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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선미 시인 / 아무도 없는 마을

by 파스칼바이런 2019. 2. 13.

아무도 없는 마을

김선미 시인

 

 

헬멧을 쓰고 갔어 눈코입이 모인 사람끼리 몰려다니면 유령이 될 거 같지 않았거든

친구끼리 가족끼리 연인끼리

굴리거나 구르기를 좋아하는 것을 쓰고 다니는 건 어쨌든 기분 좋아지는 일이지

머리가 굴러다니는 상상을, 세상 어디든 갈수 있을 것 같아 깨지지 않을 자신감도 들어

입간판이 서 있는 곳까지 갔어

헬멧을 쓰면 계약이 성립되기 쉽잖아 죽을 사람들의 모임 같은 거

어디든 속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아 숨구멍이 간지러워 희박한 공기 속에 있는 것처럼 얼굴이 빵빵해져도

전쟁은 우리들의 교양 있는 고유문화

헬멧 하나를 문 앞에 걸어놓거나

벌판에 나란히 늘어놓으며

하나 둘 셋 넷 세어나가면서 마을 사람들 모두 울거나

가장 슬프게 우는 사람을 클로즈업하거나

튀김옷을 입고 하얗게 서 있지

처방전을 들고

산 사람처럼 기웃거리는 거

하루살이가 구름을 키우듯

일출을 보러 2층 테라스에 갔다가 태양이 넘어오는 걸 보다가 문 이 잠기는 걸 몰랐어

일조량이 부족한 곳에서 온 사람들이 문을 두드리고 있어 열어줘야 하는데 우루루 몰려오다보니

안에는 아무도 없어

헬멧을 한데 모아 놓으면 아무도 없는 마을이 되곤 하지

 

웹진 『시인광장』 2019년 2월호 발표

 


 

김선미 시인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 2009년 《시에》를 통해 등단,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시집으로 『마가린 공장으로 가요, 우리』(포지션, 2017)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