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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124위 순교성지

124위 순교지를 가다 (04) 새남터순교성지

by 파스칼바이런 2014. 7. 22.
124위 순교지를 가다 (04) 새새남터순교성지

124위 순교지를 가다 (04) 새남터순교성지

조선교회 첫 미사 봉헌한 주문모 신부 순교터

 

 

▲ 순교성지 새남터 기념성당 전경.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 14위 중 11위가 주교, 사제 등 성직자여서 '성직자들의 성지'로 손꼽힌다. 물론 평신도 지도자 3위를 포함해 이름을 알 수 없는 평신도들도 많이 순교했다.

 

 

 

 

▲ 새남터 기념관에 소장된 순교성인들과 순교자들의 동판 부조.

맨 오른쪽이 주문모 신부의 동판 부조다.

 

 

▲ 순교성지 새남터 기념성당에 세워져 있는 주문모 신부의 흉상.

 

 

서소문이 ‘평신도의 성지’라면, 새남터는 ‘성직자의 성지’다. 조선의 공식 처형장이던 두 곳의 성격은 천주교와 관련해서는 판이하다.

 

103위 성인 가운데 서소문 밖 네거리 형장에선 1839년 기해박해 순교자 41위와 1866년 병인박해 순교자 3위 등 44위가 순교했는데 정하상(바오로, 1795∼1839) 등 모두가 평신도였다. 124위 중에서는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 25위와 1819년 기묘박해 순교자 2위(조숙ㆍ권천례 동정부부는 공식 순교지가 서울로 기록돼 있지만 서소문 순교자로 추정) 등 27위에 이른다.

 

반면 새남터 형장에서 순교한 14위 가운데 11위가 앵베르(1797∼1839) 주교와 김대건(안드레아, 1821∼1846) 신부 등 성직자이고, 11위 중 성인이 8위나 된다.

 

 

시복 앞둔 주문모 신부

 

이번에 유일한 외국인이자 선교사제로 새남터에서 피를 흘린 주문모(야고보, 1752∼1801) 신부가 복자로 결정돼 오는 8월 시복을 앞두게 됨으로써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직자 가운데 9위가 시복ㆍ시성의 영예를 안게 됐다.

 

박해 시대에 ‘사남기(沙南基)’ 혹은 ‘노들’이라고 불렸던 새남터는 원래 조선 초부터 군사들의 연무장으로 쓰거나 중죄인들의 처형장으로 쓰던 곳으로, 한양성 밖 남쪽 한강변 모래사장이었다. 죽은 사람의 혼령을 천도시키기 위해 지노귀새남을 하던 터이기도 했다. 지금의 서울 용산구 이촌동, 한강로3가동 일대다. 그러던 곳이 그 많은 사제와 정의배(마르코, 1794∼1866), 현석문(가롤로, 1799∼1846) 회장 등 평신도 지도자 3위의 신앙 증거와 순교로 ‘영광의 땅’이 됐다.

 

그러나 새남터 형장의 정확한 위치는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현재 3966.9㎡(1200평) 부지에 세워져 있는 새남터 순교기념성당 옆 고가도로 건너편 용산역 철도기지창이 그 자리였을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새남터의 순교자 가운데 ‘조선교회의 초석’이 된 주 신부의 삶은 아주 극적이다. 17세기 초부터 천주교가 융성했던 중국 쑤저우 태생인 주문모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모 슬하에서 자랐다. 그런 가운데 20세가 돼 혼인했지만 3년 만에 상처하고 과거 준비를 하다가 30대가 돼서야 베이징으로 가서 대신학교를 졸업하고 1791년에서 1794년 사이에 사제품을 받았다. 조선에 파견될 선교사도 원래는 그가 아니었다. 최초로 선발된 조선 선교사는 오요한 신부였다. 그러나 1791년 베이징을 떠나 조선으로 향했던 그가 조선 신자들을 만나지 못해 베이징으로 돌아왔다가 2년 뒤 사망하면서 주 신부가 조선에 파견된 것이다.

 

1794년 말 입국 이후 주 신부의 사목활동은 눈부시다. 1795년 4월 5일 예수 부활 대축일에 조선교회 사상 첫 미사를 집전한 것을 시작으로 서울과 경기, 충청, 전라 등 전국 각지를 다니며 ‘발로’ 사목했다. 조선교회에 ‘회장제’를 도입해 조선교회를 발전시키기 위한 장기적 사목 방안을 세운 것도 그였고, 1797년께 베이징 비밀결사단체에서 유래한 명도회를 설립해 교리교육과 전교를 가능하게 했던 것도 그였다.

 

주 신부가 집필한 「사순절과 부활절을 위한 안내서」는 당시 신자들에게 큰 도움이 됐다. 특히 베이징에 황심(토마스, 1756∼1801)을 파견, 보편교회와 조선교회 신자들의 통교를 이어준 것도 주 신부였다.

 

 

주 신부에게 큰 빚을 진 한국교회

 

이 같은 주 신부의 공로를 생각한다면, ‘북방선교’라는 과제는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1979년 중ㆍ미 수교와 함께 굳게 닫혔던 중국의 빗장은 풀렸지만, 아직까지 종교에 대한 제약만은 풀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종교에 관한 한 아직도 ‘자치(自治)ㆍ자양(自養)ㆍ자전(自傳)’이라는 삼자(三自)정책을 고수하는 중국을 포함한 북방지역 선교에 대비, 현지인 선교사 양성은 한국교회의 ‘채무’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뜻깊은 새남터가 순교성지로 조성된 것은 생각보다 오래지 않다. 1950년에서야 한국천주교회의 순교사적지로 지정됐고, 전쟁 뒤 1956년에 ‘가톨릭 순교성지’라는 순교자현양비가 세워졌다. 이듬해인 1957년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가 사적지를 관리하면서 본격적으로 개발이 이뤄졌다. 1981년 서울대교구에서 새남터본당을 설립했고, 1987년 한국 전통 양식의 현 기념성당이 완공됐다.

 

순교성지 새남터성당에는 새남터에서 순교한 9위 등 모두 14위의 성인 유해가 모셔져 있다. 2006년에는 순교자 기념관도 세워 성인 유해실과 한국천주교회 설립과 박해사, 박해 형구와 형틀 등 전시물을 갖추고 있으며, 영상실도 설치해 순교자들의 발자취와 순교 신심을 전해 주고 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