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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신 앙 관 련

[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사랑과 평화의 사도 장면 요한 <1>

by 파스칼바이런 2015. 10. 17.

[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사랑과 평화의 사도 장면 요한 <1>

평화신문 2015. 09. 27발행 [1333호]

 

 

대한민국 승인 위해 특사로 UN 파견교황 비오 12세, 한국 지원에 앞장대표단 노력과 장면의 기도 밑거름한국 독립 승인안 가결, 북은 부결

 

 

▲ 장면 수석대표가 한 외국 대표에게 진지하게 신생 대한민국 정부의 승인을

지지해 줄것을 설득하고 있다. 출처 = 「건국·외교·민주의 선구자 장면」

 

▲ 대한민국 외교관 여권 1호. 제3차 유엔총회에 대한민국 수석대표로 참석한 장면의 여권. 이 여권에는 붓글씨로 ‘바티칸 파견 대한민국 대통령 특사’라고 적혀 있어 가톨릭 교회의 도움을

이끌어내기 위한 이승만 대통령의 뜻을 담고 있다. 서울 명륜동 장면 가옥에 보관돼 있다.

 

 

1948년 12월 12일 새벽 3시, 하늘이 뚫린 듯 퍼붓던 장대비가 멎은 파리는 쌀쌀했다. 자동차도 다니지 않고 네온사인만 명멸하는 시가지는 적막강산이다. 숙소인 팔레 데 돌세 호텔을 나서 성 요셉 성당으로 향하는 운석(雲石) 장면(張勉, 요한, 1899~1966)과 모윤숙(毛允淑, 1910~1990)의 표정이 진지하다. 다시 보슬비가 내린다.

 

“미스 모, 이렇게 동반해 주니 참 고맙소. 새벽에 기도드리는 습관을 가지게 되니 마음도 시원해지고 사는 보람을 느끼게 되오.”

 

“고맙긴요. 오늘이 바로 우리 대한민국의 명운이 걸린 날인데 제가 동행해야지요.”

 

제3차 유엔 총회 마지막 날인 이날 오후 에펠탑이 바라보이는 샤요 궁(Pajais de Chaijjot)에서는 불과 4개월 전에 탄생한 대한민국 독립 승인 결의안에 대한 총회의 표결이 실시된다. 아울러 소련이 상정한 ‘5ㆍ10 총선 결과 폐기와 유엔한국위원회의 해체 동의안’에 대한 표결도 있다. 나라의 존망이 달린 날이다. 근대 국민 국가는 민족을 단위로 형성되는 것이 상식이지만 현실적으로 남과 북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섬으로써,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국제기구의 승인을 받는 일이 무엇보다 다급한 일이었다.

 

대한민국 수석대표 장면과 대표단의 일원인 모윤숙은 어느새 성 요셉 성당에 이르러 제대 오른쪽 성모상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난생처음 성당에 간 모윤숙은 30분도 안 돼 무릎이 아파 견딜 수 없었다. 그런데도 장면은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자애로우신 어머님, 한국 교회의 수호성인이신 성모 마리아와 요셉 성인이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라는 절절한 기도를 계속했다. 한 시간 정도 지나서야 장면은 일어나 성당 밖으로 나왔다. 모윤숙은 당연히 호텔로 돌아갈 줄 알았다.

 

“요 근처 아베 마리아 성당이 있는데 거기 가서 미사 참례하실까요?”

 

모윤숙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었다.

 

“장 박사님, 저는 무릎이 아파서 도저히 따라가기 힘들겠어요.”

 

그러나 투철한 사명의식과 뜨거운 애국심, 그리고 굳센 신앙심에 불타는 장면의 인격에 감복한 모윤숙은 아베 마리아 성당으로 함께 가서 그 역시 간절히 기도했다.

 

 

호텔로 돌아온 장면은 대표단을 다시 소집해 놓고 “각국 대표들이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 다시 찾아가 확인합시다. 최후의 승리를 확보해야 합니다”라며 독려했다. 그때 유엔 총회는 뒤늦게 상정된 한국 문제를 토의하느라 9월 21일 개막된 회기 마지막 날인 11일을 넘기고 새벽 2시 20분까지 이어지다가 오후 3시에 속개하기로 하고 각국 대표들이 쉬는 중이었다.

 

한국 문제는 회기 최종 기한 닷새를 앞둔 12월 6일 제1위원회(정치위원회)에서 토의가 시작되었다. 소련과 그 위성국들의 집요한 반대는 극에 달했다. 다음 날 한국 초청안이 통과되고 장면이 역사적인 대표 연설을 했다. “본인은 1947년 11월 14일 유엔 총회에서 결의한 바 있는 한국 정부가 곧 본인이 대표하는 대한민국 정부임을 재확인하고, 개별적으로도 승인하여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00자 원고지 38쪽 분량의 논리 정연한 내용이었다.

 

 

1947년 11월 14일 제2차 유엔 총회 결의에 따라 유엔 감시하의 1948년 5ㆍ10 총선으로 구성된 제헌국회에서 7월 20일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을 대통령으로 뽑았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하기 4일 전인 8월 11일 내각 구성에 앞서 제3차 유엔 총회에 파견할 대표단을 선임했다. 대표단은 수석대표 장면, 차석대표 장기영(張基永, 1903~1981), 정치고문 조병옥(趙炳玉, 1894~1960), 경제고문 김우평(金佑坪, 1898~1961) 법률고문 전규홍(全奎弘, 1906~2001), 그리고 김활란(金活蘭, 1899~1970), 정일형(鄭一亨, 1904~1982), 모윤숙, 김진구(金振九, 1906~1987)로 구성되었다.

 

이승만이 천주교를 대표해 제헌국회에 진출한 장면을 수석대표로 발탁한 것은 당시 국제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교황청과 가톨릭 교회의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해서였다. 대한민국 외교관 여권 1호인 장면의 여권에 명기된 ‘바티칸 파견 대통령 특사’라는 직함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승만의 판단은 정확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대축일인 12월 8일 제1 위원회는 한국 독립 승인안의 총회 상정을 결정했다. 드디어 12월 12일 오후 3시 30분 유엔 총회가 속개되었다. 폭우가 다시 쏟아지기 시작했다. 오후 5시 8분 ‘대한민국 승인과 신(新) 유엔한국위원단을 파송해 통일을 도모할 것을 결의한다’는 대한민국 독립 승인안이 3개국이 불참한 가운데 48 대 6(기권 1)으로 가결되었다. 7분 후 소련이 발의한 동의안은 46 대 6(기권 3)으로 부결되었다. 비로소 대한민국 건국이 완성되었다. 국민 국가로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세계가 인정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 이면에는 미국과 교황청의 지원이 컸다. 미국 대표 덜레스(John Foster Dulles, 1888~1959)는 장면과 같은 신앙인으로서 처음부터 서로 신뢰하면서 긴밀하게 협조해 승리를 거두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한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인 1947년, 비오 12세 교황은 초대 평양대목구장 패트릭 번(Patrick J. Byrne ㆍ方溢恩, 메리놀 외방 전교회, 1888~1950) 주교를 한국 주재 교황사절로 임명해 진작부터 신생 한국 정부를 인정했다. 비오 12세는 이어 교황 비서로서 교황청 외교 업무를 총괄하던 조반니 몬티니(Giovanni Battista Montini, 1897~1978 , 후일 복자 바오로 6세 교황) 몬시뇰과 프랑스 주재 교황 대사 주세페 론칼리(Angelo Giuseppe Roncalli, 1881~1963, 후일 성 요한 23세 교황) 대주교에게 “한국 대표단을 적극 도우라”고 당부했다. 소탈한 론칼리는 장면으로부터 한국의 입장을 설명 듣고 각국 대표들에게 한국 지지를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장면은 유엔 총회를 마치고 로마로 날아가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비오 12세 교황에게 깊이 감사했다.

 

“사불성 생불환(事不成 生不還 : 일을 이루지 않으면 살아서 돌아가지 않으리라)”이라는 결의로 50여 개국 대표들을 지난 3개월 동안 일일이 만나 지지를 호소한 대표단의 노력은 눈물겹다. 11월 13일에는 헤이그 이준(李儁, 1859~1907) 열사 묘소를 참배하며 그 결의를 재확인했다. 새벽부터 기도로 하루를 시작한 장면은 ‘독립당’으로 분류될 정도로 열과 성을 다했다.

 

10월 3일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축일(오늘날엔 10월 1일에 지냄)에 파리 서북쪽 성녀의 리지외 성지를 참배하려고 가는 기차 안에서 호주 시드니 대교구 부교구장 오브라이언 주교를 만났다. 사학자인 오브라이언 주교는 장면을 보자 “일찍부터 당신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같은 신앙인으로서 적극 돕겠습니다.”고 약속하고, 당시 유엔 총회 의장이던 호주 외상 에버트와 다른 나라 대표들도 소개해 주었다. 회기 마지막 안건으로 한국의 국제적 승인을 받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표결일이 가까워지자 장면은 더욱 초조했다. 무조건 가르멜 수녀원을 찾았다.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의 언니가 원장이었고 데레사 성녀도 방문한 수녀원이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문지기 수녀의 질문에 장면은 그냥 “기도드리러 왔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 수녀는 다시 “어디서 오셨습니까?”하고 재차 물었다.

 

“한국에서 나랏일로 기도드리러 왔습니다. 원장 수녀님을 만나게 해 주십시오.”

 

“수녀원장을 만나러 왔다”는 말에 검은 베일을 쓴 엄숙한 가르멜 수녀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장면은 침착한 목소리로 자신의 사명과 수녀원 문을 두드리게 된 사정을 소상하게 말했다.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원장 수녀는 휘장을 거두며 얼굴도 가리지 않은 채 장면을 만나 주었다. 더 자세한 호소에 원장 수녀가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로서 힘을 다해 보겠습니다.”

 

원장 수녀도 장면의 진지한 자세에 감복했다.

 

“당신의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우리 수녀원 모두가 기도드리겠습니다.”

 

수녀원 전체가 한국 문제의 해결을 위해 기도드리는 그 자체가 기적이다.

 

장면은 기도의 힘을 믿었다. 뿌리 깊은 신앙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