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원의 순교자들] (38)한윤승 필립보 신부 기도와 신심 프로그램으로 본당 활성화한 참 목자
▲ 덕원신학교에서 연극반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한윤승 신학생 (둘째 줄 가운데 머리띠 한 사람).
▲ 한윤승 신부가 유아 세례성사를 집전하고 있다.
한윤승 (韓允勝, 필립보, 1911-1949?) 신부 ▲출생: 1911년 6월 9일. 만주 간도 용정시 시루애 ▲세례명: 필립보 ▲소속: 연길교구 ▲사제수품: 1936년 6월 7일 ▲소임: 연길교구 목단강본당 보좌, 용정 상시ㆍ평양교구 영유ㆍ진남포ㆍ서울교구 해주본당 주임 ▲체포 일자 및 장소: 1949년 5월 20일 해주 ▲순교 일자 및 장소: 1950년 6월 해주(추정)
한윤승(필립보) 신부는 성 베네딕도회의 서울 백동신학교 첫 입학생이며 덕원신학교가 배출한 첫 사제다. 또 김충무(클레멘스) 신부와 함께 연길교구 출신 첫 한국인 사제다.
옹기쟁이 장남
그는 1911년 6월 9일 만주국 간도성 용정시에서 약 24㎞ 떨어진 시루애 마을에서 태어났다. 세례명은 필립보. 아버지 한흥순은 옹기를 구우며 생계를 꾸렸고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이 한 신부다. 작은 체구에 침착하고 말수가 적었던 그는 어린 시절부터 사제성소를 꿈꾸며 신학교에 들어가고 싶다는 뜻을 주위에 자주 밝혔다.
그는 1921년 11월 개교한 서울 백동신학교에 원산교구 소속 첫 신학생 13명 가운데 한 명으로 입학했다. 11살 때였다. 성 베네딕도회 서울수도원이 함경남도 덕원으로 이전해 1927년 12월 1일 덕원신학교를 개교함에 따라 그는 백동과 덕원신학교에서 예비과 2년, 중등과 6년의 소신학교 과정과 철학과 2년, 신학과 4년의 대신학교까지 총 14년을 수학했다.
덕원신학교 철학 교수인 루페르트 클링자이스 신부는 “한 필립보는 신학생 시절 내내 운동, 특히 테니스와 축구를 좋아했다. 또한 신학과정 때는 권투도 배우고 싶어 했는데 안셀름 로머 학장 신부가 권투는 사제직에 필요한 덕목이 아니라고 말하자 순순히 따랐다. 그는 음악도 좋아해 바이올린 연주 솜씨가 뛰어났다.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던 마지막 6년 동안 그는 독일어 공부에도 몰두해 독어 책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정도까지 됐다”고 회고했다.
그의 고향 용정 사람들도 신학생 시절 그가 방학 때마다 집으로 돌아올 때면 늘 바이올린을 가져와 모두가 그의 연주를 즐겼다고 말했다.
덕원신학교 출신 첫 사제가 탄생한 것은 서울 백동신학교 설립 이후 14년 6개월 만인 1936년 6월 7일이었다. 삼위일체 대축일이었던 이날 그해 2월 23일에 부제품을 받았던 연길교구 출신 한윤승ㆍ김충무(클레멘스) 두 부제가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아빠스에게서 사제품을 받았다.
한 신부는 곧바로 용정에 새로 설립된 목단강 예수성심본당 보좌로 발령받아 첫 사목을 시작했다. 그는 1938년 여름 대홍수와 러일전쟁 발발로 큰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빼어난 사목자 자질을 발휘해 갖은 난관을 극복했다. 사교성이 좋고 결단력을 갖춘 그는 본당에서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도맡아 해결했다. 특히 신자들과 함께하는 다양한 기도와 전례 신심 프로그램을 개발해 본당을 활성화하고 전교에도 힘썼다. 이러한 사목 역량을 인정받아 그는 1939년 9월 용정의 두 번째 본당인 상시 그리스도왕본당 제3대 주임으로 부임, 연길교구 첫 번째 한국인 본당 주임사제가 됐다.
1941년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평양교구에서 활동하던 메리놀외방전교회 소속 미국인 선교사들을 국외로 강제 추방했다. 1943년 3월 9일 제6대 평양교구장으로 임명된 홍용호(프란치스코) 주교는 메리놀회 선교사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각 교구에 사제 파견을 요청했다. 이때 연길교구 한윤승ㆍ김충무, 함흥교구 한도준(마태오), 서울교구 김영식(베드로) 신부 등 4명이 평양교구로 파견됐다. 그러다 서울교구 사제가 복귀해 함흥교구에서 김동철(마르코)ㆍ최병권(마티아)ㆍ이춘근(라우렌시오) 신부가 다시 평양교구로 파견됐다.
한 신부는 1943년 6월 평양교구 영유본당 제14대 주임으로 부임했다가 이후 1945년 10월 진남포본당 제10대 주임으로 전임했다. 1948년 9월 연길교구 신부들이 평양교구를 떠나게 되면서 그를 비롯한 김충무ㆍ한도준 신부 등은 서울교구 관할인 38선 이북 황해도 지역으로 옮겼고, 한윤승 신부는 해주본당 제10대 주임으로 사목했다.
해주에서 월남하는 이들 도와
덕원에서 시작된 교회 탄압은 평양교구와 황해도 교회로 이어졌다. 평양교구에서는 1949년 5월 14일 홍용호 프란치스코 주교가 납치된 이래 6·25 직전까지 14명이 체포 구금돼 모두가 행방불명됐다. 한 신부는 해주성당에서 월남하기 위해 해주를 찾아오는 신부와 수도자, 신자들뿐 아니라 외교인들에게 은신처와 길 안내인을 소개하는 등 많은 편의를 제공했다. 그는 이러한 활동 때문에 늘 당국의 의심과 감시를 받고 있다가 1949년 5월에 일어난 해주 시내 반공 유인물 살포 사건에 연루돼 5월 20일 신자들과 함께 체포됐다.
한 신부를 체포한 해주시 정치보위부는 ‘이 사건을 일으킨 배후 조직은 남한의 어느 정치세력에 의해 조직되고 조정된 해주시 반공 지하단체이며 그 조직의 책임자는 한윤승 신부’라고 하였다. 정치보위부는 한 신부의 사제관에서 반공 유인물을 찍어내던 등사기를 찾았고, 반공 지하조직원 명단에 한 신부 이름이 기재돼 있어 물적 증거도 나왔다고 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덕원수도원 인쇄소에서 만든 반공 유인물의 경우처럼 실제로 한 신부가 직접 가담했는지, 사건 전체를 정치보위부가 꾸민 것인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던 북한 당국이 국경 부근 성당에 신부가 상주해 있는 것을 용인할 수 없었다는 사실만 진실로 드러났다.
체포된 날 인민재판에서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은 한 신부의 이후 행적은 분명하지 않다. 어떤 이들은 유엔군이 북진할 때 신의주 방면으로 끌려가다 ‘죽음의 행진’ 중에 살해됐다고 증언했다. 또 다른 이들은 체포 후 해주 인근 바닷가 모래톱에 생매장됐다는 증언도 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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