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톨릭 관련>/◆ 신 앙 관 련

[사진 속 역사의 현장 광복 70년 분단 70년] <9> 지학순 주교 투옥 사건과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설립

by 파스칼바이런 2015. 10. 18.

[사진 속 역사의 현장 광복 70년 분단 70년]

<9> 지학순 주교 투옥 사건과 ...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설립

그리스도의 빛으로 암흑의 시대 밝힌 목자들

평화신문 2015. 09. 27발행 [1333호]

 

 

▲ 1974년 원동성당에서 원주교구민과 각 교구 사제단이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지학순

주교의 석방과 인권 회복을 기도회를 가진 뒤 가두시위에 나서고 있다. 평화신문 자료사진

 

▲ 1975년 2월 서울구치소에서 석방된 지학순 주교가 사제들의 부축을 받으며

구치소 마당을 나서고 있다. 평화신문 자료사진

 

 

“소위 ‘유신헌법’이라는 것은 1972년 1월 17일에 민주 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고 국민의 의도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폭력과 공갈과 국민투표라는 사기극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다.”

 

1974년 7월 23일 성모병원(현 명동 가톨릭회관)에 몰려든 기자들 앞에서 당시 원주교구장 지학순(다니엘, 1921∼1993) 주교는 이렇게 ‘양심선언’을 한다.

 

지 주교는 이에 앞서 7월 6일 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 창립총회에 참석한 뒤 필리핀과 독일, 바티칸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던 길에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연행된 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 주거 제한 조치를 당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양심선언은 충격파가 컸다.

 

지 주교는 자신을 기소한 근거가 된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와 제4호는 역사상 가장 참혹한 ‘인권 유린’이라며 비상군법회의는 법과 자신의 양심에 따라 독립해 재판하지 못하는 ‘꼭두각시’라고 선언했다.

 

7월 16일 법무부에서 보내온 공소장이 지 주교에게 이미 전달된 터여서 이날 나온 그의 양심선언은 독재 권력에 대한 결연한 투쟁 선언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도 지 주교는 양심선언을 통해 군사 파시즘 체제 아래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그대로 드러냈다. 이에 따라 지 주교는 8월 12일 1심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돼 이듬해 2월 17일 수감 중이던 서울구치소에서 석방되기까지 6개월 넘게 갇혀야 했다.

 

지 주교가 민청학련에 대한 자금 제공과 내란 선동, 정부 전복 혐의로 연행돼 구속되자 목자를 잃은 원주교구를 비롯해 한국 천주교회, 특히 한국 주교단은 지 주교의 조속한 석방을 강력히 촉구했다. 또 한국 천주교회는 이를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보는 자성의 계기로 삼는다. 이는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이 7월 25일 ‘고통 중에 있는 정의로운 사람들을 위한 미사’ 강론에서 지 주교 사건을 두고 “오늘날 우리 교회의 쇄신을 위해 큰 반성의 계기가 됐다”고 고백한 데서 잘 드러난다.

 

바티칸의 보이지 않는 ‘물밑 작업’도 있었다. 2006년 2월 공개된 정부 외교문서에 따르면, 당시 교황청과 박정희 정권은 지 주교의 신병 처리를 놓고 타협을 시도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해 7월 17일 주한 교황대사 루이지 도세나 대주교는 노신영 외무부 차관을 면담하고 지 주교가 구속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지 주교가 양심선언을 발표하면서 이 같은 석방 타협안은 성사되지 못했다. 또한, 당시 정부 측에서 지 주교를 원주교구장직에서 해임할 것을 석방 조건으로 내걸면서 타협이 이뤄질 수 없었던 측면도 있다.

 

이 와중에 ‘지 주교를 위한 전국 사제단 합동 기도회’가 8월 26일 인천교구 답동주교좌성당에서 열렸다. 이 기도회에서 ‘성직자 일동’으로 첫 성명을 발표, △지 주교의 양심선언 적극 지지 △비상군법회의 설치를 규정한 대통령 긴급조치 제2호 즉각 해제 △투옥 중인 지 주교와 목사, 교수, 변호사, 학생 등 즉각 석방을 요구했다.

 

또한, 지 주교의 구속을 계기로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태어났다. 사제단 결성이 구체적으로 논의된 것은 9월 23일 원주 세미나로, 이날 세미나에 자발적으로 참석한 300여 명의 사제는 이튿날 사제단 결성을 결의한다. 당시 한국인 사제 639명, 외국인 선교 사제 285명으로 총 사제 수가 924명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한국 천주교회 전체 사제 가운데 3분의 1이 참여한 셈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정의구현사제단은 결성 이틀 만인 9월 26일 서울대교구 명동주교좌성당에서 ‘순교 찬미 기도회’를 열어 첫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유신헌법은 이 땅의 민주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였다”고 선언했다. 이어 시국선언문 ‘우리의 결의’를 통해 △유신헌법 철폐 △민주헌정 회복 △긴급조치 전면 무효 △지학순 주교를 비롯한 애국인사 석방 △국민 생존권과 기본권 존중 △언론, 보도, 집회, 결사의 자유 보장 △서민 대중 최소한의 생활 복지를 보장하는 경제 정책 확립을 촉구했다.

 

지 주교의 구속과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결성은 이후 한국 교회가 자신의 선교 정책에 사회정의를 통합하고 교회 쇄신의 계기가 됐으며, 나아가 한국의 민주화에도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처럼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어놓은 사회정의를 위한 투신의 비전은 1967년 강화 심도직물 노동조합 사건으로 촉발됐고, 지 주교 구속과 정의구현전국사제단 결성을 통해 한국 교회에 뿌리를 내린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지 주교 양심선언, 민주화 물꼬 튼 사건”

정의구현사제단 결성 주도한 안충석 신부

평화신문 2015. 09. 27발행 [1333호]

 

 

▲ “지학순 주교님의 구속은 유신체제에 대한 교회의 대응을

유발하게 했다”고 설명하는 안충석 신부.

 

 

“지학순 주교님의 투옥은 유신 체제에 대한 교회의 총체적이고 집중적인 대응을 유발하게 한 응결점으로 작용했지요.”

 

당시 서울대교구 동대문본당 주임이었던 안충석(원로사목자) 신부는 “지 주교님의 구속은 긴급조치 제4호, 곧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1960년대부터 쌓여온 정치적 억압과 인권 유린, 경제적 수탈과 독점이라는 정치ㆍ경제ㆍ사회적 배경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향이라는 교회사적 배경이 깔려 있었다”고 말문을 뗐다.

 

안 신부는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사제들이 시대적 징표를 읽고 교회를 쇄신하고 적응하기 위해 공의회 문헌을 매일같이 읽고 토론하면서 세상을 다시 바라보게 된 것도 그 배경이 됐다”고 전했다. 이뿐 아니라 “공의회의 정신은 선각적 주교와 사제, 수도자, 평신도들에 의해 개별적 차원이긴 했지만 학습되고 수용되고 실천되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지 주교가 체포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안 신부는 당일 오태순ㆍ함세웅 신부 등과 함께 전국의 동창 사제들에게 연락, 그해 7월 10일 명동대성당에서 지 주교의 석방을 촉구하는 첫 시국기도회를 열었고, 이듬해 지 주교가 석방되기까지 각 교구 사제들과 함께 ‘인간화와 복음화’를 주제로 기도회를 열어 사회 개혁을 촉구했다.

 

“7월 23일 지학순 주교님의 양심선언은 유신헌법 반대의 물꼬를 튼 사건이었지요. 그때엔 아무 데서도 유신헌법 반대를 거론하지 못했지요. 지 주교님의 양심선언이 처음이었습니다. 그에 앞서 1971년 10월 원주 원동주교좌성당에서 지학순 주교님과 교구 사제단이 부정부패 일소를 위한 특별 미사를 봉헌한 뒤 시위에 나섰는데, 이 또한 교회 안팎에 커다란 충격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시국기도회에 함께한 사제들과 함께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결성을 주도하기도 한 안 신부는 “지 주교님 구속을 계기로 사제단이 탄생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지만, 이미 정치ㆍ경제ㆍ사회적으로, 또 교회사적으로 유신체제에 대한 교회의 대응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기에 사제단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어 “정의구현사제단의 출현은 무엇보다도 ‘모든 세대를 통해 그 시대의 특징을 탐구하고 복음의 빛으로 그것을 해명해 줄 의무’(「현대세계의 사목헌장」4항)에 대한 응답이었고, 또 그것을 목적으로 출범했다”고 설립 의미를 설명했다.

 

오세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