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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길성 시인 / 혼자 두는 바둑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2. 13.

조길성 시인 / 혼자 두는 바둑

 

 

돼지고기를 삶으면서 저녁 비 내립니다.

하수는 겁이 없고 고수는 변명이 없다며 검은 돌을 쥐고서 어둠이 내립니다.

끈 없는 구두에 질끈 끈을 동여매며 오시는 저녁입니다.

흰 돌이 부족해서 어쩌나 걱정하시며 낙숫물 듣는 저녁입니다.

 

살아 있는 유리창은 고요하지만 죽은 유리창은 동맥을 그을 수도 있다며 날카롭게 내리는 어둠입니다.

그녀가 갈비뼈 사이에 살고 있는 툰드라에서 서리꽃이 피었다며 웃는 차가운 저녁입니다.

중원에 검은 돌 한 점 놓고는 고요만이 가득한 저녁입니다.

 

평생 빈삼각만 두며 살아왔다고 거북등 같은 건 본 적도 없다며 내리는 어둠입니다.

나뭇잎을 단체로 떨어뜨리며 겨울이 강제 행정대집행 들어오는 저녁입니다.

나이를 먹으니 혼자 중얼거리는 일이 많아진다며 흰 눈썹 휘날리며 그 분이 오고 계시는 계가 불가능한 어둠입니다.

 

계간 『시산맥』 2018년 겨울호 발표

 


 

조길성 시인 / 드문드문 꽃

 

 

어느 봄날이었지 중얼거리자 꽃이 불어왔다.

어스름이 내리면 솜털 닮은 풀들이 깨어나는 시간,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며 모든 바람이 집으로 몰려가는 시간.

흰 종이가 물러가고 검은 종이가 책상위에 펼쳐지는 시간.

빼곡하게 적어놓은 일기는 여백을 찾을 수 없고, 세상 모든 창문들이 의문으로 빛나는 시간. 어린 어둠 속을 늙은 매화향기가 할퀴고 간 시간.

묵은지를 꺼내던 손등에 얼비치던 노을이 뺨 위에서 어두워지는 시간.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지 않으리라 으드득 이를 갈며 넘어지며 또 일어서는 눈사람의 시간.

기나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한 마리 겨울새가 휘익 날아간 뒤에 국수는 새롭게 끓고 동치미는 아직 얼음 쪽으로 기울어지는 시간.

드문드문 가시가 망막을 찢고 나오는 어두운 꽃들의 시간.

 

격월간 『현대시학』 2017년 11~12월호 발표

 


 

조길성 시인

2008년 《창작21》로 등단. 시집으로 『징검다리 건너』(문학의전당, 2011)와 『나는 보리밭으로 갈 것이다』(b, 2017)가 있음. 현재 한국작가회의, 창작21작가회 회원.