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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124위 순교성지

복자 124위 순교지를 가다 (18) 청주 충청 병영순교지

by 파스칼바이런 2014. 11. 2.

복자 124위 순교지를 가다 (18) 청주 충청 병영순교지

읍성 순례길 걸으며 느끼는 순교자 숨결

 

 

▲ 읍성 순례지

 

조선은 성곽의 나라였다. 20세기 초까지 현존했던 조선 성곽은 무려 2000여 개에 이른다.

 

 

그렇지만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성곽은 대부분 훼손됐다. 청주 읍성 또한 마찬가지였다. 도심 한복판 청주 감영과 병영을 둘러싸고 있던 옛 청주 읍성은 1910년대 일제가 도시정비사업을 한다는 명분으로 일본인 상가를 만들며 허물어버렸다.

 

지난해 청주 읍성 훼손 100주년을 맞아 시민들이 성돌찾기운동을 벌여 찾아낸 650개와 새 석재로 청주 읍성 서문 성벽 일부를 복원했지만, 복원된 성벽은 전체 둘레 1640m 중 35m에 불과하다.

 

무너진 청주 읍성 안팎에 박해 시대 순교터와 신앙 증거터가 즐비하다. 이들 순교터와 증거터 관할 본당인 청주 서운동성당을 출발해 청주 읍성 4대문, 곧 남문(청남문)과 서문(청추문), 북문(현무문), 동문(벽인문)을 돌아 서운동성당으로 돌아오는 4㎞ 구간 순례길을 만든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장터 순교터에 들어서다

 

1932년 설립된 청주본당(현 청주 북문로본당)의 후신 서운동성당에 들어섰다. 청주 순교 복자 5위의 복자화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성모자상을 중심으로 하단 왼쪽에 무지개에 둘러싸인 오반지(바오로, 1813∼1866)를 시작으로 원시보(야고보, 1730∼1799)와 배관겸(프라니스코, ?∼1800), 장 토마스(1815∼1866), 김사집(프란치스코, 1744∼1802) 등이 등장한다. 한윤희(가타리나) 작가의 작품으로, 순교 신앙의 얼이 물씬 전해온다.

 

한참을 그림에 빠져 있다가 성당을 나와 서운동본당 주임 강희성 신부, 손영배(임마누엘, 74) 본당 순교자현양회장, 손한기(요한 보스코, 64) 본당 평협 회장 등 신자들과 순례길을 따라 걸었다.

 

청주의 대표적 재래시장인 육거리 시장 한복판에 순교터가 있다. 번화한 시장을 지나자마자 마치 신기루처럼 옛 청주진영 순교터, 현재의 청주 제일교회가 나타났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지정 제6호 유적 교회로도 지정된 제일교회는 조선 말기 청주 영장의 관사터로, 복자 오반지와 하느님의 종 김준기(안드레아), 전 야고보의 순교터이자 최용운(암브로시오)의 신앙 증거터다. 흔적이라곤 교회 기념비에 “천주교인들의 순교터”라는 기록이 한 줄 남아 있을 뿐이다.

 

교회를 나와 다시 시장으로 들어서니 금방 옛 남석교 장터다. 조선 시대 이전에 만들어진 다리로는 가장 길다는 80m 길이의 남석교는 이미 오래 전에 지하에 매몰돼 순교터는 찾아보려 해도 찾을 수가 없다. 복자 김사집은 이 장터에서 곤장 60대를 맞고 순교했다. 212년 전의 그 날을 상상해본다. 한겨울 혹한이 휘몰아치는 장터에 끌려 나온 김사집은 이미 해미에서 치도곤 90대를 맞아 만신창이가 된 상태로 구경꾼들이 모여든 장터로 끌려 나와 재차 곤장을 맞는다. 한 대, 두 대 곤장 횟수가 늘어갈수록 몸은 말을 듣지 않는다. 하지만 하느님 향한 마음만은 철석같다. 이제 그 증거의 기억은 남석교만이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청주 읍성을 따라 걷다

 

‘석교’의 기억은 마음속에만 간직한 채 남문터와 충청병영 우물터를 지나니 얼마 가지 않아 옛 충청병영, 현 중앙공원이다. 서울 탑골공원과 똑같이 어르신들이 많이 모여드는 중앙공원 내 충청도 병마절도사 영문(충북 유형문화재 15호)은 한창 보수 중이고, 병영 누각인 망선루는 변함없이 그 위용을 자랑한다. 바로 그 곁에 척화비가 세워져 있다. 역사가 얼마나 냉엄한지, 역사 변화의 진폭이 얼마나 큰지는 1871년 천주교와 양왜를 배척하고자 세웠던 척화비가 석교동 노상 하수구 뚜껑으로 쓰이다 1976년에 발견된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옛 충청병영터는 복자 원시보와 복자 배관겸의 순교터이자 복자 김사집의 신앙 증거터다. 순교 원의로 가득했던 원시보는 울면서 따라오는 부인과 자식, 벗들을 뿌리치고 1799년 4월 17일 갖은 혹형을 다 당하다가 순교함으로써 청주의 첫 순교자가 됐다. 이어 배관겸도 ‘온몸의 살이 헤지고 팔다리가 부러져 뼈가 드러나는’ 고통을 영웅적 인내로 참아내고 1800년 1월 7일 형리들의 매질을 당하다 순교했다. 이를 기려 청주교구는 신유박해 200주년 이듬해인 2002년에 망선루가 바라다보이는 길목에 순교자 현양비를 세웠다. 그 순교의 기억은 이제 날마다 현양비를 찾아 기도를 바치고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 신앙적 삶을 잇는 신자들의 기도 속에서 되살아난다.

 

 

장대터를 거쳐 옛 옥터로

 

성벽을 일부 복원한 청주 읍성과 서문터, 청주목 동헌인 청녕각을 거쳐 북문 앞 옛 장대터에 도착했다. 장수들이 전쟁이나 훈련 때 성내 군사들을 지휘하던 장대 또한 허물어져 기왓장 하나, 벽돌 하나 남아 있지 않다. 북문터 표석 하나가 고작이다. 서운동본당에선 표석 인근 잔디밭에 표지판을 하나 세워 순례자들의 기도 공간으로 삼고 있다. 옛 장대터의 정확한 위치는 청주 북문로 2가 사직대로 379 일대다. 이곳에서는 복자 장 토마스와 1866년 병인박해 순교자 손관보(베드로), 여 요셉 등이 순교했다. “만 번 죽어도 천주교를 배반할 수 없다”고 당당히 고백하던 장 토마스의 신앙적 용덕이 그대로 전해져오는 듯하다.

 

순례 발길은 다시 동문 터 옆 옥터로 향했다. 이곳 또한 아무 흔적이 없다. 국보 제41호 용두사지 철당간만이 외롭게 서 있다. 청주시 남문로 2가 남사로 133-20 인근이다. 복자 배관겸과 오반지, 1800년 해미에서 순교한 복자 인언민(마르티노), 하느님의 종 전 야고보 등이 이 옥터에서 신앙을 증거했다. 또 순교자 오사룡과 윤 바오로, 이영준(아우구스티노) 등의 신앙 증거터이기도 하다.

 

이를 끝으로 성당으로 돌아오는 길은 묵상의 길이다. 순교 신앙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순교자들의 삶을 어떻게 본받아야 하는지, 순교 신심을 오늘에 어떻게 살아낼 것인지 등을 돌아보는 길이다.

 

강희성 신부는 “일상에서 매번 선택하는 삶이 순교의 삶이 되도록 하는데 도심 순례지는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장기적으로 충청병영을 중심으로 한 도심 순례지를 어떻게 가꿔갈지, 순례자들에게 어떻게 도움이 되도록 할지 검토해가며 순례지 성역화를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글·사진=평화방송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 순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