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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124위 순교성지

124위 순교지를 가다 (02) 포도청 순교지

by 파스칼바이런 2014. 7. 20.
124위 순교지를 가다 (02) 포도청 순교지

124위 순교지를 가다 (02) 포도청 순교지

살이 터지고 뼈가 부러져도 끝끝내 신앙 지킨 증거·순교터

 

 

▲ 9일 좌포도청 터 표석 앞에서 기도를 바치는 서울순교자현양회 현양분과장 이영애(데레사) 분과장과 회원들. 오세택 기자  

 

 

▲ 홍근표 신부가 9일 포도청 순교자 현양관을 찾은 서울순교자현양회 현양분과원들에게

포도청 증거자와 순교자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일보 신사옥 앞 화단에 세워져 있는 우포도청 터 표석.

 

 

 

▲ 홍근표 신부가 9일 포도청 순교자 현양관을 찾은 서울순교자현양회 현양분과원들에게

포도청 증거자와 순교자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서울 도성 내 포도청 순교지와 순교자 5위

 

 “문초 때의 고통은 감옥에 갇힌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와 고름이 멍석을 썩어 들어가게 하고, 역한 냄새는 이루 형용할 수 없습니다. 페스트 성 질병으로 이미 여럿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굶주림과 갈증 또한 교우들에게 특히 무서운 고통입니다. 식사는 하루에 두 번씩 주먹만한 조밥 한 주발을 주는데, 하도 배가 고파 깔고 누운 짚을 씹어 먹을 지경입니다. 심지어는 감옥에 가득 차 한 줌씩 잡히는 이도 먹고 있습니다.”

1839년 당시 포도청에 갇혀 있던 교우들의 옥살이 고통을 제5대 조선대목구장 다블뤼 주교는 이렇게 기록한다.

 

포도청 환경이 얼마나 열악했던지, 곤장과 칼날 아래 순교하기도 전에 병사한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특히 굶주림과 갈증의 고통은 순교의 용덕을 잊게 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신자들은 매 맞아 죽거나(장살) 굶어 죽거나(아사)  밧줄에 목이 졸려 죽으면서도(교살) 용감하게 신앙을 증언하고 목숨을 바쳤다.

 

포도청은 이처럼 많은 신자들이 신앙의 증인으로서 목숨을 바친 ‘증거 터’이자 ‘순교 터’였지만, 오랫동안 교회사의 뒤안길에 있었다. 교회사학계에서나 일부분이 조명됐을 뿐 교회 공동체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게 잊힌 듯하던 포도청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지난해 2월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이 종로성당을 ‘포도청 순례지 성당’으로 지정하면서다. 이를 계기로 종로본당(주임 홍근표 신부)은 지난해 9월 성당 지하1층에 66.12㎡(20평) 규모 ‘포도청(옥터) 순교자 현양관’을 개관했다. 103위 성인 중 22위, 124위 중 5위, 지난해 3월 2차 시복 대상자로 선정된 하느님의 종 133위 중 23위가 순교한 순교터 포도청이 이제야 그 진면목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신앙을 증거했나

 

포도청 순교자 현양관으로 찾아가는 길목은 5월의 햇살로 따가웠다. 지난해 9월 개설된 ‘서울대교구 순례길’에 포함되면서 지금까지 2700여 명(방명록 서명자 집계)이 다녀간 포도청 순교자 현양관은 개관 당시와는 모습이 다소 달라져 있었다. 개관 초에는 순교자들을 문초한 형구가 주류를 이뤘지만, 최근 들어 전시 내용을 일부 수정해 포도청 순교자들의 순교 의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잘 알려진 성인보다는 124위 순교자 중 평범하면서도 다양한 순교자들의 생애를 부각시킴으로써 순교자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보다 ‘어떻게 살았는지’를 전하는 데 중점을 뒀다. 순례자들이 순교자들의 삶을 배우고 순교 신앙을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돕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지난해 9월 말 종로본당에선 포도청 순교자 현양회를 구성, 현양관 안내는 물론 포도청터에 대한 상세한 정보, 포도청 순례코스를 제공하고 있다. 문의 : 02-765-6101.

 

포도청 순교자 현양관에서 순교자들의 발자취를 체감한 후 포도청 자리를 찾아 순례를 시작한다. 퇴적된 역사의 지층으로 향하는 느낌은 쌉싸래하다. 주춧돌 흔적하나 찾아볼 수 없어서다. 종로성당에서 좌포도청 터→의금부 터→전옥서 터→우포도청 터→형조 터→경기감영 터에 이르는 3.79㎞ 구간엔 옛 자취란 찾아보려야 찾을 수가 없다.

 

 

#순교 신심 잊지 말아야

 

우선 종로성당에서 52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좌포도청 터도 마찬가지다. 옛 단성사 자리, 곧 현재의 서울시 종로구 돈화문로 26(묘동) 일대로, 서울 지하철 3호선 종로3가역 9번 출구 앞에 좌포도청 표석 하나가 달랑 세워져 있을 뿐이다. 좌포도청은 1795년 을묘박해 당시 124위 중 윤유일(바오로, 1760∼1795)와 지황(사바, 1767∼1795), 최인길(마티아, 1765∼1795) 등 3위가 갇히면서 교회사에 등장했다. 좌포도청 자리임을 가리키는 표석을 한참 지켜보다 햇살이 하도 뜨거워 그늘로 피했다. 순교자들은 이 더위를 어떻게 견뎠을까 싶다. 실제로 포도청에 갇혔던 교우들이 가장 견디기 어려워했던 것은 갈증이었다. 그 다음이 굶주림, 염병(오늘날의 장티푸스)과 같은 전염병 등이었다.

 

포도청 옥이 얼마나 가혹한 여건이었는지는 1878년 1월부터 5개월간 좌ㆍ우 포도청에서 옥살이를 한 제7대 조선대목구장 리델 주교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리델 주교 기록을 보면, 포청옥은 입구 포졸 숙소를 시작으로 교수형을 집행하거나 시체를 두는 방과 재래식 변소, 부엌 등이 입구(口)자 형태로 들어서 있었고, 썩은 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로 이뤄져 있었다. 이처럼 열악한 곳에서 포졸들의 구타와 열악한 식사로 신자들은 큰 고통을 겪었고, 짐승 취급을 당해야 했다.

 

이 좌포도청에서 윤유일과 지황, 최인길 등 3위가 매를 맞다가 죽었다. 이른바 ‘장살(杖殺)’이었다. 조선교회 사상 최초의 선교사제인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영입하고 한양 계동(현 서울시 종로구 계동)에 사목거점을 마련한 주역이었던 이들은 주 신부를 지키고자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 이들의 순교로 주 신부는 조선에서 무려 6년간이나 사목하며 조선교회의 기틀을 다졌고, 이같은 체제는 100년간 이어진 박해에도 교회공동체를 유지해나간 원동력이 됐다.

 

이어 우포도청으로 향했다. 좌포도청에서 우포도청까지는 1.4㎞. 그 사이엔 현재의 한국스탠다드차타드은행 본점 앞 의금부 터와 영풍문고 종로본점 앞 전옥서 터가 자리 잡고 있다. 우포도청은 현재의 광화문우체국 자리, 곧 서울시 종로구 종로 6(서린동)이다. 그래서 동아일보사 앞 화단에 놓인 우포도청 터 표석은 중앙우체국 앞으로 옮겨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어쨌든 이 우포도청에서 124위 중 동정녀 심아기(바르바라, 1783∼1801), 역관 김범우(토마스)의 이복동생 김이우(바르나바, ?∼1801)가 매를 맞다가 순교했다. 역시 장살이었다.

 

포도청 순교자는 124위 중 5위에 그치지만 포도청을 거쳐간 순교자는 이보다 훨씬 더 많다. 103위 성인 중에서는 70위, 124위 중 52위에 이르는 순교자가 포도청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느니 차라리 천만 번 죽겠다”고 신앙을 증언하며 새남터와 서소문 밖 형장 등지로 끌려가 순교했다.

 

이렇게 1795년 을묘박해 당시 서울에서 첫 순교자를 탄생시키고 1879년 기묘박해 때 서울의 마지막 순교자를 탄생시킨 포도청은 안타깝게도 역사의 퇴적층에 묻혀 있다시피하다. 이제 그 포도청의 순교사적 의미를 캐내고 현양하는 일은 우리의 몫이다.

 

홍근표 신부는 “시복과 시성은 순교자들의 명예를 회복한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이미 하늘나라에 계신 순교자들과 우리를 어떻게 연결하느냐, 다시 말해 순교자들의 삶을 통해 우리가 예수님을 어떻게 닮아가느냐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