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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124위 순교성지

124위 순교지를 가다 (03) 당고개순교성지

by 파스칼바이런 2014. 7. 21.
124위 순교지를 가다 (03) 당고개순교성지

124위 순교지를 가다 (03) 당고개순교성지

애끊는 모정마저 하늘에 봉헌한 어머니 품은 성지

 

 

▲ 2011년 9월 재조성돼 봉헌된 당고개순교성지 전경. 신계역사공원 내에 ‘어머니의 품’을

주제로 지하 성당과 전시실, 지상부 한옥 공간을 갖춘 성가족성지로 조성됐다.

 

 

▲ 서울 도성 지도와 당고개순교성지.

 

 

 

 

▲ 이성례 마리아와 함께 걷는 십자가의 길 14처 중 8처.

 

‘내포 사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집안의 4남 6녀 중 귀여운 막내딸, 남편 최경환(프란치스코)과 안양 수리산 교우촌을 일궜던 지혜로운 여장부, 장남 최양업(토마스)을 한국 천주교회의 첫 신학생이자 두 번째 사제로 길러낸 신앙의 어머니, 매 맞아 죽어가는 남편을 감옥에서 지켜봐야 했던 비운의 아내, 피와 고름이 엉겨붙어 썩는 포청옥 멍석에 누워 굶어 죽어가는 젖먹이 아들을 지켜보다 못해 배교한 눈물의 어머니, 장남 때문에 다시 형조에 붙잡혀 간 뒤론 순교 원의를 지켜 젖먹이를 하느님께 바치고 자신도 순교한 모진 육정의 위대한 어머니…. 이성례(마리아, 1801∼1804)다.

 

1840년 1월 31일, 만초천변 당고개에서 이성례는 흔연히 칼을 받았다. 부모 순교로 고아가 될 4형제를 하느님께 맡긴 채였다. 같은 날 함께 순교한 박종원(아우구스티노)과 홍병주(베드로), 이인덕(마리아), 권진이(아가타), 손소벽(막달레나), 이경이(아가타) 등 6위는 103위로 이미 시복시성돼 있다. 이들과 친ㆍ인척관계여서 같은 날 순교하지 못하고 이튿날 순교한 홍영주(바오로)와 이문우(요한), 최영이(바르바라) 등도 이미 시성돼 전 세계 교회의 공경을 받고 있다. 그런데 이성례만 시복시성돼 있지 않다. 왜 그랬을까. ‘배교’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는 8월 시복을 앞둔 이성례 순교자는 당고개에서 순교한 다른 순교성인 9위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성지 해설사들도 이성례의 일생에 대해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성인 9위에 대한 설명이 20%정도라면, 이성례에 대한 소개가 80%를 차지할 정도다. 아이 때문에, 모성 때문에 신앙이 흔들렸지만, 신앙으로 육정을 극복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아이들을 뿌리치고 순교했다면, 그는 우리가 다가갈 수 없는 ‘위대한 순교자’로 남았겠지만, 그렇게도 많은 사랑을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식 때문에 흔들렸고 배교까지 할 정도로 끊을 수 없었던 그 모정을 마침내 하느님께 봉헌하고 형장으로 향했다. 그 열절한 순교혼이 듣는 이들의 마음을 흔들고 눈물샘을 자극하는 것이다.

 

오늘의 당고개는 175년 전 그날의 만초천변 사형터가 아니다. ‘신앙 때문에’ 이성례가 목숨을 바친 순교지는 아파트로 둘러싸여 있다. 도로명 주소로는 서울 용산구 청파로 139-26(신계동 56). 1만 5000㎡ 규모 ‘신계역사공원’ 내에 자리한 당고개 순교성지는 이제 ‘어머니의 품 속’ 같은 성가족 성지로서 순례자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을 나눠주고 잇다.

 

인근 아파트단지 재개발과 함께 2011년 9월 재조성된 당고개 순교성지가 이같은 성가족 성지가 된 데는 성지 담당 권철호 주임신부와 한국화가 심순화(가타리나, 52)씨의 기획과 헌신이 결정적이었다.

 

 

#전통적 조형미가 돋보여

 

현재 당고개 순교성지는 지하성당과 전시실, 지상 전통 한옥 등으로 이뤄져 있다. 전체적으로 황토와 기와, 도자기옹기 파편 등을 활용해 전통적 조형미를 보여준다. 특히 지상부는 기와 지붕을 얹은 전통 한옥을 중심으로 10명의 순교자가 ‘어머니 품’ 안에서 성가정을 이루며 살아가는 따뜻한 공간을 이루고 있다. 순교 성인을 상징하는 찔레꽃과 매화, 목칼 등은 기해박해(1839년) 당시 순교자들 넋을 대변한다. 피 흘린 순교자들의 고통보다는 이미 하늘나라에 가 있는 천상 순교자들이 신앙의 후손인 우리를 감싸주는 모성적 사랑을 표현하는 데 주안점을 뒀다. 찔레꽃은 원래 하얗지만 순교성인들을 상징하고자 빨간 색으로 바꿨다. 지하 성전 한지 유리화나 지상 매화문양은 순교자와 성인들의 부활을 상징한다. 그야말로 ‘찔레꽃 아픔이 매화꽃 향기로 피어나는 성지’로 탄생된 셈이다.

 

성지 어느 곳을 가도 이성례 순교자의 순교 영성이 성지 특유의 그림 언어로 구현되지 않은 데가 없다. 성당이나 지상부 마당에 조성된 십자가의 길 14처도 ‘이성례 마리아와 함께 걷는 십자가의 길 14처’ 다.

 

지하 전시실에 들어서면, 아홉 분의 성인과 함께 이성례를 성화로 만날 수 있고, 지상부에도 유리 모자이크로 같은 그림을 형상화했다. 이 가운데 2008년에 ‘사제의 어머니’(70x130㎝)라는 제목으로 제작된 이성례의 초상은 신앙 때문에 받아야 할 고통의 목칼과 은총의 목칼이 배경으로 그려져 있다. 목칼 뒤 영대는 최양업 신부를, 흡사 춤을 추는 듯한 이미지의 동저고리는 부모의 순교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아이들을 각각 상징한다.

 

최근 이성례의 일대기를 총 16점의 연작으로 제작 중인 심순화 작가는 “이성례 마리아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와 동떨어진 특별한 분이 아니셨기에, 우리와 똑같은 분이셨기에 더 가까운 느낌을 갖게 된다”면서 “특히 이성례 마리아의 모성은 당고개 성지를 어머니의 품 같은 성지로 조성하게 된 계기가 됐다”고 설명한다.

 

#드라마 같은 순교심신 느낄 수 있어

 

유물 하나 없는 당고개 성지는 성화와 조각, 유리화, 유리모자이크 등 갖가지 예술 작품을 통해 ‘말 없는 언어’로 순교영성을 전해주는 특별한 성지가 됐다. 이런 취지로 만들어진 성미술의 이미지는 마치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다.

 

당고개 성지를 찾는 순례자들은 이같은 이미지를 통해 성인들께 청하는 기도를 바치며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고 순교성인들의 삶을 새기며 세상을 헤쳐 갈 힘을 얻는다. 이를 위해 성지 측은 지난 3월 성 박종원을 시작으로 성 최영이 바르바라, 성 손소벽 막달레나 등 성인, 성녀께 청하는 기도문을 담은 상본을 매달 하나씩 제작해 나눠주고 있다.

 

당고개 순교성지 곳곳에 밴 이성례 순교자의 삶, 그리고 그의 순교영성은, 평범하지만 평범하지만은 않은 메시지를 전해준다. 우리 신앙은 배반하지 않는 신앙이 아니라 ‘배반을 딛고 일어서는’ 신앙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던 날, 제자들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것처럼, 또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은 제자가 없었던 것처럼. 문의 : 02-711-0933

 

권철호 신부는 “자칫 선명한 핏자국만 남겨졌을 당고개 순교성지에 하느님의 종 이성례 마리아는 모성이라는 감성의 색채로 순교자의 드라마를 완결시켰다”면서 “배교조차도 감동적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 힘은 전적으로 이성례 순교자 덕분이었다”고 설명한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