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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124위 순교성지

124위 순교지를 가다 (06) 죽산성지

by 파스칼바이런 2014. 7. 24.
124위 순교지를 가다 (06) 죽산성지

124위 순교지를 가다 (06) 죽산성지

잡혀가면 돌아오지 못한 박해시절 처형터…

박경진 프란치스코·오 마르가리타 부부 순교

 

 

1868년 9월, 절골(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이 요란스럽다. 이곳에 숨어 신앙생활을 하는 ‘천주쟁이’들을 잡기 위해 죽산 포졸들이 들이닥친 것이다.

 

포졸들이 오고 있다는 것을 전해 들은 한 가족은 필요한 것만 챙겨 필사적으로 산에 몸을 숨겼다. 얼마나 달렸을까. 급하게 도망치다 보니 누가 어디로 갔는지 모를 만큼 뿔뿔이 흩어졌다. 아직 스스로 뛰지 못하는 막내를 업고 산을 오른 아내 오 마르가리타(?~1868)는 보채는 아이를 달랠 겸 잠시 멈춰 숨을 골랐다. 그런데 누군가 오 마르가리타의 머리채를 잡아끌었다. 포졸이었다. 포졸은 그 자리에서 그에게 온갖 쌍욕과 매질을 퍼부었다. 그는 매 맞으면서도 혹시 어린아이에게 생채기 날까 막내를 세게 끌어안았다.

 

아내와 아들 넷이 걱정된 남편 박경진(프란치스코, 1835~1868)은 결국 해가 질 때쯤 조심스레 산에서 내려왔다. 동네에 도착해 보니 이미 날은 어두워졌다. 그는 일단 동네 사람 집에서 하루 묵기로 했다. 집주인은 방까지 달궈줬다. 잠에 빠지려는 찰나, 포졸 대여섯이 작은 문을 비집고 들어와 그에게 쉼 없이 몽둥이질했다. 열린 문틈으로 포졸과 웃으며 이야기하는 집주인이 보였다.

 

박경진과 오 마르가리타 부부는 포박된 채 재회했다. 머리채가 산발이 된 아내가 눈물을 글썽이자 남편이 피투성이가 된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부부가 끌려간 곳은 죽산도호부. 경기와 강원, 충북의 교우촌을 몰살시킨 악명 높은 곳이다. 모진 고초를 겪은 부부의 얼굴은 몰라볼 정도로 피폐해졌다. 하지만 신앙은 오히려 더 굳건해졌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져도 배교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에게 사형명이 내려졌다. 형 집행일 전날 박경진은 동생 박 필립보와 아들 박 안토니오에게 짧은 편지를 남겼다.

 

“어린 조카들을 잘 보살피면서 진정으로 천주님을 공경하고, 천주님께서 안배하시는 대로 순명하여 나의 뒤를 따라오도록 하여라.”

 

다음날, 부부는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10리를 걸어 도착한 형장에서 나란히 죽음을 맞이했다. 1868년 9월 28일이었다.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참조

 

 

▲ 대나무 형상의 순교자 현양탑 옆으로 죽산 순교자 25위 묘가 줄지어 있다.

 

 

서울에서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내려오다 일죽나들목을 나와 안성 방향으로 300m. ‘죽산성지’라 쓰인 커다란 돌비석이 보인다.

 

이곳의 옛 이름은 ‘이진 터’. 고려 때 오랑캐(몽골)들이 진을 친 곳이라는 설에서 유래됐다. 하지만 병인박해 때 새 이름이 붙었다. ‘잊은 터’, 이곳은 본래 박해 시절 처형지로 사용되던 곳이다. 이곳으로 누군가 끌려가면 주변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거기로 끌려가면 죽은 사람이니 잊으라.”

 

그만큼 죽산은 순교의 피가 서려 있는 곳이다. 「치명일기」와 「증언록」에서 이름을 확인한 순교자만 25위나 된다. 이 중 2차 시복 대상자인 여기중과 문 막달레나, 정덕구(야고보), 조치명(타대오), 김 우브로시나, 최제근 안드레아, 방 데레사, 유 베드로 등 8위도 포함돼 있다. 그리고 오는 8월 시복되는 하느님의 종 124위 중 박경진과 오 마르가리타 부부가 바로 이곳에서 순교했다.

 

▲ 죽산 순교성지로 들어가려면 성역문을 지나야 한다.  

 

 

#성스러운 눈물이 깃든 곳

 

성지에 발을 들여 놓으려면 먼저 널따란 기와 대문을 지나야 한다. 대문 현판에는 ‘성역’(聖域)이라 쓰여 있다. 그 글은 마치 성스러운 곳에 들어가기 전 마음가짐을 바로하라는 듯 순례객을 기다리고 있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성지의 푸른 잔디밭이 펼쳐진다. 낮은 기와 담장을 따라 줄지어 장미도 피었다. 소낙비 때문에 떨어진 빨간 꽃잎들이 이곳에서 순교자들이 흘린 피를 떠올리게 한다.

 

장미 덩굴 따라 동그란 돌이 놓여 있다. 묵주알이다. 하늘에서 성지를 바라보면 담장을 따라 큰 묵주가 완성된다. 묵주알 굴리듯 기도하는 마음으로 ‘묵주의 길’을 걷고 나면 피에타상에 적힌 성경 말씀으로 기도를 마무리 짓게 된다.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이 기쁨으로 곡식을 거두리라.’(시편 126,5)

 

 

#순교의 향기

 

묵주의 길을 지나면 순교자 묘역이 나온다. 죽산 순교자 25위의 무덤과 무명순교자 봉분이 있다. 바로 이곳에 신앙의 길을 함께 걸었던 하느님의 종 박경진·오 마르가리타 부부가 나란히 묻혀 있다.

 

묘역 양 끝에는 순교자 현양탑이 있다. 현양탑은 하늘을 향해 길고 높게 뻗어 있다. 대나무 형상을 한 이 현양탑은 고통 속에서도 믿음의 끝을 놓지 않았던 신앙 선조들의 절개를 의미한다.

 

현양탑을 끼고 돌아 묘역 뒤편으로 오르면 작은 언덕 위에 ‘십자가의 길’이 있다. 처마다 흰 대리석으로 묵상을 돕는 조각품이 놓여 있다. 조각가 최영철(바오로)씨의 작품으로 2012년 봉헌됐다. 1처, 2처, …14처.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는 예수님 말씀과 함께 순교자 신심을 묵상한다.

 

 

#기억해야 하는 터

 

박해 시절 사람들은 이곳을 ‘잊은 터’라 불렀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한 이들을 잊자는 의미에서였다. 150여 년이 지난 지금, 이곳은 순교자 124위 순교자 시복 전대사 순례지로 지정돼 ‘기억해야 하는 터’가 됐다.

 

성지 방문해(또는 방문 전) 고해성사를 보고 미사와 영성체, 묵주기도 5단, 시복시성기도문, 프란치스코 교황 한국 방문과 시복식을 위한 기도문, 주모경 1회를 봉헌하면 전대사를 받을 수 있다. 문의: 031-676-6701

 

기억해야 할 곳이 한 곳 더 있다. 죽산면 사무소 입구 덤불에 쌓인 작은 공간. 바로 이름 없는 순교자들이 옥사 또는 장사했던 죽산도호부 터다. 이곳에 현양비를 세우고 죽산순교성지까지 약 1시간 거리의 순례길을 조성하는 것이 성지 관계자의 계획이다.

 

글·사진=백슬기 기자 jdarc@pbc.co.kr

 

 

 죽산도호부 관아 자리 순교자 현양비 건립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사무소 입구에 죽산 순교자를 기리는 현양비가 세워진다. 이곳은 박해 시절 죽산도호부 관아가 있던 자리로 순교자들이 문초를 당하며 피흘린 곳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현양비가 들어설 곳은 사무소 입구 좌측 약 82.6㎡ 정도의 시유지. 안성시의 사용 허가를 받은 죽산 순교성지(담당 이철수 신부)는 이 공간을 작은 성지로 조성할 수 있게 됐다.

 

이철수 신부는 “도호부에서 고문을 받고 옥사에서 순교하거나 형벌 때문에 장사한 순교자들이 분명 있었을 것”이라며 “무명 순교자들의 순교지인 만큼 이곳에 현양비를 세우는 일이 역사적 사명으로 느껴졌다”고 말했다.

 

이 신부는 시유지 사용을 허가받기 위해 안성시 관계자들과 수없이 만나며 순교자 현양비가 갖는 역사적 의미를 전했다. 그 결과 5월 12일 시에서 시유지 사용을 허가받았다. 현재는 오는 8월에 진행될 하느님의 종 124위 시복식 전에 현양비를 설치하는 것을 목표로 설계작업을 해나가고 있다.

 

이 신부는 “절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뤄낼 수 있었다”며 “면사무소 앞을 지나는 미신자들에게도 한국교회 순교자 영성을 전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현양비는 죄인을 가두기 위해 목에 씌우던 형구인 ‘칼’의 모양을 본떠 제작된다. 높이는 약 2m이며 비석에 박경진(프란치스코)이 동생 박 필립보와 아들 박 안토니오에게 남긴 편지글이 문구로 새겨진다. / 백슬기 기자

 

 

▲ 이철수 신부가 현양비가 설치될 자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