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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고 이태석 신부

이태석 신부의 사랑, 남수단 톤즈를 가다 (상)

by 파스칼바이런 2016. 4. 29.

이태석 신부의 사랑, 남수단 톤즈를 가다 (상)

이태석 신부, 그리고 선교사들

계란으로 바위를 치듯… 열악한 땅에 복음 퍼져가길 기다린다

발행일 가톨릭신문 2016-04-03 [제2988호, 13면]

 

 

▲ 3월 13일 톤즈 예수성심성당에서 주일미사를 봉헌하는 선교사들.

 

 

“병을 이겨내고 다시 톤즈의 아이들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아프리카 최오지 남수단 톤즈는 이태석 신부(1962~2010, 살레시오회)가 마지막 숨을 쉴 때까지 사랑한 땅이었다. 그가 떠난지 6년, 톤즈는 여전히 그를 기억한다. 이 신부의 삶과 정신을 전하고 아프리카의 가난한 청소년들을 돕는 수단어린이장학회(이사장 안정효)와 함께 3월 11~18일 톤즈를 방문했다.

 

“이곳에 제일 먼저 온 선교사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전부터 이들의 문화 속에 슬그머니 복음화의 밑거름을 뿌려 놓으셨습니다.”(이태석 신부의 「친구가 되어주실래요」 중에서)

 

1년이 채 안돼 30㎏이나 몸무게가 빠졌다. 온 몸에는 열꽃처럼 빨갛게 발진이 일었다. 몸 안의 열이 배출되지 못하고 누적된 탓이다.

 

다른 세 명의 인도인 선교사들과 함께 살레시오회 남수단지부 톤즈공동체에 머무는 이해동 신부. 일종의 탐색기로 3년을 약속했으니, 이제 3분의 1을 지내는 중이다. 늦은 나이에 선교사제로서의 활동을 시작, 중국과 몽골 선교를 지망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동티모르에 가고자 하던 차에 남수단 주바에서 활동하는 공민호 수사(지아코모 고미노· 77·살레시오회 한국관구)의 권유로 톤즈에 왔다.

 

선교사는 인내가 필요하다

 

마중 나온 이해동 신부는 달변에 유쾌했지만 조금 지친 듯했다. 며칠 뒤 가진 인터뷰에서 이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먹는 것도 최악이지만, 이곳에서 살려면 먼저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하는데, 자꾸 싫은 마음이 생기더군요. 문화와 사고방식, 행동양식이 변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한계를 절감한 탓이지요.”

 

기도 속에서 이 신부는 ‘나는 준비가 안된 선교사구나’라고 성찰했다. 나중에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당신이 하고자 하는대로 따라가겠습니다”라고 기도했다. 어느 밤에는 지쳐 숙소 앞에 주저 앉아 밤하늘 별들을 향해 한숨 쉬듯 말했다.

 

“전기도 들어오고, 씻을 물도 있고, 진료소와 학교, 이제 있을 건 다 있는데…. 아무것도 없었을 때, 이태석 신부, 자네 참 힘들었겠군….”

 

이태석 신부라고 달랐을까? ‘끈질긴 인내’가 유일한 답임을 그도 이미 알고 있었다.

 

“선교사들은 예수님의 계획에 조그만 도구가 될 수 있기를 바랄 뿐…. 기다려야 한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서 기다려야 한다.”(「친구가 되어주실래요」 중에서)

 

한국, 다시 또 아프리카

 

1960년 한국에 와서 32년 동안 머물다가, 1992년 수단으로 떠나 24년째 살고 있는 공 수사는 지금은 주바에서 활동한다. 기자가 톤즈에 머물던 일주일 내내 그는 이태석 신부의 유품인 베이지색 건빵바지만 줄곧 입고 다니면서 “이 바지 좋은 바지예요. 품질도 좋고, 이 신부 냄새도 나고요”라면서 웃었다.

 

얼마 전에는 벌떼에 쏘여, 무려 200여개의 벌침을 몸에서 뽑아내야 했다. 어지간했으면 세상을 떠날 일이었다. 여든이 다 된 노구, 고향을 그릴 법도 하다. 하지만 한국 생활이 좀 만만해지니 다시 길을 떠나, 더 험한 아프리카 오지를 향했다. 선교사의 삶이다.

 

“톤즈에서 사람들은 만날 때마다 배고프다고 뭐든 달라고 합니다. 선교사로 때로는 힘이 들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갖고 있습니다. 항상 먹을 것이 있습니다. 그것도 없는 사람이 한 300만명 되지요.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수도원 밥은 뻔하다. 일주일 내내 변함 없는 메뉴. 옥수수를 갈아 찐 우갈리, 콩이 든 수프 약간, 콧바람에도 풀풀 날리는 밥알, 그리고 밍밍한 국수와 빳빳한 양고기 조금. 하지만, 맛이 빼어나진 않아도 배 곯는 일은 없다. 하루종일 망고만 씹어먹는 아이들에 비하면 호사이고 감사할 일이다.

 

살레시오회, 톤즈의 친구

 

살레시오회 톤즈공동체에는 이해동 신부 외에도 3명의 선교사가 있다. 2명은 인도, 1명은 케냐 출신이다. 원장인 존 피터 신부(John Peter)는 30년을 머물렀으니 가히 톤즈의 원로라 할 만하다.

 

선교사들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는 끝없이 이어지는 부족간 다툼이다. 지난해 성탄에도 2주에 걸쳐서 전투가 있었고 사람들이 많이 상했다. 지금도 밤 8시면 통행금지가 되고, 걸핏하면 총소리가 들린다. 분쟁을 중재하거나 전투를 진압해야 할 정부군은 도리어 “Let them kill each other”, 이를테면 “죽을 만큼 죽어봐야 한다”는 무책임한 말을 내뱉는다.

 

3월 13일에는 부족들 간의 평화를 기원하는 기도회가 톤즈 예수성심성당에서 열렸다. 각 부족장과 종교 지도자, 그리고 관공서 고위 관리들이 참석했다. 그 와중에도 세 개 부족의 족장들은 다툼 끝에 불참했다. 원장 신부는 강론에서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니 서로에게 분노하는 것은 신을 향해 분노하는 것”이라면서 “누구든 서로 죽이지 말라”고 호소했다.

 

돈보스코 라디오 방송국을 책임진 레오 신부와 케냐 출신 피터 가리오끼 신부는 각각 돈보스코 중고등학교와 초등학교 교장이기도 하다.

 

얼마 전에는 이제 ‘머리가 큰’ 고등학생들이 자격 미달 등을 이유로 교사들의 수업을 거부하고, 다른 아이들까지 학교에 오지 못하도록 ‘파업’을 했다. 레오 신부는 큰 문제는 아니라면서 곧 해결될 일이라고 말했지만, 초유의 사태에 수도회측이 꽤 당황한 것도 사실이다. 민주적 절차, 참된 시민의식과 교육 현장에서의 올바른 태도에 대한 교육이 선교사들의 또 하나의 숙제로 제기됐다.

 

여성 교육의 산실

 

MSMHC(그리스도인들의 도움이신 마리아 선교 수녀회) 소속 샨티, 도나, 모니카 수녀는 모두 인도 출신으로 주로 진료소에서 활동한다. 진료소에서는 직원까지 포함해 16명이 사람들을 돌보지만, 사실 의사는 없고,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주는 것이 전부이다. 그래도 하루에 200여명이 진료소를 찾는다.

 

이태석 신부를 기려 ‘존 리 하스피틀’(John Lee Hospital)이라 불리는 이 진료소 곁에는 똑같은 이름의 새 병원이 문을 열 예정이다. 이탈리아의 한 선교사가 이태석 신부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담아 추진한 ‘톤즈 프로젝트’의 결실이다. 80개 병상에 첨단 의료 시설이 가득 채워졌다. 톤즈에서는 처음으로 인큐베이터도 갖췄다. 샨티 수녀는 “반드시 의사를 초청해 전문 의료 서비스가 가능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까까메가(Kakamega) 수녀회 콘솔라타, 아달라이드, 그리고 인비올라타 수녀는 여학생 기숙사의 60여명 소녀들을 애지중지 돌본다. 원체 허름한 시설들이라 새 기숙사가 필요하긴 하지만 여학생 기숙사의 의미는 크다. 톤즈에서 가장 중요한 여성 교육의 집중적인 현장이기도 하지만, 기숙사 생활은 소와 딸을 맞바꾸는 강제 결혼의 폐해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해 준다.

 

선교사들도 인간적 고뇌와 약점을 모두 감추진 못한다. 때로는 번민하고, 때로는 거부하고 싶다. 모든 것이 열악한 아프리카 오지에서야 더 말해 무엇 할까. 하지만 그들은 기도하면서 버틴다. 그들이 간직한 믿음과 사랑이 지탱해주기 때문이다. 이해동 신부는 말한다.

 

“이곳은 하느님과의 끈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하느님께 힘을 얻지만 또한 사람들에게서 용기를 얻습니다. 봉사자와 은인들의 관대한 마음은 하루 더 이곳에 머물게 합니다. 혼자 힘으로는, 하느님과 동료 인간의 지지와 관심이 없이, 선교사들은 하루도 버틸 수 없습니다.”

 

 

▲ 예수성심성당에서 주일미사를 봉헌한 후 선교 수녀들과 학생들이

마을을 걸으며 이야기하고 있다.

 

▲ 살레시오회 남수단지부 톤즈공동체 이해동 신부(왼쪽)와 주바공동체 공민호 수사.

 

아프리카 남수단 톤즈 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