수도원과 성당이 어느 정도 자리 잡을 때까지 끊임없이 가구와 물품을 재배치했다.

 

영하 15~25℃의 겨울철 날씨에도 그는 아침기도 전에 수도원 모든 방의 난로에 불을 지펴놓을 만큼 부지런했다. 또 동료 수도자들이 추위에 떨지 않도록 몇 번이고 난롯불을 다시 피우는 수고를 마다치 않았다. 모든 일에 기쁨으로 한결같이 일하는 그를 보고 동료 수도자들은 '살아있는 콘라드 성인'이라 부르며 존경했다.

 

메츠거 수사는 동료 수도자들과 함께 1949년 5월 11일 덕원수도원에서 정치보위부원들에게 체포돼 평양인민교화소로 끌려갔다. 그는 페트루스 게르네르트 수사와 함께 수용소 건설 기능공으로 뽑혀 1949년 6월 25일 수도자들 가운데 제일 먼저 옥사덕수용소로 이송됐다.

 

그는 옥수수와 기장 가루를 먹고 쓰레기 더미 위에 마른 풀을 덮고 자면서 축사를 개축해 수도자들이 생활한 수용소를 지었다. 날마다 일하고 또 일했다. 널빤지로 지붕을 만들고 진흙에 짚을 이겨 벽을 세웠다. 이렇게 신부와 수사, 수녀들이 생활한 집을 짓고 간이 부엌도 만들었다. 또 화전민들이 버리고 떠난 황무지 밭을 일궈 옥수수와 기장, 콩을 심었다. 형편없는 음식에 여름 뙤약볕 아래의 혹독한 노동은 70세 노인에겐 너무나 가혹했다.

 

페트루스 게르네르트 수사는 7월 3일 먼저 세상을 떠났고, 마르쿠스 메츠거 수사도 한 달 뒤 8월 3일 의료진으로 차출된 디오메데스 메페르트 수녀 품에서 선종했다. 8월 6일 덕원 수도자들이 옥사덕수용소로 이송됐을 때 그는 이미 무덤에 묻혀 있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동료 수도자들 증언

 

"마르쿠스 메츠거 수사는 내가 수용소에 왔을 때 이미 심하게 부어 있었다. 수용소에는 쉴 틈 없는 건축 공사로 그가 그렇게도 열망했던 조용한 곳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느리고 지친 걸음으로 개천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하루를 휴식과 기도로 보냈다. 나날이 그의 부기는 심해졌고 좋아하는 장소로 갈 수 없을 정도로 다리의 상태가 나빠지자 잠자리를 온갖 쓰레기가 쌓인 채 허물어져 가는 헛간으로 옮겼다. 겸손하고 고매한 그의 성품대로 그는 다른 사람을 성가시게 하지 않으려고 했으며, 누군가 그를 부축하고자 하면 단호하게 거절하고 '두 팔과 두 다리로'기어갔다. 자정이 지나 그는 밖으로 기어 나왔고 언제나처럼 혼자 있고 싶어 했다. 그러다 숨을 헐떡이고 고통으로 신음하다 움막 앞에서 쓰러졌다. 맥박은 아주 약하면서 빨랐다. 주사도 효과가 없었다. 10분 후에 그는 내 팔 안에서 숨을 거뒀다. 며칠만 있으면 신부들이 온다는 소식에 그분이 얼마나 기뻐했던지! 병자성사를 그렇게도 갈망했는데.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충실한 종을 앞서 당신께로 불러 가셨다"(디오메데스 메페르트 수녀 증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