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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덕원의순교자들

[덕원의 순교자들] (36) 그레고르 조르거 신부

by 파스칼바이런 2014. 6. 11.

[덕원의 순교자들] (36) 그레고르 조르거 신부

 

 

비서·교수·오르간 연주자… 다재다능했던 ‘주님의 종’

 

 

 

▲ 보이론연합회 출신인 조르거 신부는 덕원수도원이 이상적인 수도공동체라고 만족해했다.

 사진은 덕원수도원 전경.

 

▲ ◀조르거 신부(맨 뒷줄 왼쪽 두 번째)가 사랑했던 덕원신학생들. 독일어와 영어, 음악을 가르쳤던 그는 신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레고르 루드비히 칼 프리드리히 조르거(Gregor Sorger) 신부

 

▲출생: 1906년 11월 19일 독일 로텐부르크-슈투트가르트교구 슈파이힝겐

▲세례명: 루드비히 칼 프리드리히

▲첫서원: 1929년 6월 29일

▲종신서원: 1932년 6월 29일

▲사제수품: 1934년 8월 5일

▲한국파견: 1940년

▲소임: 덕원신학교 교수, 주교아빠스 비서, 덕원수도원 오르간 연주자

▲체포 일자 및 장소: 1949년 5월 11일 덕원수도원

▲선종 일자 및 장소: 1950년 11월 15일 만포 관문리 수용소

 

 

성 베네딕도회 보이론수도원 출신인 그레고르 루드비히 칼 프리드리히 조르거 신부는 누구보다 수도생활과 공동체 생활을 사랑한 수도자였다.

 

그는 덕원신학교 교수ㆍ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 비서ㆍ수도원 오르간 반주자 등 여러 일을 한꺼번에 맡아 하면서도 아주 기뻐하며 이 생활이 매우 마음에 든다고 자랑했다.

 

“이 일은 선교 사업에 동참하는 일입니다. 제가 한국인 사제를 양성하는 것, 80명이나 되는 재능있는 신학생들이 사제로서 자신의 온 인격을 하느님과 교회를 섬기고 동포들의 회심을 위해 바치도록 하는 데 한몫을 하는 것은 정말 아름답고 훌륭한 일입니다. 이곳에서 생활하고 일하는 것이 앞으로 여러 해가 될지라도 제게는 전혀 희생이 아닙니다.…제가 이곳 분들을 실망하게 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조르거 신부, 1940년 9월 20일 자로 보이론수도원 베네딕도 바우르 총아빠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그레고르 조르거 신부는 1906년 11월 19일 독일 로텐부르크-슈투트가르트교구 슈파이힝겐에서 보건소장인 아버지 레오폴트 조르거 박사와 어머니 파울리나 할러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례명은 루드비히 칼 프리드리히.

 

튀빙겐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그는 어머니 죽음을 계기로 1927년 11월 12일 보이론수도원에 입회해 그레고르라는 수도명을 받고 1929년 6월 29일 첫서원을 했다. 그의 수련 생활은 그리 순탄하지 않은 듯하다. 수련장은 그의 성격을 “부정적이거나 현실 도피적”이라고 기록했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마리아라흐수도원에서 철학을, 보이론수도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당시 수도자가 300명이나 있던 보이론수도원은 자체적으로 교수를 충당해 신학교를 운영했다. 또 1932년 6월 29일 종신서원을 하고 1934년 8월 5일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1937년 4월 18일 일본 도노가오카에 보이론연합회의 새 수도원 건립을 위해 파견됐다. 하지만 새 수도원은 현지 적응 실패로 무산됐고, 제2차 세계대전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유럽으로 돌아갈 수 없어 한국의 덕원수도원에 정주하게 됐다.

 

1940년 도노가오카에 있던 보이론연합회 수도자들과 함께 덕원수도원으로 정주한 조르거 신부는 곧바로 덕원신학교 교수 소임을 받고 독일어와 영어,음악을 가르쳤다. 또 튀빙겐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이력 때문에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의 비서가 됐다. 그는 일주일에 30시간 강의를 하면서 사우어 주교 아빠스를 수행해 본당을 방문하고, 덕원수도원과 원산수녀원을 오가며 오르간을 연주했다.

 

그는 소신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대신학생들과 자주 어울렸으며, 동료 수도자들과도 친밀했다. “훌륭하고 경건하고 종교적이며 수도자다운 정신과 구성원 간의 신실한 우호적 관계가 공동체를 다스리고 있습니다. 이런 환경은 다른 곳에서는, 아마 보이론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조르거 신부, 1940년 9월 20일 자로 보이론수도원 베네딕도 바우르 총아빠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라며 덕원수도원 생활을 아주 만족해했다.

 

1949년 5월 11일 덕원수도원이 폐쇄되면서 동료 수도자들과 체포된 그는 평양인민교화소를 거쳐 옥사덕 강제수용소에 수감됐다. 장염으로 인한 만성 설사로 쇠약해진 그는 중노동을 아예 할 수가 없었다. 방공호 통로까지 스스로 제 몸을 끌고 가지 못할 만큼 쇠약했지만, 그의 야윈 긴 손가락은 늘 묵주 알을 굴리고 있었다. 그레고르 조르거 신부는 1950년 11월 15일 만포 관문리 수용소에서 굶주린 채 얼어 죽었다.

 

▨ 동료들의 증언

 

“1950년 말 옥사덕수용소에서 중국 국경으로 이송될 때 그레고르 신부는 매우 쇠약해 여러 번 쓰러졌다. …만포에서 공습으로 유리창이 깨져 날아오고 천장이 무너져 내릴 때, 나는 그레고르 신부가 혼자 방에서 똑바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을 보았다. 곧이어 소이탄이 투하됐고 우리는 판자로 지은 허름한 창고로 피해 들어갔다.” (오딜로 신부, 1954년 2월 16일 자 편지 중에서)

 

 

“그는 계속되는 설사로 무척 야위어서 한 번도 제대로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천성이 명상적이고 조용하며 어린이같이 경건한 그는 자신의 고통에 대해 별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는 끊임없이 노동하라고 몰아대는 간수들로부터 많은 학대를 받았다. 그것은 그에게 영적으로도 많은 것을 참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수용소 동료들은 그가 항상 손에 묵주를 들고 있었던 것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디오메데스 메퍼트 수녀 증언 중에서)

 

“그레고리 조르거 신부는 굶주린 채 얼어 죽었다. 그의 시신은 낮 동안 대피소 입구의 더러운 바닥에 놓여 있었다. 우리는 그분의 수척한 몸을 갈가리 찢어진 옷가지들로 가리고 죽어서도 미소를 띠고 있는 신부님의 평화로운 얼굴에 천 조각을 덮었다. 저녁에 한국인 피랍자들이 그분의 시신을 옮겼다.” (아르사티아 아이그너 수녀 보고서 중에서)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